“왜 SF를 쓰십니까?”

우연찮은 기회에 SF 소설가라는 호칭을 얻게 된 지난 몇 년 동안 과학계가 아닌, 소설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나만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은 아니었고 SF 작가들이나 지망생, 또는 기존에 이미 등단한 예술문학1 작가들이 SF를 쓰려할 때조차 종종 주고받는 질문인 듯했다.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는 ‘SF 합평 모임에서 왜 SF를 쓰냐고 묻다니 이게 무슨 엉뚱한 질문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반대로 과학자들 가운데 나에게 ‘왜 연구 열심히 안 하고 SF 같은 것을 쓰느냐’고 물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는 현직 과학자입니다. 과학자가 과학소설science fiction 쓰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첫머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면 문학 쪽에서 출발하여 SF를 쓰는 많은 작가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곤 한다. 그들이 기대했던 답은 아마도 ‘SF에서 새로운 문학적 가능성을 봤다’거나 ‘SF야말로 사회적 약자,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문학이기 때문’과 같은 예술적, 문학적인 이유일 텐데, 질문을 받은 50대 이공계 아저씨는 ‘내가 과학자니까’라는 시큰둥한(?) 대답을 내뱉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교양 웹진에 ‘SF와 나’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서 ‘나는 SF 읽고 과학에 흥미를 느껴 과학자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과학자도 분명히 있겠지만 나의 경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내가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계기는 계몽사에서 발간했던 위인전집에서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읽고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읽기 시작했던 SF가 과학에 대한 나의 흥미를 크게 북돋워 주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아주 다행스럽게도 1970년대 우리나라에는 ‘아이디어 회관’이라는 걸출한 SF 출판사가 존재했었다. 이곳에서 출판된, 무려 60권에 달하는 SF 단행본들(그중에는 한국 창작 SF도 10권이나 포함되어 있었다)은 어린이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당시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학급문고2에는 아이디어 회관 SF가 꼭 몇 권씩 꽂혀 있었다.

당시 읽었던 SF들은 분명히 나의 과학 상식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보면, 지구가 있고, 태양계가 있고, 은하가 있고, 우주가 있다는 개념을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학교 과학 수업이 아니라 SF 소설들 덕분이었다. 이반 에프레모프의 <안드로메다 성운(원제: 안드로메다 은하)> (그림1-1), E E 에번스의 <스카이라크호 (원제: 우주의 스카이라크 호)> (그림1-2), A E 밴 보트의 <비글호의 모험> (그림1-3), 아서 C 클라크의 <우주 스테이션 (원제: 하늘의 섬)> (그림1-4), 에드먼드 해밀턴의 <싸우는 미래인 (캡틴 퓨처 시리즈)> (그림1-5) 등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작품들이다. 오늘날 흔히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라고 불리는 부류의 SF 소설들이었다.

SF의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해서 인상 깊게 얻어진 과학지식들은 학교 수업 시간에 딱딱한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들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기억에 남았고, 학교 진도보다 앞선 과학 지식들을 친구들 간의 대화에서 써먹으면 과학소년으로 인정받아 으쓱댈(?) 수 있었다. 그저 한 시절의 기획 출판물이었던 아이디어 회관 SF 전집이 출간된 지 25년이나 지난 후(1999년경)에 복원 프로젝트를 통해 부활하고, 또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홈페이지가 살아남아3 SF 팬들이 방문하는 것을 보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던 사이언스 키즈들이 결코 적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내 또래 사이언스 키즈들이 SF를 열심히 읽었던 이유들 가운데는 당시 한창 흥했던 어린이 잡지들의 영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독자들 대상의 종합월간지들이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 잡지들은 기본적으로 만화나 아동문학 중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빈번하게 서양의 SF 단편 명작들을 번역하여 게재하곤 했다. 아이디어 회관 SF들이 주로 장편을 중심으로 해외 SF들을 한국에 소개했다면 (물론 어린이용으로 상당히 축약된 분량이었다), 당시 어린이 잡지들은 단편을 중심으로 해외 SF 명작들을 선보이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겠다. 지금 와서 보면 아마도 일본어 중역이었을 가능성도 높고 저작권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 같지만.

그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아시모프의 걸작 SF 단편집인 <아이, 로봇I, Robot> (그림2)의 거의 전체를 읽을 수 있었다. 당시 내가 구독하던 소년 잡지에서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을 매달 1편씩 연재했기 때문이다. 일본 SF의 거장 호시 신이치의 초단편들을 접했던 곳도 역시 어린이 잡지들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등교육 과정에 입학하게 되면서 아무래도 어린이용 SF 문고본이나 월간지에는 더 이상 손이 가지 않게 되었고, 청소년용 잡지들에서는 SF를 다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SF를 좋아했던 내 입장에서 다행스러웠던 일은 중고교 시절이었던 1980년대에 서구의 명작 SF 장편소설들 몇몇이 한국에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이하 <2001>)와 그 속편들(그림3)이었다. 지난 45년간 나의 SF 독서 기록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을 꼽으라면 단연코 <2001>4을 거론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2001>과 속편들을 40년 세월 동안 항상 소장하며 가지고 다녔고 지금도 내 책장의 SF 칸에 신주단지처럼 고이 모셔두고 있다. 아서 C 클라크의 하드 SF에 대한 나의 칭송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어른이 되어가는 사춘기에 SF에 대한 나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던 또 다른 공로자는, 느닷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동서추리문고였다.5 SF에는 아이디어 회관 문고가 있었듯이 추리소설에는 동서추리문고가 있었다고 해야 할 만큼 한국 추리소설 팬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70년대 문고본인데 여기에 추리소설 명작들과 더불어 SF 소설들이 간간히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중고생 시절에 아서 C 클라크의 <지구 유년기 끝날 때(유년기의 끝)>(그림5)와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성연대기>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동서추리문고 덕분이었고, 한국의 SF 마니아들이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화성의 프린세스>나 알프레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 같은 공상과학소설들을 접할 수 있었던 통로 또한 동서추리문고였다.

당시 나는 한국의 과학소년소녀들이 중고교 시절을 거치면서 흔히 겪게 되는 딜레마에 빠져있었는데, 그것은 의대에 진학하라는 여러 방면에서의 압박이었다. 아마 나와 같은 세대인 사이언스 키즈들은 누구나 한 번 즈음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과학자가 되기보다는 의사가 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니? 그런 압박에 저항하면서 과학자로서의 진로를 끝까지 고집할 수 있었던 한 가지 동력은 <2001> 등에서 받았던 과학적 스토리텔링의 감동이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할 무렵, PC통신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한국에도 SF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들의 노력 덕분에 다양한 해외 SF 걸작들이 활발하게 번역되었다. 이미 본격적으로 전문과학자의 커리어 루트에 올라탔기 때문인지 SF 소설을 읽는 것이 과학자로서 나의 인생에 더 이상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SF 읽기보다는 학위논문을 쓰는 것이 더 급했다), 아서 C 클라크의 <라마와의 랑데부>나 <낙원의 샘>(그림6), 포울 앤더슨의 <타우 제로>(그림7) 같은 하드 SF의 걸작들을 읽으며 그저 과학 자체만이 아닌, 스토리텔링과 결합된 과학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내가 과학자로서의 인생을 계속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에 특별히 기억되는 일은 내 주변에서 직접 SF를 창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전자공학과의 친구는 PC통신 온라인 커뮤니티에 창작 SF를 연재하더니 단행본 출판(<아틀란티스 광시곡>)까지 했고 제법 인기가 있었는지 후속작(<우먼Q>)까지 나왔으며, 동아리 선배 한 분도 SF소설(<가리봉의 비밀>(그림8-1))을 출판하셨고, 직접 안면은 없지만 같은 대학원 재학생이 출간한 SF를(<로그인>(그림8-2))를 아주 인상 깊게 읽으며 그 필력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박사학위를 받은 후 20여 년간 연구 일선의 과학자로서 나름 성실하게 살아오며 간간히 SF 읽기를 즐겼을 뿐이다. 과학소년이 이제는 정말로 과학자가 되었기 때문인지 이 기간에 읽었던 SF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그레고리 벤포드의 <타임스케이프>(그림9)라는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작품이다(그래도 네뷸러상6을 수상한 명작이다).

저자가 집필 당시 현역 물리학자였기 때문이었는지 나의 세부 전공인 실험고체물리학 분야의 소재를 가지고7,8 현대 대학의 연구시스템에서 오는 긴장감을 스토리로 잘 연결시킨 데에 더해서, 배경의 절반은 영국의 대학도시이고 나머지 절반은 미국의 샌디에고였기 때문에 두 군데 모두 포닥이나 업무 출장으로 체류해 보았던 적이 있던 나에게는 문자 그대로 피부에 와닿는 내용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타임스케이프>는 단순히 우주나 공룡 또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는 SF만이 아니라 성인이 된 과학자도 진지한 자세로 읽을 수 있는 과학적 SF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내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토록 오랫동안 SF를 즐겨왔고 내 주변에서 SF 작가들이 배출되기도 했지만 나는 50세가 넘을 때까지 직접 SF를 써보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추리소설을 써보려다가 몇 페이지 쓰지도 못하고 때려치웠던 적은 있다. 그것도 사춘기 때 이야기다). 애초에 문학은 나의 관심 영역이 전혀 아니었고 SF는 과학애호의 한 가지 방법이었을 뿐이지 추구해야 할 어떤 가치나 목표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는 문학적 야심을 품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과학자가 SF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나의 퉁명스러운 답변으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이런 말까지 덧붙이면 문학 쪽에서 SF를 쓰려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곤 한다.

내가 SF 소설가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20년대 우리나라에서 SF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때 과학창의재단에서 지원하고 한국SF협회에서 주최했던 어느 작은 공모전에 초단편9 SF를 응모했다가 덜컥 입선했던 덕분이다. 초단편은 원고 분량이 적어 쓰기에 부담이 없고, 공모전 안내를 봤을 때 마침 ‘이런 거 한 번 써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아이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원고를 제출했었다.

입선 사실을 주변에 알렸을 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문학적 야심을 가슴 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알게 되었다.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평생 정치계와 경제계에서 살아오신 아버님이 원래 하고 싶으셨던 일은 영문과를 졸업하고 문필가가 되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고, 어느 공대 교수님이 ‘나도 문학을 하고 싶었어요, 정말 부럽네요’라고 말했을 때도 뜻밖이었으며, 인문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사업에 뛰어들어 큰 재산을 이룬 동창생이 술김에나마 자신의 최종목표는 그래도 문학적인 성취라고 고백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황당하기도 했다. 고시생보다 더 많은 것이 문학소년, 문학소녀라더니 그 말이 진짜였나 보다.

공모전 당선 이후 조금씩 원고 의뢰가 들어와서 단편과 초단편을 몇 편 웹진에 게재했고 개인 단편집도 출간이 추진되고 있으니 얼떨결에 SF 소설가가 된 것이 맞기는 하겠지만10, 작가를 꿈꿔본 적도 없고 습작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 내가 ‘이래도 되나? 이걸 왜 하나?’ 하는 걱정이 어느 순간부터 들기 시작했다. (공모전 당선되고 데뷔한 다음에서야 ‘이걸 내가 왜 하나?’ 고민하는 녀석은 아마 나 혼자뿐일 것 같다.)

그럴 때 나에게 해답을 던져준 작품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그림10)이었다. 굉장히 유명한 SF이고 1990년대에 이미 번역되었던 적이 있는데 나는 그동안 읽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야 재출간된 판본으로 이 소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해서 흥미진진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는, 내가 읽었던 최고의 SF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난 20년간 내가 읽었던 가장 재미있는 SF 소설이었다. 며칠에 걸쳐 천천히 읽을 생각으로 밤 11시경에 처음 책을 펼쳐 들었다가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끝까지 단번에 통독하고 나서 (다음날 잠이 부족한 채로 횡설수설하는 나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답을 얻었다. 과학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결합시킨 SF라는 장르는 공들여 창작할 가치가 분명히 있다고.

내가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부터 SF를 읽으면서 느꼈던, 과학과 스토리텔링이 잘 어울릴 때 맛볼 수 있었던, 그 어떤 짜릿한 느낌을 되살려 내 소설로 구현하고 다음 세대의 과학소년소녀들과 현역 과학자들에게 읽힐 수 있다면, 그래서 사이언스 키즈들이 조금이라도 더 흥미롭게 과학을 즐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음번에 또 ‘왜 SF를 쓰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제는 시큰둥하거나 퉁명스러운 답변 말고 이렇게 근사한 답을 내놓으려 한다.

“과학의 즐거움을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에 담아 전달하기 위해서요.”

연재기사

[SF와 나 (2)] 20세기 중반 SF 소설에 그려진 인공지능
[SF와 나 (3)] 삼체와 나
[SF와 나 (4)] 내가 SF를 즐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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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영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경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