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르(ne_reu)

삼체 문제(三體問題, three-body problem)는 세 개의 물체 간에 작용하는 중력과 그로 인한 움직임을 다루는 고전역학 문제이다. 그 발단은 태양·지구· 세 천체의 궤도에 대한 물음이었다. 아이작 뉴턴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에서 세 개의 물체가 중력을 주고 받으며 움직이는 경우에 대해 다루었다. 이후 프랑스의 수학자 장 르 롱 달랑베르알렉시스 클레로(Alexis Clairaut)는 적절한 근사를 이용한 삼체문제의 해결법에 관한 논문을 1747년에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하였다.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조제프루이 라그랑주 등도 삼체 문제를 연구하였다. 드디어 1890년에 앙리 푸앵카레는 삼체문제의 일반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는데, 이는 훗날 혼돈 이론의 모태가 되었다(나무위키 정리 참고). 세 물체 간의 상호 운동 문제가 혼돈스럽다는 건 그보다 많은 사체, 오체, 즉 달랑 두 물체간의 상호 운동을 제외한 모든 다체 문제에 정확한 해법이 없고 언제든지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의미한다.

인간관계의 혼란스러움 역시 시작은 삼각관계이다. 하지만, 푸앵카레가 내놓은 우울한 증명 이후에도 덜 일반적인 특수해에 대한 연구는 계속 이어져 왔다. 인간사에서도 모든 삼각관계를 단번에 해결할 묘법은 없지만 개별적인 삼각 관계를 하나씩 해결할 방법은 종종 찾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푸앵카래의 증명 이후 이어진 수학자들의 노력이 곧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바랄 이유가 있다는 의미로 전달된다.

소설 <삼체>의 작가 류츠신은 삼체문제의 일반해가 없다는 증명에 자연스레 뒤따를 절망을 넘어선 희망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책을 쓴 것 같다. 우주 어느 곳에는 광속 우주선을 만들고, 항성간 여행을 해외 여행하듯 할 수 있는 세 개의 태양을 가진 행성에 사는 우주인들이 있다. 세 개의 태양이 만들어내는 궤도의 혼돈이 행성에는 극심한 기후 혼돈으로 이어지고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절실한 문제이기에 이들을 삼체인이라고 부른다. 양성자 하나에 행성 하나가 가진 지식을 전부 새겨 넣을 정도로 경이로운 과학기술 수준을 갖고 있지만 정작 세 개의 태양이 불규칙하게 뜨고 지는 혼돈스런 환경은 제어할 바를 몰랐다. 태양들의 위치와 관계에 따라 자기 행성의 문명은 멸망하고 재생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냉혹한 환경 속에서 삼체인들은 오직 생존을 위해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개미나 꿀벌처럼 종족 보존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삶에 익숙하다. 살아남기 위해 몸에 물 한 방울 남기지 않는 탈수 상태가 되어 방공호 같은 창고에서 버티다가 살만한 기후가 되면 물을 흡수해서 활동을 시작한다. 삼체인의 생활 방식에 비하면 고통이 심해 눈물마저 말라버린다는 지구적 표현은 여전히 낭만적이다. 종족 전체의 생존에 도움되지 않는 이들은 탈수시킨 후 소각하여 자원을 최적으로 배분해버린다. 개인의 존엄은 꿈도 꿀 수 없고 오직 문명의 지속만이 지상 목표인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이다.

모행성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기에 이들은 생존을 위한 다른 행성을 찾아내고 점령해야만 한다. 그 때 운명처럼 지구에서 보낸 생명체 탐사 전파가 삼체행성에 도착한다. 막상 전파의 첫 수신자인 삼체인은 원시적인 생명체들이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 사는 지구를 있는 그대로 지켜주고 싶었다. “경고한다. 대답하지 마라! 대답하는 순간 그곳의 위치가 파악되어 당신들의 세계는 점령 당할 것이다.” 자신의 종족과 모행성 대신 지구를 온전히 지키고 싶었던, 지구인에게는 메시아 같았던 삼체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의 광기속에서 인간종의 추악함에 대한 분노가 응어리져 인류에 대한 희망을 잃은 천체물리학자 예원제는 담담히 응답한다. “이곳에 오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이 세계를 얻는 것을 돕겠습니다. 우리 문명은 이미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지구에는 비록 물리적 태양이 하나 밖에 없었지만 인간의 절대 권력과 권력에 취한 인간의 광기라는 또다른 종류의 태양이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간 사회의 삼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외계인에게 해법을 맡겨버린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타락으로 온 인류가 죄에 빠져버렸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과 구원이 다시 주어진다고 성경은 말한다. 삼체에서는 예원제라는 여인의 인류에 대한 절망과 복수심이 삼체인을 지구로 불러들이고, 한 남자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청신이라는 또 다른 한 여인이 인류를 대표하여 삼체인에 저항하며 인류를 지켜내는 새로운 이브가 된다. 삼체가 다루는 시간과 공간이 지구식 셈 법으로는 헤아리기 힘든 거대한 규모이기에 삼체는 지구의 일상에 속박된 나머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근원적인 질문을 독자들에게 떠올리게 한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랑스 예술가 폴 고갱(Paul Gauguin)의 마지막 대작으로 알려진 그림 제목이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였던 플로라 트리스탕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유명한 구호를 최초로 제안한 사람이다. 트리스탕은 1840년에  <런던 산책>을 통해 영국 노동자들의 처참한 생활 상을 고발하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만들었고, 이를 잘 알고 있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5년 후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를 발간했다.1848년 2월 21일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내놓았고, 트리스탕이 만든 이 구호를  끝맺음 구호로 사용하였다. 외할머니를 존경했던 고갱은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 근원적인 질문이면서 한번 접하면 잊히지 않는 구호의 색채를 띄는 것은  외할머니의 영향이었던 듯하다.

고갱은 건강 악화와 유난히 깊이 사랑한 딸의 죽음으로 인한 낙심에 빚 독촉까지 겹치자 생의 끝자락이 다가오는 것을 예감한 듯 마지막 대작을 완성하고 1903년 5월 8일 세상을 떠났다. 고갱의 마지막 작품은 선악과를 따는 이브의 화신인 듯한 여인을 중앙에 배치한 것을 시작으로 뒷면에 낙원에서 무언가를 품고 추방 당하는 남녀 한 쌍으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바닥에 누운 젖먹이 아기부터 바닥에 주저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백발 노파로 이어진다. 이 그림은 375 cm(가로) x139 cm(세로) 크기의 대작으로 왼쪽 상단 구석에 프랑스어로 D’ où Venons Nous / Que Sommes Nous / Où Allons Nous가 새겨져 있고, 그림 오른쪽 위 구석에 서명과 날짜(P. Gauguin / 1897)가 써있다.  부유한 증권 중개인의 삶을 던지고 화가가 된 이후 ‘가난과 방랑, 열정과 예술혼, 반문명, 타히티섬, 원시생활, 병마와 자살기도’ 등 겉보기에는 선정적인 단어로 압축되는 삶을 살아온 고갱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씨름을 한 의문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였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행복한 삶에서는 생겨날 리 없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품지 않고 생을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축복 받은 인생일 것이다. 평생 어떤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도 없이 늘 화창한 봄날 같은 삶을 살지 않는 한 우리는 어느 순간 이런 질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삼체문제와 마찬가지로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알 수 없다’이기에 타히티섬에서 병마와 가난과 절망으로 매 순간 죽음을 응시하며 그려낸 고갱의 그림이 후손 인류의 대다수가 알고 있는 명화가 되었을 것이다. 고갱의 그 걸작은 일반해는 아니어도 특수해 쯤은 되는 답이었다.

소설 삼체는 미국 대통령부터 전 세계 죄수들과 노숙인들까지 갑갑한 삶에 갇혀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에게 한 순간의 특수해 쯤의 답은 제공하는 책이 될 것 같다. 인생에 대해 어떤 근원적인 의문을 품고 있든 삼체를 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아는 만큼, 자신의 처지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다만, 아는 만큼 보이는 것 또한 진리이기 때문에 질문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답은 없다. 어떤 문제를 갖고 삼체를 만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천지불인’. 30년 전 지진으로 폐허가 된 중국 어느 도시를 배경 사진으로 한 신문 기사에 참사 현장을 본 중국 관료가 한 말이라고 소개된 글이다. 쉬운 한자들로 이루어졌기에 읽기는 쉬웠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입시 지옥을 무사히 탈출하여 좋은 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입학한 뒤 좋은 인생을 살고 있는 명문대 학생인 내게 천지란 햇살 반짝이는 낙원, 인자하고 친절한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였다. 그런데 왜 천지불인인가? 납득할 수 없었기에 천지불인이라는 쉽고, 강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은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흘낏 쳐다본 지하실 한 켠의 잠긴 문의 기억처럼 사라지지 않는 불안으로 잠재의식에  남아 떠돌았다. 그 뒤 삼십 년이 지났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하루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호흡하며 살아온 지금, ‘천지불인’과 ‘상선약수’는 천식 환자의 호흡기처럼, 갑갑할 때 틈나는대로 읊조려서 이 세상을 숨쉬고 살만한 공간으로 만드는 내 삶의 산소공급기가 됐다.

천지불인의 어원은 노자의 도덕경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  위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  성인불인(聖人不仁)  이백성위추구(以百姓爲芻狗) [천지는 인자하지 않으니, 만물을 제사에 사용하는 지푸라기로 엮어 만든 풀강아지 대하듯 한다. 풀강아지는 제사 때는 비단옷을 입혀 아주 귀하게 쓰이다가 제사가 끝나면 시궁창에 내버려져 짓밟히거나 태워진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으니, 백성을  풀강아지 대하듯 한다.]”  지상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인 천자를 그 자리에 임명할 만한 권위와 자격을 갖춘 어떤 존재인 천지를 정점으로 짜여진 이 세상의 체계 속에서 개별적인 존재들은 인간을 포함해서 모두 풀강아지다. 쓸모를 인정받을 때는 비단옷을 입어 화려해 보이지만 쓸모가 소진된 뒤에는 불구덩이에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그런 존재다. 전체주의 사회이건 민주주의 사회이건 적용되는 뉴턴 법칙 ma=F가 있다면 그 F는 바로 ‘천지불인’이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같은 것들이 마찰력이 되어 급속도로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을 막아준다 해도 한계가 있다.  마찰력 덕분에 하늘에서 등가속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우리 피부에 덜 아프듯, 우리 몸이 순식간에 불구덩이 속에 던져 지는 걸 면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마찰력이 강해도 F의 본질은 ‘천지불인’임을 나는 배웠다. ‘성인’은 천지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는 지도층이다. 성인은 나의 친구인 줄 알았으나, 때가 되어 그들이 진정 사랑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아닌 ‘명분’이었다는 걸 알았다. 명분을 위해 풀강아지를 끊임없이 만들고 쓰고 던져버리는 게 통치의 동역학이다.  

세상이 항상 내 뜻대로 돌아가는 것 인줄 알던 어린아이가  천지불인을 인간 삶의 기본 값으로 수용하니 어른이 되었다. 천지불인의 진리는 절망의 쇠고랑이 아니라 천식 걸린 환자에게 주어진 호흡기이다. 나보다 형편이 더 나아 보이는 타인은 비단옷 입은 풀강아지, 나만 못한 타인은 불구덩이에 더 가까이 눕혀진 풀강아지일 뿐이다. 이런 운동 방정식에서 유일하게 항상성을 가진 답은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생애 첫날이자 마지막 날처럼 사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상선약수(上善若水) 수선이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 고기어도(故幾於道)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공을 다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물은 낮은 곳으로 임한다(居善地). 물은 연못처럼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心善淵). 물은 아낌없이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푼다(與善仁). 물은 신뢰를 잃지 않는다(言善信). 물은 세상을 깨끗하게 해준다(正善治). 물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事善能). 물은 얼 때와 녹을 때를 안다(動善時). 부유부쟁(夫唯不爭) 고무우(故無尤)[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 노자는 물 속에 겸손(謙遜), 지혜(智慧), 포용(包容), 융통(融通), 인내(忍耐), 용기(勇氣), 대의(大義)가 모두 담겨있다고 한다. 물의 성품이 이 정도이니 ‘상선약수’가 아닐 수 없다.

과학자로서 나도 물을 찬양한다. 물의 풍부함이 첫 번째 이유고, 생명에 관여함이 두 번째 이유다. 그러나 그 풍부함 때문에 우리는 물이 얼마나 특이한 액체인지 자각하지 못하기도 한다. 액체가 상온(절대 온도 300도 근방)에서 존재하는 것은 정말 드문 현상이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기체를 액체로 만들기 위해 한 세기 이상을 들여서 기술과 이론을 개발했고, 온네스가 헬륨을 액체로 만들면서 그 노력의 정점을 찍었다. 액체는 고군분투의 과정을 통해 기체에서 겨우 추출해내는 것이 정상인데 물은 ‘저절로’ 존재한다. 역설적이게도 물은 이토록 풍부하지만 물처럼 사는 사람을 찾기란 액체 헬륨을 찾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성인이 되라고 배웠고 성인을 칭송 할 뿐 물처럼 사는 자연인 도인을 그다지 칭송하지 않는다. 상선약수는 천지불인, 성인불인에 대한 해독제일 수 있지만, 노자가 칭송한 물다움은 현대인에게 물이 아니라 액체 헬륨 만큼이나 도달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천지와 성인의 풀강아지 취급에 상선약수 처방으로 순응하지 않고 분노한 개인들은 다른 처방을 찾기도 한다. 천지와 성인을 능가하는 더 높은 믿음 체계(가령 종교)를 만들어 그 속에 귀의하기도 하고, 삼체인을 불러들이는 예원제처럼 외계인의 힘을 빌어 지구의 부조리를 청소해달라고 빌기도 한다. 하나님의 대홍수 대신 외계인의 대홍수를 비는 것이다. ‘삼체’의 시작은 그러했다. 자칭 지도자란 사람의 변덕 때문에 인생을 강탈당한, 뛰어나고 순수했던 과학자 주인공이 찾아낸 방책은 우주를 향해 전파를 쏘는 것이었다. 그녀의 기도에 대한 삼체인의 응답은 ‘지구 침공’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닥쳐서 3재8난이 한꺼번에 몰아친듯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사람에게서도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힘든 시간을 견디면서, 육신 또한 끝없는 사막이나 캄캄한 터널을 걷는 것처러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힘든 시간을 견뎌본 사람이 삼체를 읽는다면 책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넓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상황이 되면 비로소 인간이 얼마나 믿지못할 존재인지, 그럼에도 삶은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가 보인다. 보도블럭 틈에 피어난 꽃 한송이가 예사롭지 않고, 지하철 역 바닥에서 밟히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꿈틀대는 애벌레조차 안스러워 안전지대로 옮겨주게 된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블랙홀에 갇혀 기약없는 탈출과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미국 대통령 에게도 초월을 경험하게 했다는 삼체라는 책은 꼭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삼체를 읽을 때 작품 스케일이 워낙 커서 백악관의 일상사가 사소하게 느껴졌다”고 평했다. 우리 삶의 조건은 항상 너무 높거나 너무 낮다. 과학자들은 ‘불안정한 평형 상태’라는 말로 이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누구에게나 딱 알맞은 것은 없다. ‘어린왕자’에서 여우와 어린 왕자가 왕자의 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럼 네 별은 지구가 아니라 다른 별이란 말이야?” “그래” “그 별에도 사냥꾼이 있어?” “아니. 없어.” “그거 대단하군! 그럼 닭은?” ”없지.” “역시 완전한 것은 없어.” 역시 완전한 것은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먼지 가득한 채 황폐해지는 지구를 대체할 인류의 터전을 찾기위해 웜홀을 통해 항성 간 우주여행을 떠나는 탐험가들의 모험이 중요한 소재였다. 멸망이 눈앞에 다가온 듯한 절망적인 순간임에도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라는 말을 남기고 과학자 아빠는 사랑하는 딸이 살 수 있는 행성을 찾아 생환의 기약없는 우주탐험에 나선다. 딸에 대한 아빠의 극진한 사랑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문제의 답을 찾는 원동력이다. 사랑으로 원동력을 삼는 지구인들과 달리 과학기술과 생존본능을 원동력으로 삼은 삼체인들의 이주 준비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티시 이노호사의 노래 ‘돈데보이’처럼 삼체인들 모두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미국으로 불법 이민을 시도하는 멕시코 남성이 자신의 연인을 그리워하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혼잣말하듯 읊조리는 돈데보이 음조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삼체인도 이주준비를 위해 삼체인 대부분의 생명을 바쳐야 했으니 내년에 넷플릭스가 만들어낸다는 영화 ‘삼체’에서 삼체인의 이주 준비 과정을 그려내는 배경 음악은 영화 ‘스타워즈’의 시작과는 달리 한없이 슬프고 쓸쓸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큰 문제에 직면한 것은 삼체인이 이사 갈 집으로 택한 지구에 살고 있는 지구인이다. 지구는 물리적 태양이 하나밖에 없는 매우 ‘안정적인’ 행성이지만 인간 군상 속엔 자칭 태양이 되고 싶어하는 지도자란 사람들이 득시글거려 인간적, 사회적 삼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무능과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 군상들 때문에 할 수만 있다면 다 쓸어버리고 깨끗하게 새로 시작하게 만들고 싶은 지긋지긋한 곳이지만 내가 살고 부모가 살고 자식이 살아야 하는 하나뿐인 집이기에 삼체인에게 호락호락 내줄 수는 없다. 지구에서의 삶을 계속 누리고 지키기 위해 지구인들도 궁리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시도한다.

예측 가능한 태양 하나와 상호 작용하며 사는 지구인의 삶도 결코 녹록지 않은데 세 개의 태양과 함께 사는 삼체인의 삶은 얼마나 고달플까 상상하며 저자가 묘사한 삼체인의 생존법을 보는 것도 정말 흥미롭다. 태양이 많아도, 태양이 없어도 견디기 힘든 세계. 너무나 혹독한 시절은 탈수되어 종이 두루마리로 변해서 견디다 좋은 시절이 되면 다시 물을 만나 몸을 얻어 활동하는 삼체인을 통해 분서갱유와 사상 통제의 혹독한 시기를 견딘 중국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보이는 듯 하다. 힘든 시절을 견디는 힘은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데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도 유배지 혹은 감옥에서 보낸 편지로 책 한 권씩을 펴낼 만큼 힘든 시기를 보낸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신영복 교수 등을 통해 알고 있다. 삼체인들은 세 개의 태양으로 인해 도저히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시기에는 책이 되어 견디다가 태양이 한 개만 보여 살만한 시절이 되면 비로소 삶을 누린다. 삼체인들이 딱 맞게 떠오른 한 개의 태양을 보고 너 나 할 것 없이 한마음으로 기뻐하며 창고에서 굴러 나와 탈수된 두루마리 상태를 벗어던지고 호수와 강과 바다에 몸을 담가 수분을 양껏 흡수하고 몸을 되찾은 기쁨을 만끽하며 서로의 생사와 안부를 확인하고 축하와 위로를 나누는 장면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매일 맞이하는 단 하나의 태양에 의한 딱 맞춤한 일출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요 축복이다. 한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는 사실은 살만한 시절이 되었다는 것이고 더 이상 바랄것이 없는 축제의 소재가 된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누리는 매일매일의 일출은 엄청난 축복이다. 우리 스스로 두 개의 태양을 더 만들어 혼돈의 세상에 스스로 빠져들기 전까지는. 삼체 행성에서는 한 개의 태양 덕분에 잠시 기쁨을 누리지만 그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기와 장소에 난데없이 3개의 태양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엄청난 재앙을 마주하는 일이 흔하다.  생명보존을 위해 탈수 할 시간조차 벌지 못한 채 세 개의 태양이 뿜어내는 햇살의 열기로 삼체인들이 순식간에 불에 타서 한 줄기 연기가 되어 소멸해버리는 장면에서는 분서갱유, 문화 대혁명 시기에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가정이든 사회든 국가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태양같은 존재, 달 같은 존재, 지구 같은 존재가 골고루 있다. 태양이 너무 많으면 지구나 달 같은 존재는 견디기 힘들어진다. 문화 대혁명기의 중국도 태양이 너무 많았던 것은 아닐까? 그 태양 열기에 삶과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잃은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책 중 하나가  <삼체>이다. 위화가 쓴 소설 ‘인생’이 흙에서 오는 위안이라면 류츠신이 쓴 소설 ‘삼체’는  별에서 오는 위로다. 

삼체는 지극히 작은 개인이 무한히 큰 우주를 지키는 비밀을 품은 이야기다. 삼체는 하잘 것 없는 개인이 목숨 바쳐 지켜야 할 무엇이 생겼을 때 온 우주를 품게 되고, 유한한 목숨이 다해 쓰러질 때 옆에서 또 누군가가 사랑하는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우주를 지키는 무거운 일을 감당하게 되어 지금까지 우주가 무한히 존재하고 있다는 비밀을 알려준다. 무궁화가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가 되고 백일홍도 꽃 잎 하나가 백일을 가는 것이 아니라 손에 손잡고 이어 달리기 하듯 피어난 꽃잎들이 백일을 살아낸 것처럼 우주도 지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살아내는 힘으로 무한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바닷가 모래알 하나보다 작고 하찮아 보이는 개개인의 하루가 무한을 만들고 우주를 만든다. 삼체를 읽으면 가려져 있던 하늘이 보이고 하루하루 밥벌이에 급급한 벌레처럼 살아가는 내가 사실은 우주를 지키는  수호자라는 것을 알려준다.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가 바로 쳇 바퀴 돌리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아빠와 딸이 한 공간에 있지만 블랙홀의 중력으로 왜곡된 시공간 때문에 소통하지 못한 채 서로를 그리워하고 외로워한다. 1인 1휴대폰 시대가 되면서 자신의 휴대폰으로 만든 블랙홀 같은 세계에서 갇힌 것도 모른 채 갇혀 살고 있는 부모, 자식들의 소통이 차원을 뛰어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시공간이 왜곡된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질 무렵 노을빛이 사무치게 외롭고 지구별은 너무 낯설고 인생 곳곳에 포진한 블랙홀의 존재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와 두려움으로 한 발짝도 뗄 수 없을 때 삼체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숨겨진 구원의 동아줄을 찾을 힘을 준다. ‘천지불인, 상선약수’의 샘을 만나 수시로 목을 축이는 것은 덤으로 받는 선물이다.

관련기사

[SF와 나 (1)] https://horizon.kias.re.kr/24586/
[SF와 나 (2)] https://horizon.kias.re.kr/25313/
[SF와 나 (4)] https://horizon.kias.re.kr/25454/

한정훈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전)HORIZON 편집위원('19.03.-'2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