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g

작년 가을의 어느 날, 미국 시카고에 출장이 잡혀서 이른 아침에 일어나 공항버스를 타러 나왔다. 하필 출장 전 날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영하 9도의 날씨에 손을 비비며 버스를 기다린다. 시카고도 혹독한 겨울 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인데 도착하면 현지 날씨는 영하 14도라고 한다. 날씨가 이렇게 춥지 않다면 가벼운 짐가방만 챙겨서 휘리릭 다녀올 텐데, 이렇게 추울 때 출장을 다니면 옷도 겹겹이 입고 장갑도 챙기고, 모자도 꺼내 쓰고 영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다. 특히 긴 목도리를 꺼내 목에 여러 번 감아 두르다 보면 꽤 갑갑한 느낌이 든다. 실내에 들어와 목도리를 풀면서 둥그렇게 목을 여러 번 말고 있던 천이 훌렁 풀려 쭉 펴진 단순한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위상수학자들이 평소에 복잡한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로 이러하다는 생각에 그나마 잠시 미소가 지어진다.

어떠한 복잡한 공간이 주어졌을 때, 이보다 훨씬 단순한 형태의, 마치 쭉 펴진 상태의 목도리 같은 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단순한 공간을 둘둘 말아 포개었을 때 원래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의 모양이 되는 것으로 상황을 이해해 볼 수 있다. 이때 더 단순하게 펴진 공간을 주어진 공간의 덮개cover라고 부른다. 조금 더 정확히 위상수학자들이 말하는 덮개의 의미를 알아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위상공간의 의미, 그리고 어떤 점의 근방이라는 개념을 복습할 필요가 있다. 혹시 기억이 희미해진 독자들은 필자의 예전 글 <거리 개념이 없는 세상에서 가깝고 멂을 정의하기>를 다시 한 번 읽어주길 바란다.

공간 $X$가 공간 $Y$를 덮는 상황을 수학적으로 설명해보자. 우선 $X$에서 $Y$로 가는 어떤 함수 $f$가 있어서, $X$의 몇몇 점들을 $Y$의 하나의 같은 점으로 겹쳐서 보낸다고 상상하자. 이때 이 함수는 반드시 연속이어야 하는데, 함수의 연속성에 대한 엄밀한 직관은 필자의 또 다른 예전 글 <연속성의 상대성>을 참고해 주면 좋겠다. 간단히 말해 공간 $X$의 어떤 점 $x$에서 함수 $f$가 연속이라는 것은, 도착지인 $Y$에서 $f(x)$주변의 임의의 작은 근방 $V$를 잡았을 때, 출발지인 $X$에서 $x$주변의 충분히 작은 근방 $U$가 존재하여 이 $U$가 $f$에 의해 $V$속으로 쏙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방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리 개념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필자의 예전 글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직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가 익숙한 거리를 이용해서 말해보자. $X$에서 두 점을 충분히 가깝게 잡기만 하면, 이 두 점이 $f$를 통해 $Y$로 이동했을 때 그 도착점들 사이의 거리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작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가 덮개를 생각할 때 이 함수 $f$는 $Y$의 모든 곳으로 빠짐없이 간다고 전제한다. 즉, $Y$전체를 덮는 상황이므로 $Y$의 모든 점이 $X$의 어떤 점으로부터 비롯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제 함수 $f$가 진정한 덮개가 되기 위해 가장 핵심적인 성질이 하나 남았다. 우선 $Y$의 어떤 부분집합 $B$가 있다고 해보자. 이때 $f^{-1}(B)$라는 것은 $X$의 점들 중 함수 $f$를 통해 $Y$로 이동하였을 때 그 목적지가 $B$안에 있는 모든 점들을 모아둔 집합이다. 이를 보통 $B$의 역상preimage이라고 부른다. $Y$의 임의의 한 점 $y$를 택했을 때, $y$주변의 어떤 근방 $V$가 존재하여, $X$에서의 역상, 즉 $f^{-1}(V)$가 $V$와 똑같이 생겼지만 서로는 만나지 않는 $X$의 부분공간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이 바로 $f$가 덮개라는 것의 엄밀한 정의이다. 다시 한 번 처음에 이야기한 목도리의 예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목도리를 목 주변에 둘둘 말았을 때, 포개어 겹쳐지는 점들을 하나의 점으로 보내는 함수 $f$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때 $X$가 목도리이고, $Y$는 목 주변을 한 번 두르는 원통이다. $Y$의 어떤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아주 작은 원반형 모양의 근방을 생각할 수 있다. 목도리 상에서는 여러 겹이 포개어 겹쳐져 있지만, 이 작은 근방에 한해서만 국소적으로 바라보면 원반형 모양의 천이 몇 개 켜켜이 쌓여서 $f$를 통해 하나의 원반으로 압축되는 것처럼 생긴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림 1).

 

Horizon의 예리한 독자라면 여기까지 읽고 벌써 눈치챘겠지만, 사실 현실의 목도리 비유에는 수학적으로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 실제 목도리에는 천이 끝나는 유한한 길이에 따른 “끝 점”이 있기 때문이다. 목도리의 끝 점 주변에서는 완전한 원반 모양의 근방이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덮개의 수학적 정의를 완벽히 만족하려면, 유한한 길이의 목도리가 아니라 양쪽으로 무한히 긴 목도리를 무한 번 둘둘 감아서 원통을 만드는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원통의 한 점 $y$에서 원반 모양의 작은 근방 $V$를 잡았을 때, 그것의 역상인 $f^{-1}(V)$는 $V$와 완벽히 똑같이 생겼지만 서로 만나지 않는 무한히 많은 원반들의 모임이 된다. 이때도 여전히 무한한 목도리의 위아래 경계선에 해당하는 점들은 없다고 상상해야 하며, 당연히 원통에서도 양 끝 경계선에 있는 점들은 무시하고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무한한 덮개의 과정은 최인혁 박사가 Horizon에 연재했던 웹툰에 아주 직관적이고 훌륭하게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이것은 기하학인가 아니면 위상수학인가 [4]: 곡면 말고 곡면 만들기> 편을 꼭 참조하시길 권한다.) 이처럼 덮개를 이용하여 공간을 탐구하는 방법이 매우 유용한 이유는 분명하다. 주어진 복잡한 공간의 구조를 곧바로 직접 파악하기 어려울 때, 이보다 훨씬 더 다루기 쉽고 단순한 형태의 덮개 공간으로 우회하여 올라간 뒤, 그 덮개 공간을 이용해서 어떻게 본래 주어진 공간을 접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지 그 레시피를 파악한다면, 역으로 원래의 복잡한 공간을 아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상상한 무한히 긴 띠 형태의 목도리와 같이, 더 이상 이보다 더 펼치고 단순화할 수 없는, 그 자체로 이미 최고로 단순한 궁극의 덮개를 위상수학에서는 보편 덮개universal cover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최고로 단순하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수학적 의미를 지니고, 대체 어떤 의미에서 보편성을 가지기에 보편 덮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었는지 조금 더 깊이 알아보자.

우선 공간의 위상적인 형태와 구멍의 존재 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핵심적인 도구 중에 기본 군fundamental group이라는 개념이 있다. 기본 군은 대수학에서 말하는 군group의 일종인데, Horizon에서도 필자의 오래된 글인 <거친 기하학>을 포함하여 많은 훌륭한 글들에서 군의 기본적인 내용을 이미 여러 번 다룬 바가 있다. 이 기본 군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바로 해당 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닫힌 곡선, 즉 고리loop들이다. 물론 공간 안의 모든 고리들이 각각 전부 다른 원소로 취급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고리를 공간 속에서 부드럽게 연속적으로 끌고 다니면서, 고리를 중간에 끊어 자르거나 다시 이어 붙이는 등의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 않고 변형하여 다른 고리의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면, 수학자들은 이 두 고리를 사실상 본질적으로 같은 원소로 취급한다. 이러한 연속적인 변형의 작업을 수학자들은 호모토피Homotopy라고 부른다. 참고로 이 변형 과정에서 각각의 고리는 3차원 공간의 끈과는 달리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통과하여 지나다닐 수 있다self-intersection. 원래 주어져 있던 고리가 꼬여있지 않더라도, 호모토피로 변형하는 과정에서 끈이 자기 자신을 통과하는 것은 위상수학적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허용된다.

또한 기본 군을 이야기할 때 각 고리는 어느 방향으로 도는 것인지 그 진행 방향이 항상 명확히 결정되어 있어야 한다. 모양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고리를 두고서라도,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처럼 두 가지 서로 다른 진행 방향을 고려할 수 있는데, 이 두 방향은 기본 군 내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독립적인 원소가 된다. 따라서 방향이 정해진 어떤 고리 $A$를 공간 속에서 부드럽게 끌고 가서 다른 고리 $B$로 모양을 포개었을 때, 이 둘이 기본 군의 원소로서 완벽히 같아지려면 $B$의 본래 방향이 $A$를 끌고 왔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방향과 일치해야만 한다.

이렇게 직관적으로만 이야기하고 끝내면 대중서로는 좋겠지만, 사실 아주 엄밀하게 기본 군의 수학적 구조를 정의하려면 공간 상의 특정한 기준점 $x$를 하나 정한 뒤, 모든 고리가 예외 없이 $x$에서 출발해서 다시 $x$로 돌아오는 고리라고 규칙을 정해야 한다. 그리고 호모토피를 통해 고리를 변형하는 과정 내내, 이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점 $x$는 절대 움직이지 않고 항상 고정되어 있어야만 한다. 왜 이렇게 귀찮은 제약을 두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단순히 고리들의 산발적인 집합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고리끼리 더하고 곱하는 대수적인 구조인 ‘군’을 만들어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군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원소를 결합하여 다시 새로운 하나의 원소를 만들어내는 ‘연산’이 반드시 정의되어야 한다.

기준점 $x$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두 고리 $A$와 $B$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x$에서 출발해서 먼저 고리 $A$를 따라 한 바퀴 돌고 다시 $x$로 돌아온 후, 연이어 고리 $B$를 따라 돌고 다시 $x$로 돌아오는 더 긴 고리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고리는 자기 자신을 언제든 통과할 수 있다고 했으므로,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경로는 $A$를 돌고 와서 $B$를 돌기 위해 최소한 기준점 $x$에서 자기 자신과 교차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두 고리 $A$와 $B$를 이어 붙여 만들어지는 새로운 고리이며, 이를 대수적으로 $A * B$라고 쓰겠다 (그림 2).

 

여기서 재미있고 놀라운 점은, 만약 고리 $A$를 기준점 $x$를 단단히 고정한 채로 공간상에서 부드럽게 끌고 가서 모양이 다른 $A’$이라는 고리로 변형하는 과정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 이어 붙인 전체 경로 $A * B$역시 공간 상에서 통째로 끌고 가서 $A’ * B$라는 경로로 언제나 무리 없이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전체 경로를 변형하는 중간 과정에서는 굳이 두 고리의 연결 부위가 $x$를 꼭 거쳐야 한다는 제약은 유지될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전체 경로가 맨 처음에 $x$에서 출발하고 맨 마지막에 $x$에서 끝난다는 큰 규칙만 엄격하게 유지하면 된다). 이러한 성질 덕분에 우리가 새롭게 정의한 이어 붙이기 연산 $*$는 기본 군 내에서 수학적인 모순 없이 아주 잘 정의된 연산이 된다.

군의 정의를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이 기본 군에는 기준이 되는 항등원이라는 원소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위상수학에서 항등원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준점 $x$그 점 자체에 가만히 머무르는 경로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기본 군의 원소 하나하나는 $x$에서 시작해서 $x$에서 끝을 맺는 하나의 여행 경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두 개의 경로가 공간 속에서 잘 겹쳐질 수 있으면 같은 경로로 취급하지만 말이다). 이 여행을 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게 하는 방법은, 출발점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그냥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이다. 즉 $x$에서 출발 선언을 하고 내내 $x$에만 가만히 머무른 뒤, “아! 여행 다 했다!”라고 외치며 끝내는 아주 짧고 자명한 “고리”가 바로 기본 군의 항등원이다. 이 항등원을 $e$라고 부르자. 그러면 임의의 어떤 고리 $A$에 대해서, $A$를 따라 돌고 나서 추가로 $e$를 따라 제자리에 머무는 여행은, 여행자의 실제 이동 경로 입장에서는 사실상 $A$를 따라서 도는 행동만 한 것과 완벽히 동일하다. 따라서 이 둘을 연산한 $A * e$는 결과적으로 $A$가 된다. 반대로 가만히 있다가 $A$를 도는 $e * A$역시 결과적으로 $A$가 되는데, 이것이 정확히 대수학에서 말하는 항등원의 본질적인 정의와 일치한다.

또한 군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원소에 대해서 그것을 상쇄시킬 수 있는 역원이 존재해야 한다. 어떤 고리 $A$가 $x$에서 시작해서 $x$로 돌아오는 하나의 여행 경로라고 하였을 때, 만약 정확히 똑같은 경로를 거꾸로, 즉 반대 방향으로 되감기 하듯 도는 여행을 고려하면 그것이 바로 원소 $A$의 역원이 된다. 앞서 모든 고리에는 항상 시계/반시계와 같은 두 가지 종류의 방향이 존재한다고 했었는데, 같은 궤적을 가지면서 서로 반대되는 방향이 주어진 두 원소가 서로의 역원이 되는 것이다. 거꾸로 도는 이 경로를 편의상 $A^{-1}$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A$를 돌고 이어서 $A^{-1}$를 도는 이어 붙인 경로 $A * A^{-1}$가, 어째서 $x$에서 아무 데도 가지 않는 항등원 $e$와 호모토피를 통해 본질적으로 같아지는지 직관적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A * A^{-1}$라는 것은 $A$를 따라서 끝까지 쭉 돌고 도착한 다음, 다시 $A$를 반대 방향으로 되짚어 돌아서 원점 $x$로 돌아오는 긴 왕복 경로이다. 그런데 처음에 $A$를 따라 돌 때 끝까지 가지 말고, 목적지를 단 한 걸음 남겨둔 상태에서 멈춘 뒤 곧바로 되돌아온다고 상상해 보자. 즉 마지막 한 걸음 정도의 궤적을 쿨하게 생략하는 것이다. 아까 전에 $A$를 $A’$로 공간상에서 부드럽게 옮길 수 있을 때, $A * B$도 $A’ * B$로 무리 없이 옮길 수 있다는 성질을 이야기했었다. 이때 괄호 안에 적어두었던 중요한 단서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보자.

이때 전체 경로를 변형하는 중간 과정에서는 굳이 두 고리의 연결 부위가 $x$를 꼭 거쳐야 한다는 제약은 유지될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전체 경로가 맨 처음에 $x$에서 출발하고 맨 마지막에 $x$에서 끝난다는 큰 규칙만 엄격하게 유지하면 된다.

결국 $x$에서 시작하고 $x$에서 끝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지, 왕복하는 중간 반환점이나 연결 부위가 반드시 $x$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간 지점을 조금씩 뒤로 물리면서 공간상에서 변형하는 작업은 우리가 호모토피로서 정당하게 허용하는 일이다. 즉, 원래의 $A * A^{-1}$왕복 경로와, $A$를 따라 돌 때 끝까지 가지 않고 한 걸음 덜 간 상태에서 멈추고 다시 되돌아오는 짧아진 경로는 호모토피 상에서 완벽히 같은 경로이며, 이는 기본 군에서 완전히 같은 원소가 됨을 의미한다. 이 되돌아오기 생략 작업을 계속해서 반복할 수 있다. 두 걸음 남겨 놓고 돌아오고, 세 걸음 남겨놓고 돌아오고… 이렇게 경로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다 보면, 결국 $x$에서 아예 한 발자국도 출발하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경로 $e$로 “연속적”으로 찌그러뜨려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A * A^{-1}$와 항등원 $e$가 기본 군에서 동일한 원소가 되는 기하학적인 이유이다.

이제 이 개념을 평면에 적용해 보자. 유클리드 평면에서 원점 $(0,0)$을 기준점 $x$라고 하고, 점 $(t, 0)$을 중심으로 하며 반지름이 $t$인 원을 따라 $x$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다시 $x$로 돌아오는 경로를 $C_t$라고 부르자. 수학적으로 아주 엄밀하게 따지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상상해 볼 때, 공간상에서 고리 $C_t$를 아주 조금씩 좁혀서 반지름이 약간 작은 $C_{t-0.1}$같은 고리로 부드럽게 옮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이 $C_t$가 둘러싸고 있는 원반 모양의 2차원 평면 내에는 이렇게 고리의 반지름을 점진적으로 줄여가는 것을 턱 막아설 방해물이나 구멍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C_t$를 다시 조금 더 작은 고리로 옮기고, 그것을 또다시 더 작은 고리로 옮기고 하는 수축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 마지막에는 반지름이 0이 되는 고리, 즉 $C_0$까지 완벽하게 줄여서 옮길 수 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반지름이 0인 원 $C_0$가 바로 기준점 $x$에서 시작해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계속 $x$에만 머무르는 경로이니, 이것이 곧 이 평면 공간의 기본 군의 항등원 $e$가 된다.

이 논리를 조금 더 엄밀하게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면, 아무런 구멍이 없는 무한한 2차원 평면의 기본 군에 속하는 그 어떠한 복잡한 궤적의 원소라 할지라도, 똑같이 생겼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 폭이 좁아지는 더 작은 경로를 따라 연속적으로 변형하여 결국 마지막에는 한 점에 머무르는 항등원 $e$로 수축시켜 보낼 수 있다. 즉, 구멍 없는 유클리드 평면의 기본 군 안에는 오직 항등원 $e$단 하나 말고는 다른 독립적인 원소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공간 내의 모든 고리를 한 점으로 수축시킬 수 있어서 기본 군에 항등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공간을 단순연결공간simply connected space이라고 부른다. 위상수학의 렌즈, 특히 기본 군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 단순연결공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구조의 공간인 셈이다.

아무리 내부가 복잡하게 꼬인 공간이더라도, 닫힌 고리와 같은 1차원 탐색 물건을 그 공간 안에 던져 넣어놓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수축시키면서 공간의 생김새를 탐색하자는 것이 바로 기본 군을 통해 공간을 공부하고자 하는 핵심 아이디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고리를 가지고 아무리 이리저리 끌고 다녀봤자 아무런 장애물을 발견할 수 없고 모두 한 점으로 수축되어버려 특별한 정보를 얻어낼 수 없는 투명하고 단순한 공간이 바로 단순연결공간이다.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텅 빈 평면은 완벽한 단순연결공간이다. 앞서 덮개를 설명할 때 등장했던 경계선을 무시한 무한히 긴 띠 모양의 목도리를 다시 잘 생각해보면, 이는 기하학적으로 유클리드 평면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이 무한한 목도리 역시 기본 군이 없는 단순연결공간이 된다. 이처럼 덮개 역할을 하는 공간 자체가 단순연결공간일 때, 우리는 그 덮개를 일컬어 마침내 ‘보편 덮개’라고 부른다.

반면 아무것도 없는 평면과, 중간에 구멍이 하나 뻥 뚫려있는 평면은 오직 이러한 기본 군의 아이디어만 가지고도 너무나 쉽게 구분이 가능하다 (그림 3). 파란색으로 칠해진 고리처럼 구멍을 포함하지 않는 평면 상의 여느 고리는 방해물이 없으므로 문제없이 항등원 한 점으로 잘 수축시켜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구멍을 감싸고 도는 빨간색 고리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이 고리를 조금씩 조금씩 수축시켜서 기준점 한 점으로 보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중간에 비어있는 구멍의 경계선에 팽팽하게 걸려버리기 때문에 더 이상 줄이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처럼 평면 어딘가에 구멍이 하나라도 뚫려있다면, 그 구멍을 감싸는 고리는 절대 항등원으로 변형될 수 없으므로 기본 군 안에는 항등원이 아닌 독립적인 원소가 반드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본 군은 어떤 공간에 구멍이 몇 개나 있는지 등 공간의 거시적인 위상수학적 구조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실제로는 공간의 형태에 따라 기본 군의 구조가 대수적으로 상당히 복잡해질 수 있고, 특히 2차원 곡면이나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에 대해서는 그 공간의 뼈대와 구조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는 수학적으로 너무 복잡해질 수 있어 그 이유를 모두 자세하게 증명하지는 않겠지만, ‘보편 덮개’라는 웅장한 이름에 등장하는 ‘보편성universality‘의 참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만약 $X$가 우리가 관심 있는 공간 $Y$의 덮개라면, 놀랍게도 $Y$의 보편 덮개는 그 중간 단계인 $X$마저도 다시 덮어버린다. 즉, 해당 공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수많은 덮개들을 빠짐없이 자신의 덮개로 포용하는, 덮개들의 왕이 바로 보편 덮개이다. (물론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애초에 병적인 위상 구조를 가져서 보편 덮개 자체를 아예 가지지 못하는 이상한 위상 공간도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연구하는 대부분의 건전한 공간들은 훌륭하게 보편 덮개를 가지고 있다.) 일단 어떤 공간이 보편 덮개를 가지기만 하면, 그 어떤 다른 변형된 덮개를 가지고 와도 무조건 보편 덮개에 의해서 위에서 아래로 예쁘게 덮어지게 된다. 즉, 보편 덮개는 위상수학적으로 가장 쫙 펴진 단순한 공간이면서, 동시에 모든 덮개들을 지배하는 궁극의 덮개인 셈이다.

앞서 유클리드 평면에서 고리를 수축하던 상황으로 돌아가 구멍이 뚫린 공간의 성질을 다시 한 번 명확히 복습해 보자. 원점 $(0,0)$을 출발점 $x$로 하고, $(t, 0)$을 중심으로 하는 반지름 $t$인 원 경로 $C_t$를 고려하던 상황 말이다. 만약에 이 평면에서 점 $(0.5, 0)$단 하나를 핀셋으로 제거해서 아주 미세한 구멍을 하나 뚫어버렸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할까? 큰 궤적의 $C_t$를 공간상에서 조금 움직여서 조금 더 작은 $C_{t-0.1}$로 옮기고, 그것을 다시 $C_{t-0.2}$로 수축시키는 초기 작업은 여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수축을 계속 진행하다가 고리가 점 $(0.5, 0)$을 통과해야만 하는 시점이 오면, 그 점은 이 공간상에 이미 존재하지 않고 텅 비어있기 때문에 고리는 이 구멍에 걸려 더 이상 수축되지 못하고 여기서 턱 막히게 된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고리 $C_t$를 항등원 $e$로 수축시켜 보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따라서 $C_t$는 기본 군 안에서 $e$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원소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마치 보이지 않는 방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듯 공간 내에서 고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걸리는 곳이 없는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알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본 군이 공간의 숨겨진 구조를 들여다보는 강력한 방법이다.

이러한 기본 군의 놀라운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했던 위대한 수학자 앙리 푸앙카레Henri Poincaré는, 공간의 경계가 없이 유한한 크기를 가지는 닫힌 3차원 공간의 기본 군이 원소를 단 하나(항등원)만 가질 때, 즉 주어진 닫힌 3차원 공간이 고리가 모두 수축하는 단순연결공간일 때, 과연 이 공간은 우리가 아는 가장 완벽한 형태인 ‘3차원 구Sphere‘가 되어야만 하는 지를 물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수학계의 난제, ‘푸앙카레의 추측Poincaré Conjecture‘이다. 하지만 이 추측을 증명하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너무도 어려웠다. 훗날 역사상 가장 뛰어난 기하학자 중 한 명인 윌리엄 서스턴William Thurston이 제안한 기하화 추측Geometrization conjecture 덕분에 3차원 기하 공간 전체를 분류할 수 있다는 거대한 비전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푸앙카레 추측 자체는 100년이 넘도록 여전히 미해결로 굳건히 남아있었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보광 교수님의 훌륭한 글 <기하학의 꿈, 3차원 기하 위상 수학> 편을 꼭 참조해 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마침내 세기의 은둔 수학자 그레고리 페렐만Grigori Perelman이 리치 흐름Ricci flow이라는 아주 정교한 미분기하학적 도구를 활용하여 이 지난한 추측을 완벽하게 해결해 내었고, 이는 수학계가 지정한 7개의 밀레니엄 난제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인류가 정복한 난제가 되었다.


그만큼 기본 군이라는 것은 공간에 고리를 던져 넣어본다는, 정의하기도 쉽고 매우 간단해 보이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지만, 공간의 본질에 대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당히 강력한 직관과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 정보가 품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해석하고 증명해 내는 것은 페렐만의 예에서 보듯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3차원을 넘어 4차원 공간으로 넘어가면 고리가 자유롭게 피해 다닐 여유 공간이 너무 많아져서 수많은 기괴한 형태의 단순연결공간들이 존재하게 되며, 이것들을 분류하는 문제는 여전히 현대 수학자들에게 상당한 도전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가 덮개 이론과 기본 군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위상수학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서는 Horizon에 이미 좋은 글들이 많이 쌓여 있는데, 특히 김동률 박사의 <3차원 쌍곡 공간의 강직성: 유한 부피에서 무한 부피까지 [1]>를 이 글과 함께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원고를 쓰며 시카고의 혹독한 겨울과 겹겹이 두른 목도리를 떠올렸지만, 어느새 한국은 벌써 벚꽃도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고, 이제 더 이상 무거운 보편 덮개들로 몸을 두껍게 덮을 필요가 없을 만큼 따뜻한 봄 날씨가 찾아왔다. 꽁꽁 얼었던 겨울이 가고 생명력 넘치는 봄이 오듯, 덮개 이론 너머에 숨겨진 또 다른 흥미진진한 저차원 위상수학의 기묘한 이야기들로 독자들을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백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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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수리과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