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게으른 사람이라 평소에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소설책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지금까지 읽은 SF책이 그리 많지 않다. 과학자들이 ‘SF와 나’라는 주제로 글을 쓰면 흔히 어릴 때 어떤 작품에 영감을 받아 과학자가 되려고 했고 지금도 그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클리셰를 기대하게 되는데, 적어도 내게는 그런 아름다운 스토리가 없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초등학교 때 <우주전쟁>을 읽고 너무 충격받아서 혹시나 화성인들이 갑자기 지구에 쳐들어오면 어떡하나, 며칠을 걱정했던 적이 있는 정도다.


    고등학교 때는 문학써클에 가입해 매주 독서토론도 했었는데 주로 단편 순수문학 위주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전공서적과 사회과학 서적을 보느라 소설책은 거의 읽을 기회가 없었다. 대학원에 가서야 조금 편한 마음으로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다. 그때는 장르를 불문하고 재미있는 책 위주로 읽었다. 소설이든 비소설이든 역사서든 에세이든 SF든 일단 재미가 있어야 손이 움직였다. 여기서 재미라는 게 텍스트가 제공하는 말초적인 재미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뜻하지 않게 유익한 정보를 얻는다든지 어느 술자리에 가서 사람들에게 신나게 떠들 수 있는 얘깃거리를 챙기는 것도 독서의 재미 중 하나다. 내 독서습관이 이렇다보니 SF를 보는 기준도 장르적인 충실성보다 일단 얼마나 재미가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일부러 SF를 더 많이 챙겨보지는 않게 되었다.


    남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SF 작품도 내 취향에는 잘 맞지 않기도 했다. 특히 소재주의에 빠진 작품은 어느 장르이든 상관없이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삼체>를 읽으면서 좋았던 점은 ‘공상과학’적인 요소였다기보다 문화대혁명기 중국 인민들의 모습, 그것이 이후 중국사회에 남긴 흔적들을 단면이나마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점이었다. SF로 분류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실 나는 이런 구분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천사와 악마>에서 반물질을 소재로 활용하는 방식이나 이를 매개로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조망하는 접근법도 나는 좋아한다. 각 요소들이 따로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스토리 속에서 각자가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스토리 자체의 완성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신박한 아이템이 등장하더라도 시큰둥해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스토리의 완성도는 낮은데 소재만 신박하면 그게 오히려 어색함을 배가시켜 책 읽는 재미가 떨어진다.


    내 취향이 이렇다보니 실제로 SF 콘텐츠를 생산하는 분들에게 주제넘게 이런 내용을 설파(?)하기도 했었다. SF 작가 또는 영화 제작자 대상으로 몇 차례 강연을 하는 자리에서였다. 주최측에서 나를 부른 이유는 현대물리학의 성과와 그 내용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이게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 것들이 꽤 있다.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인 운동 상태에 따라 다이내믹하게 변한다.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 간격이 길어져 결과적으로 시간이 느려지고, 딱 그 정도만큼 진행방향으로 길이도 짧아진다. 이몽룡이 우주선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우주여행을 떠나면 지구에 남은 성춘향이 봤을 때 자신의 시간과 이몽룡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더욱 기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무거운 천체가 있으면 주변의 시공간이 휘어진다. 블랙홀이라는 보다 극단적인 천체는 한 번 건너가면 빛조차 빠져 나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이라 불리는 경계면을 갖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는 시공간의 곡률이 무한대가 되는 특이점이 있다. 블랙홀은 그 존재 자체가 SF적이다. 블랙홀을 주요 소재로 활용한 영화 <인터스텔라>가 SF영화라고는 하지만 거기 등장하는 블랙홀은 픽션보다 과학에 훨씬 더 가깝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훨씬 더 신묘하다. 양자중첩과 관측에 의한 파동함수의 붕괴, 확률론적 해석은 슈뢰딩거 고양이라는 사고실험과 함께 그 자체로 하나의 흥미진진한 스토리이다. 정통 코펜하겐 해석을 넘어 예컨대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을 받아들이면 파동함수의 붕괴라는 개념이 필요 없고 대신 가능한 여러 세계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는 수많은 평행우주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설에 대한 양자역학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 영화 <소스코드>에서 계속 반복되는 수많은 비슷한 상황은 에버렛의 다세계와 비슷하다. 90년대 국내 TV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인생극장>에서도 주인공이 양자택일의 순간에서 “그래, 결심했어!”라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인생이 독립적으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역시 다세계 해석의 모티브가 극적으로 구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내용들은 전공자가 아니면 어디까지가 과학적으로 검증된 내용이고 어디까지가 가설인지, 또 어디까지가 작가적 상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이라 콘텐츠 제작자들이 현대과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뭔가를 만들려고 한다면 사실 어떻게든 이 둘을 피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내용들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초등학생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예컨대 법정물을 만들면서 ‘미필적 고의’라는 말을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하리라 기대하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슈뢰딩거 고양이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 한국사회에서, 미필적 고의를 남발하는 법조인이나 기자들에게 똑같은 요구를 하는 경우를 난 본 적이 없다. 의학드라마는 어떤가? 최근 종영한 <낭만닥터 김사부 시즌3>에서는 어려운 의학용어가 나오면 자막으로 ‘친절하게 3초’ 정도 보여준다. 그 용어가 무슨 뜻인지 다 읽기도 전에 자막에는 새로운 용어가 뜬다. 한국 초등학생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걸 다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이런 예들을 들면서 유독 과학에만 지나치게 ‘쉬움’을 요구하는 관행이 부당하니 작가들도 그런 부당한 요구에 너무 민감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는 소재주의와도 연결된다. 소재주의에 빠지면 신박한 아이템을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낭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강연을 할 때마다 너무 과학적인 팩트에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하곤 했다. 어차피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이고 과학기술적인 사실들이나 관련 아이템들은 그 스토리라인을 위한 장식물에 불과하다는 게 내 지론이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럴 듯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지 과학적 팩트에 관한 작가의 지식은 아니니까.


    굳이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 “상상력이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사실 상상력은 과학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이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인간 인식의 경계선에서는 과학자들의 상상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경계에서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정말로 SF적인 상상력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서 과학과 픽션, 과학과 철학의 경계가 다소 모호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1998년과 99년에 덧차원(extra dimension)을 주제로 한 논문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공간 말고도 새로운 차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덧차원의 존재 자체가 새롭지는 않았다. 예컨대 끈이론에서는 3차원 공간보다 훨씬 더 많은 차원을 요구한다. 98, 99년의 논문이 새로웠던 것은 덧차원을 도입하면 우리 우주에서 왜 중력이 다른 근본적인 힘들보다 그렇게 약한지를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력은 전자기력에 비해 10^40 이상으로 크기가 작다. 자연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힘들 사이에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과학자들이 편한 마음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만약 덧차원이 있으면 덧차원을 포함한 전체 시공간에서 중력이 그리 약하지 않으며, 덧차원의 효과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4차원 시공간(3차원 공간+1차원 시간)에서 중력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이들 논문은 당시에 말 그대로 학계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덧차원 논문이 등장했을 때 나는 당시 박사과정 학생이었는데, 최신 논문을 함께 공부하던 연구실 모임에서 다들, 세기말에는 이제 SF가 과학논문이 되는 시대인가 라고 감탄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훌륭한 과학논문을 쓰고 근사한 과학이론을 만드는 과정은 훌륭한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아주 세부적인 요소들에 대한 지식보다 그것들을 엮어서 하나의 구조를 만드는 창의력, 나는 그것이 작가나 과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라 생각한다. 한국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대목도 바로 이런 창의력이다. 한국 학생들이 계산도 잘하고 논문도 곧잘 쓰지만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새로운 구조를 구축하는 일을 어려워한다. 예전보다야 지금은 많이 좋아지긴 했어도, 우리가 여전히 노벨과학상을 받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대중강연을 할 때면 가끔 어린 학생들에게 어떤 과학책을 읽히는 게 좋겠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어린 학생들에게 괜히 어려운 과학책을 읽히기보다 차라리 해리포터 시리즈를 권하라고 추천한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마법사와 마법학교를 그렇게 정교하게 구축하는 상상력이라면 그 어떤 과학책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이다. 한동안은 그렇게 나만의 ‘모범답안’을 설파하고 다니면서 건방지게도 스스로 대견하게 여겼었다. 그러다 겨우 몇 년 전에서야 나는 나의 어리석음을 크게 깨달았다. 내가 직접 SF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소설은 장르가 무엇이든 간에 글 쓰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로망이 아닐까 싶다. 나도 그때까지 교양 과학책을 열 권 가까이 썼고 번역서도 여럿 냈지만 소설은 남달랐다. SF 소설을 쓰는 일이 갑자기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한때 그렇게 SF 작가분들과 워크숍도 하고 강연도 하면서 어울리는 와중에 어느 편집자가 과학이나 공학 전공자들이 짧은 작품을 하나씩 써서 단편집을 내보자고 제안했었다. 그 결과 한때는 팀이 구성되기도 했었고 기획 회의를 한 번인가 열기도 했었다. 그러다 한동안은 지지부진했었는데 새로 기획자와 편집자가 참여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단편집을 준비하던 중에 한 편집자는 내게 단편 하나에만 얽매이지 말고 쓰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분량에 상관없이 이것저것 써 보라고 권했다. 그때 나는 몇 년 전 단편집 팀이 꾸려진 이후 구상했던 몇몇 소재를 갖고 있어서 하나의 단편과 하나의 장편을 써 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온 단편집이 <떨리는 손>이었다. 4명의 과학 전공자와 1명의 SF 작가가 참여했다. 내가 쓴 작품의 이름은 <동방홍 원정기>였다.  소설의 주인공이 고등과학원에 재직 중인 연구원으로 설정돼 있어서, 고등과학원 동문으로서 고등과학원의 웹진에 <동방홍 원정기>를 소개하려니 감회가 새롭다.  

    <동방홍 원정기>는 그래도 단편이라 원고작업이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장편은 달랐다. 막상 원고를 써 보니까, 작가들이 말하는 창작의 고통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내가 작가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 왜 작가분들이 예전에 내게 그런 저런 질문들을 했는지가 확 와 닿았다. 아무리 소재주의를 배격하고 과학기술적 아이템을 전체 스토리를 위한 필수 도구로만 사용하려고 해도, 이야기를 풀어 나가다 보면 그놈의 아이템들에 어느 정도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꼭 소재주의에 자연스럽게 경도되기 때문이라기보다, 자연스럽고 완성도 높은 스토리 라인을 구축하기 위해서 조차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내가 쓰는 도구들을 세세하게 잘 알아야 그 도구를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 갖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 경우는 나의 전공과 관련된 아이템들이 많은 데다 어차피 나도 이공계에서 굴러먹은 사람이라 다른 전문작가들 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이었음에도 그 도구들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자기 있을 곳에 적절하게 갖다 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내가 예전에 강연하면서 작가들에게 내뱉은 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가벼웠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다른 분야를 정말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시나 거기에 한 번은 풍덩 빠져봐야 하는 것임을.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글을 쓰면서 독자들의 반응 등이 잘 예상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교양 과학책은 그때까지 내가 몇 권을 써 봤기 때문에 이런 내용을 이런 수준으로 이런 분량으로 이런 톤으로 쓰면 대략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다 라는 견적이 어느 정도 나왔었다. SF 소설은 달랐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을 걷는 것만 같았다. 편집자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예측 불가였다. 출판사도 몇 번 바뀌었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는데 그냥 출간도 되지 못하고 원고가 내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컸다.


    그렇게 나온 내 첫 장편 소설이 <빛의 전쟁>이었다. 책을 읽을 때의 기준도 일단은 재미였기 때문에 소설을 쓸 때의 기준도 일단 재미였다. 내가 사실 전문 작가도 아니고 무슨 문학성이 높은 글을 쓸 욕심도 전혀 없었다. B급 흥미 위주의 감성으로 그저 재미있게 사람들이 읽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혹시 라도 이걸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그게 최상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었다. 말하자면 <마션>이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롤 모델이었던 셈이다. 글을 쓰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런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그 속에서는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는지 되돌아보기도 했었다. 불행히도 고생하고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흥행 성적은 처참했다. 영화 제작 관련 문의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문의는 문의로만 끝났다. 돌이켜보면 내가 작가들에게 강연하면서 이런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다고 말했던 것들이 온전히 내 소설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SF 소설을 써 본 것은 내게 큰 경험으로 남았다. SF소설을 나보다 더 읽은 사람은 굉장히 많겠지만, 그중에서 직접 SF소설을 써서 출판한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처음 책이 인쇄돼 나왔을 때, 담당 편집자가 출판사에서 내게 한 권을 내밀면서 첫 장편소설 출간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게 2020년 6월이었다. 그때면 내가 혼자 쓴 책이 10권 가까이 되던 때라 새로 책이 하나 더 나오는 것에 달리 큰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빛의 전쟁>은 달랐다. 책 제목 밑에 조그만 글씨로 ‘이종필 장편소설’이라는 일곱 글자가 가슴에 박혔다. 아…… 내가 이제 정말로 작가가 되는 거구나. 너무 기뻤다.


    <빛의 전쟁>에서는 과학기술이 한국에서 소비되는 방식을 내 나름대로 풀어내려고 했으나 그리 성공하진 못한 것 같다. 또한 나는 과학기술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동방홍 원정기>나 <빛의 전쟁> 모두 이런 구도를 갖고 있다. 요즘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면서 K-콘텐츠 에 관한 관심도 폭발적이다. 하나 아쉬운 점은 그 속에 우리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는 많지만 미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한국에서 과학의 저변이 아직도 그리 넓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승리호>나 <고요의 바다>, <정이> 등 SF 장르물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지만 아쉬운 점들이 많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시도들이 쌓이다보면 더 많은 미래 이야기들이 쏟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보게 된다.


    이런 상황은 <스타워즈>의 나라 미국과는 정반대인 것 같다. 우리에게 과거와 현재의 이야깃거리가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의 선조들 또한 치열하게 역사를 살아온 덕분일 것인데, 역사가 짧은 미국에는 없는 자산이다. 헐리웃은 이제 소재가 고갈된 탓인지 남의 나라 신화들까지 기웃거리는 것도 그들이 가진 자산의 한계로 보인다. 그 틈을 메우며 새로운 고전으로 구축한 것이 예컨대 스페이스 오페라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계속 미래 이야기에 많이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일종의 강박관념이 <동방홍 원정기>와 <빛의 전쟁>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두 작품의 후속편도 쓰고 싶다. 소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구상도 나름 있긴 한데, 생업도 생업이지만 막상 판매실적이 저조하다보니 글을 쓸 동력이 생기지 않았다. 편집자는 내게 최소 3편으로 트릴로지는 완성해야 온전한 평가가 나온다는 격려와 채찍의 말을 전해주기도 했었다. 돌이켜보면 창작의 과정이 참 고통스럽기는 해도, 그게 또 다른 방식으로 SF를 즐기는 법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연재기사

[SF와 나 (1)] 어느 과학자가 SF를 쓰는 이유
[SF와 나 (2)] 20세기 중반 SF 소설에 그려진 인공지능
[SF와 나 (3)] 삼체와 나
[SF와 나 (5)] 나는 어쩌다 SF를 읽게 되었고, 앞으로도 읽게 될 것인가?

이종필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