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와 관련된 글을 쓰거나 관련 행사에 불려가다 보면 간혹 듣는 질문이 있다.
 “왜 SF인가?”

  이 시대에 왜 SF를 읽어야 하는지, SF를 읽어서 얻는 게 무엇이 있는지를 묻는 소리다. 충분히 나올 법한 질문이기는 한데, 내가 딱히 좋아하는 질문은 아니다. 질문자가 원했을 법한 답은 대충 예상이 된다.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다거나 과학기술이 가져올 미래 가능성을 탐구한다거나 기술 사회에서 소외되는 인간성을 되돌아본다거나 등등.

  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런 대답을 하고 싶지 않다. 약간 삐딱한 면이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질문은 마치 SF를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 같아서 싫다. 마치 어린이들의 과학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장래에 훌륭한 과학자를 양성하는 수단으로 SF를 봤던 과거가(아니면, 설마 지금까지도?) 떠올라 좋지 않다.

  그래서 나는 그런 질문을 들으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SF가 아니어도 되는데요?”

  왜 SF인가? SF여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SF를 쓰거나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딱히 없다. 우리가 SF를 안 읽는다고 해서 사는 데 지장이 생기는 건 아니다. SF가 없어도 과학은 발전했을 것이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SF를 보며 과학자가 되는 꿈을 키웠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SF가 없다고 해서 세상에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그냥 SF가 없는 세상이겠지.

  그러면 왜 SF를 읽는가?
  답은 뻔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장르건 다를 게 없다. 판타지든 추리든 로맨스든 성격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자 나름의 재미가 있다. 재미가 없으면 누가 보겠는가?

  이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왜 SF가 재미있는가?”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SF만은 아니다. 판타지나 추리도 재미있고, 축구나 농구도 재미있고, 낚시나 바둑도 재미있다. 세상에 즐길 거리가 무수히 많은 가운데 SF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건 SF에 다른 데는 없는 재미가 있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일까?

  수많은 SF 독자를 모두 대변할 수는 없으니 일반화 시도는 접어두고 일단 내가 SF에 빠져들게 된 과정을 돌이켜보자.
  내가 처음으로 SF에서 느꼈던 재미는 ‘온 세상이 뒤집어지는 충격’이었다. 초등학교 1, 2학년이었을 때다. 어디서 손에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단편이었다. 그때는 그게 SF라고 의식하고 읽었던 것도 아니다. 그때 그 느낌을 설명하려면 그 단편의 중요한 반전을 누설해야 하니 양해 부탁드린다.

  배경은 외계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래의 지구다. 주인공 스펜서 올햄은 어느 날 갑자기 외계인의 첩자 로봇이라는 누명을 쓰고 붙잡혀 가는 몸이 된다. 몸에 매우 강력한 폭탄을 내장하고 있으며 암호를 입력하면 그 폭탄이 터지게 된다는 것이다. 뻔히 자신을 알고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주인공은 기지를 발휘해 탈출한 뒤 외계 우주선이 불시착했다는 곳으로 찾아간다. 불시착으로 죽은 외계 로봇의 잔해를 보여주면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요량에서였다. 결국 목적을 달성한 주인공.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누군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외계 로봇의 잔해를 자세히 보니 그건 로봇이 아니고 외계인의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주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만약 저게 올햄이라면, 나는…”이라고 읊조리는데, 바로 그게 폭탄을 터뜨리는 암호였다.

  이 이야기를 처음 읽고 느꼈던 충격과 혼란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내가 아닐 수 있다고? 가짜이면서도 진짜라고 생각할 수 있다고? 일고여덟 살짜리 인생에 이렇게 기이하고 어지러운 생각은 처음이었다.
  당시에는 작가도 제목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느낌만은 오랫동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작가의 이름이 필립 딕이고, 제목이 사기꾼 로봇imposter이라는 사실은 이후에 우연히 신문에서 소개한 내용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에 내가 읽었던 판본은 추정컨대 아이디어회관SF 시리즈 중 한 권에 ‘우주 스파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던 것이다.

  충격은 컸지만, 그게 내가 SF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SF를 인식하고 찾아서 읽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들어서였고, 그 계기는 바로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SF작가로 꼽고 있는 아서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였다.

  당시에 나는 여유가 있으면 근처 구립도서관에서 소설책을 빌려 읽곤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한가하게 서가를 돌아다니며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스타워즈처럼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험 활극인 줄 알았다. 나는 탐험과 모험 이야기도 매우 좋아했으므로 별생각 없이 그 책을 빌렸다.

  그리고 돌아오는 마을버스 안에서 펼쳐 들고 앞부분만 잠시 펼쳐보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도저히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차 안에서 글자를 읽으면 금세 멀미하는 체질이었는데도 말이다. 집에 도착해서 남은 부분까지 그대로 읽고 난 나는 한동안 그 여운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여기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이게 두 번째 충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어 이 세상과 이 우주를 이렇게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게 대단하고 놀라웠다.

  그제야 나는 SF라는 장르를 제대로 인식했고, 그 장르 안에 이와 같은 소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SF를 찾아서 읽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PC 통신 동호회에 가입해 정보도 교환하고, 헌책방을 뒤지며 절판된 SF 소설을 찾아다녔다. 그러니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든 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아마 SF를 직접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번역출간되는 작품이 그렇게 많지 않아 조금만 신경 쓰면 나오는 책을 모두 찾아 읽을 수 있었다. 나처럼 그것으로 충분하지 못해 갈증을 느끼던 사람 중 일부는 “내가 번역하겠다”며 원서를 직접 번역해 읽거나 “내가 스스로 쓰겠다”며 창작을 하기 시작해 전문 번역가나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개인적인 환경 덕도 있었다. 카투사로 군 복무를 시작한 나는 훈련소를 나와 카투사 훈련소에서 추가로 훈련을 받았다. 훈련 과정 중에는 영어 교육이 있었고, 나이가 지긋한 미국인이 강사로 있었다. 수업 시간에 각자 좋아하는 작가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당연히 아서 클라크 이야기를 했다. 놀랍게도, 그 강사분 역시 자신도 아서 클라크를 좋아한다며 수업이 끝난 뒤 따로 내게 말을 거는 게 아닌가!

  그분은 내게 ‘신의 망치’라는 클라크의 소설을 한 권 선물해 주었다. 국내에 번역된 적 없는 나름 최신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서를 제대로 읽어본 적 없었던 나는 군 생활을 하면서 그 책을 틈틈이 읽어보려다 너무 답답해서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심한 게 번역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해 놓은 뒤에 편하게 읽으면 되겠다는 다소 이상한 생각이었다. 일과 이후에는 시간이 자유로웠던 카투사 특성상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사전을 찾으며, 정 모르는 게 나오면 주변 미군들에게 물어보며 조금씩 번역을 해나갔다. 그 원고는 거의 20년 동안 내 컴퓨터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몇 년 전에 책으로 나와 세상의 빛을 보았다.

  미군 부대에서 근무하니 미군 도서관도 이용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말로만 듣던 고전 SF소설을 종종 찾을 수 있었다. SF를 소개하는 책에서만 보던 유명 작가의 작품을 담은 책을 마침내 읽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허름한 SF 페이퍼백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SF에 집착했던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언제나 꾸준히 SF를 읽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도 사람이다 보니 몇 차례의 부침은 있었던 것 같다. 다소 지겨워지거나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읽기를 게을리하던 시기가 있었다. 우습게도, 그런 시기를 극복하고 계속 SF를 찾아서 읽게 해준 건 역시 좋은 SF였다.

  그런 사례로 기억 나는 작품 중 하나가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다. 대학교 졸업을 한 해 앞둔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 호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때 나는 왠지 SF 읽기에 다소 심드렁했다. 10년 가까이 손에 넣는 족족 읽다 보니 권태기에 빠졌던 것 같다.

  그래도 책을 모아야 한다는 집착은 여전해서 배낭여행을 다니면서도 새로운 지역을 갈 때마다 반드시 서점이나 헌책방을 찾았다. 영어권 국가에 왔으니 SF를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어느 서점에서 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낡은 페이퍼백이니까 헌책방이었을 것이다. 한 망고 농장에서 머물며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던 나는 밤이 되면 전기가 안 들어오는 캐러밴에서 가스등에 의지해 그 책을 읽었다.

  내가 평소에 읽던 SF와는 다른 서정적인 작품이었다. 문명이 몰락하고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복제 기술로 인구를 늘리며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배경이다. 우주에 관한 인식을 뒤집는 충격을 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 복제라는 소재가 쓰이지만, 과학적으로 엄밀하지는 않다. 그렇게 보면 꼭 SF로 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지만, 과학기술로 인한 새로운 인간 관계와 사회의 구조에 관한 고찰이 있으니 훌륭한 SF는 맞다.
  사그라져가던 불씨에 다시 불이 붙은 나는 두 달 동안 여행하면서 눈에 띄는 대로 책을 샀다. 돌아가는 비행기에 실을 짐이 너무 많아져서 곤란했지만.

  그 뒤로도 약간의 오르내림은 언제나 있었지만, 살아오는 동안 언제나 SF를 손에서 놓은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많은 SF를 읽었고, SF에도 폭넓은 스펙트럼이 있고 제각기 줄 수 있는 재미 역시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SF에서 느끼는 재미도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단순히 우주선 타고 다니면서 광선총 쏘고 싸우는 내용이 재미있어서 SF를 본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게 진정한 SF의 본질이요, 정수라고 주장하지 않는 한 그것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SF의 본질과 정수는 무엇일까? 그걸 알 수 있다면, SF에서 느끼는 재미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SF 역시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는 없었다. 읽은 양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SF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워졌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SF가 있고 각자 다른 종류의 재미가 있는데, 과연 무엇을 진정한 SF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한동안은 이것도 SF고, 저것도 SF라며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지금도 가끔 강의를 나가면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렉 이건도 SF고, 더글러스 애덤스도 SF다. 스타워즈도 SF고, 어벤저스도 SF다. 재미있는 건 다 SF다. SF 만만세!

  물론 아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다음에는 으레 이렇게 덧붙인다. 어떤 작품이 SF인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다는 그게 얼마나 SF의 본질에 가까운지를 따져야 한다고. 과학과 마법이 함께 등장하는 작품은 SF인가, 판타지인가? 초능력자를 다루는 작품은 SF인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선을 그어 분류하는 것보다는 그게 얼마나 SF적인지를 평가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다.
  그러기 위한 기준은 순도 100%의 SF다. 순도 100%의 SF는 일종의 중력 중심이다. 모든 SF작품은 이 주변에 분포한다. 어떤 작품은 좀 더 가까울 것이고, 어떤 작품은 좀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 SF적인 면이 있다. 중력이 작용하는 거리에는 제한이 없지만 멀리 떨어질수록 0에 수렴하는 것처럼 SF의 중심도 마찬가지다. 이 중심이 있어야 비로소 SF라는 장르가 존재할 수 있다.

  아마 판타지나 추리, 호러, 로맨스도 그런 중심이 있을 것이다. 어떤 작품은 SF의 중심과 추리의 중심 사이에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작품은 SF인가 추리인가? 그것보다는 얼마나 SF적인 재미가 있고, 얼마나 추리적인 재미가 있는지를 따지는 게 낫다. 어떨 때는 SF에 좀 더 가까울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SF의 중심에 있는 순도 100%의 SF는 이른바 하드SF라고 생각한다. 혹시 오해를 살까 덧붙이는데, 하드SF라고 해서 무조건 중심에 놓인다는 뜻은 아니다. 중심에 놓일 정도의 SF라면, 자연스럽게 하드SF일 것이라는 소리다.
  하드SF는 흔히 과학적 정합성에 충실한 SF를 말한다. 어렵다는 선입견과 달리 SF작가는 모두 하드SF를 지향한다. 다만 그런 결과를 내어 놓지 못할 뿐이다. SF를 쓰면서 일부러 과학 원리를 틀리게 하는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황당한 현상을 묘사하더라도 작가는 그게 과학적으로 그럴듯하다는 논리를 펼치거나 최소한 그런 분위기라도 풍기게 마련이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는 있어도 일부러 저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니 모든 SF작가는 하드SF를 추구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작품의 SF적인 요소, 혹은 SF성(?)을 평가할 수 있다. ‘인물 묘사도 좋고 서사도 매우 재미있었지만, SF성은 다소 부족하다’, ‘정말 지루하지만 SF 특유의 주제 의식은 정말 좋다’는 식의 평가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들은 어떻게든 SF의 중심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려고 노력할 수도 있고, 적당히 만족하고 이야기만 재미있게 만들거나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공을 들이는 등의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런 순도 높은 SF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야말로 SF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재미일 게 분명하다. 나는 요즘 SF작가 지망생을 만나면, SF로만 쓸 수 있는 주제를 찾아보라고 권한다.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과연 그것을 SF로만 쓸 수 있는지, SF로만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게 쉬웠으면 진작에 내가 훌륭한 SF작가가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다른 장르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고 SF가 아닌 건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SF의 중심에서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중심에서 찾을 수 있는 재미에 관해 모두의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 경우에는 ‘우주와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인식이 확 뒤집히는 충격’이 바로 그 재미다. 어쩌면 순도 100%의 SF는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이상적으로만 존재할지도 모르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꼭 순수한 SF가 아니어도 즐기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내가 SF를 계속 읽거나 쓰는 건 그 중심에 좀 더 다가가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미 충분히 근접한 작품을 여럿 접했지만,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는 법 아닌가.

연재글

SF와 나 (1): 어느 과학자가 SF를 쓰는 이유 https://horizon.kias.re.kr/24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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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관
SF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