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2007년 혹은 2008년경, 필자가 디스플레이 관련 국제학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상당히 넓던 발표장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던 한 세션은 디스플레이 화질 평가를 다루고 있었다. 통상적인 학술 행사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그 세션에선 당대를 대표하던 두 디스플레이 진영의 치열한 격돌이 이루어졌다. 액정표시장치liquid crystal display, LCD와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lasma display panel, PDP을 대표하는 연사들은 각종 화질 테스트 결과를 동원하며 자신들의 기술이 상대 진영보다 얼마나 우월한지 설파했고 질의응답 시간은 학술 대회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상대방 흠집내기 수준의 공방으로 치닫곤 했다. LCD와 PDP 진영 사이에 평판 디스플레이 시장의 주도권을 향한 경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걸맞는 싸움이었다.

이런 경쟁의 맥락을 알려면 21세기 초 디스플레이 산업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앞의 두 연재글1) 에서 소개했던 음극선관cathode ray tube, CRT 기술은 20세기 말로 갈수록 성장이 정체되고 사양산업의 징후가 뚜렷해졌다. CRT보다 훨씬 얇고 화면이 넓은 평판형 디스플레이flat panel display, FPD 시대가 개화되고 있었다. 변화를 이끄는 쌍두마차는 PDP와 LCD였다. 필자가 2003년 초 입사한 첫 직장은 CRT 관련 부품이 매출의 대부분이었지만 LCD 관련 신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었다. CRT가 저문 후를 대비한 일종의 신사업 전략이었던 셈이다. 위에 언급한 학회가 개최되던 시기는 PDP가 대형 평판 디스플레이 시장을 장악하며 중형으로 영역을 확장해 들어가고 LCD는 랩톱용 디스플레이에서 출발해 크기를 확대해 가며 40인치 대 하이엔드급 TV 시장으로 진출하며 두 기술이 격렬히 부딪히던 시점이었다. 이 중형 TV 영역에서의 성공은 이후 평판형 디스플레이 시장의 주도권을 결정하게 된다.

오늘날 디스플레이의 대세는 LCD다. 스마트폰에서 초대형 TV에 이르기까지 LCD가 적용되지 않는 디스플레이 응용 분야는 없을 정도다. 물론 중소형 디스플레이에서 유기발광다이오드organic light emitting diode, OLED의 활약이 눈부시긴 하지만 대형 디스플레이의 시장 점유율은 아직도 LCD가 압도적인 1위다. 이 지역을 호령하던 PDP는 화려한 등장이 무색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08년 전후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두 디스플레이가 탄생한 배경, 디스플레이 소자의 작동 원리와 특징, 그리고 어떤 기술적 진화가 이루어졌는지 두 차례로 나눠서 살펴본 후 앞에 던진 질문의 답을 찾아가 보자. 이번 글은 액정과 LCD 기술의 원리를 먼저 다룬다.


액정과 편광

액정liquid crystal은 액체liquid와 결정crystal의 합성어다. 흐를 수 있는 유체인 액체는 분자들의 위치나 방향이 무질서하게 제멋대로 섞이며 모든 방향으로 동일한 특성을 가진 등방적isotropic 상태를 보인다. 반면 결정은 3차원 공간 속에 원자나 분자가 주기적으로 결합되어 위치 및 방향에 따라 규칙적인 질서를 갖는 고체를 의미한다. 소금이나 다이아몬드 결정이 대표적인 예다. 액정은 이름 그대로 특정한 열역학적 조건 하에서 액체와 결정의 성질 중 일부를 교집합으로 갖는 물질이다. 보통 막대기형 분자들이 고온의 액체와 저온의 고체 상phase 사이에서 형성하는 중간상을 액정상이라 한다. [그림 1]의 왼쪽은 액정상을 이루는 막대기형 분자의 한 예다. 분자의 길쭉한 방향이 장축, 이에 수직인 방향이 단축이다. 액정의 다양한 상phase 중 [그림 1]의 가운데 있는 네마틱nematic 상을 보면 분자들의 위치는 제멋대로고 액체처럼 유동성을 갖지만 장축 방향이 대충 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네마틱 상에 위치 질서도translational order는 없지만 방향 질서도orientational order가 존재한다. 분자들의 장축이 정렬한 방향을 방향자director라 부른다. 여기에 더해 액정 분자들이 오른쪽 그림처럼 층상 구조로 정렬한 상을 스메틱smectic 상이라 부른다.2)

 

 

액정상이 액체와 다른 가장 큰 특징은 방향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비등방성 혹은 이방성anisotropy을 가진다는 점이다. 우리 우주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등방성이다. 거시적인 규모로 보면 밤하늘의 어느 방향을 바라보나 우주는 균질하고 동일한 모습으로 보인다. 물질 세계를 보면 액체 및 기체처럼 분자들이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는 유체가 등방성을 가진 대표적 물질이다. 창유리로 대표되는 유리glass도 등방적이다. 그런데 [그림 1]의 네마틱상을 보자. 액정 분자들이 한 방향으로 도열해 있으니 정렬 방향, 즉 방향자의 방향과 그에 수직인 방향의 성질이 달라진다. 유전상수, 굴절률, 자기 감수율 등 재료과학자가 조사하는 거시적 성질들이 액정의 장축과 단축 방향에 따라 다른 값으로 측정된다.

다양한 성질들 중 굴절률을 살펴보자. 굴절률은 어떤 물질 속으로 빛이 비스듬히 입사할 때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빛이 계면에서 꺾이는 정도를 결정한다3). 굴절률은 해당 물질 속을 진행하는 빛의 속도도 결정한다. 굴절률이 1.5인 유리를 통과하는 빛의 속도는 진공 중 속도(초속 약 30만 km)를 1.5로 나눈 초속 약 20만 km다. 액정처럼 이방성을 가진 물질은 굴절률도 두 값을 가진다. 물질에 입사하는 빛의 전기장이 진동하는 방향, 즉 빛의 편광polarization 방향에 따라 빛이 느끼는 물질의 굴절률이 달라진다. 

액정에 입사한 빛의 전기장 방향이 액정의 방향자에 나란한 경우와 수직인 경우 빛이 느끼는 굴절률을 각각 이상광선 굴절률(ne)과 정상광선 굴절률(no)이라 부른다. 이런 물질에 비스듬히 입사하는 빛은 이중으로 굴절을 겪으며 [그림 2]처럼 상이 두 개로 보이기 때문에 흔히 복굴절birefringence 물질이라 부른다. 중요한 사실은 복굴절을 가진 물질은 입사하는 빛의 편광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광학적 효과가 LCD 구동 원리의 바탕을 이룬다.


LCD는 편광을 다루는 디스플레이다. 편광은 전자기파동인 빛의 중요한 속성이다. 디스플레이 및 조명 관련 중소기업들과 산학과제를 다수 진행했던 필자에게 기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요청하는 사항들 중엔 “빛의 편광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란 질문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편광의 개념, 그리고 편광 조절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림 3]을 보면 횡파인 전자기파를 구성하는 두 요소, 즉 전기장과 자기장의 진동 형태가 묘사되어 있다. 그림처럼 전기장이 x축 방향으로, 자기장이 y축 방향으로 진동하면서 빛이 z축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하자. z축을 따라 다가오는 빛에 맞서서 이를 바라볼 때 전기장 벡터가 진동하는 패턴이 내 눈에 어떻게 보일까? [그림 3]의 위에 표시된 전자기파의 경우 전기장이 좌우로 왕복 운동하는 모습이 수평선의 형태로 보일 것이다(아래 그림의 가장 왼쪽에 묘사된 모습이다). [그림 3]의 아래에 제시된 여러 그림이 보여주듯이 전기장 벡터의 끝은 선, 원, 타원의 형태 등 다양한 형상의 궤적을 그릴 수 있다. 이 상태를 순서대로 선형편광(직선편광), 원형편광, 그리고 타원편광이라 부른다.

 

 

이제 LCD의 기본 모드mode 중 하나인 꼬인 네마틱twisted nematic, TN 모드의 작동 원리를 [그림 4]의 액정 패널 모식도를 이용해 살펴보자. 액정 패널은 보통 두 장의 유리 기판 사이에 액정이 주입된 기본 구조를 갖는데, 하판 유리엔 보통 박막 트랜지스터thin film transistor, TFT와 하부 편광판(=편광필름)이, 상판 유리에는 컬러 필터와 상부 편광판이 형성된다. TN 모드라 하면 왼쪽 그림처럼 액정 분자들이 수평으로 누운 상태에서 서서히 꼬이며 90도의 각도로 회전한다. 액정 분자를 표면에 특정 방향으로 고정시키려면 미리 적당한 표면 처리를 한 후 액정을 주입해야 한다4). 전압을 가하면 액정 분자들은 오른쪽 그림처럼 전기장 방향으로 수직 정렬한다. 하판 및 상판 유리에 부착된 편광판의 두 투과축은 서로 수직이거나 수평으로 배치될 수 있는데, 그림의 예에선 투과축이 서로 수직이다5). 셀 내부가 비어 있다면 투과축이 수직인 두 편광판을 통과하는 빛은 없다. 하부 편광판을 거쳐 특정 방향으로 선형 편광된 빛의 편광 방향이 상부 편광판의 투과축에 수직으로 만나기 때문에 이 빛은 대부분 흡수된다.



 

 

 90도로 꼬인 네마틱 액정은 통과하는 빛에 대해 광스위치 역할을 한다. 수돗물의 흐름을 수도꼭지가 조절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림 4]의 왼쪽 그림처럼 액정 분자들이 수평인 상태로 꼬인 경우 하부 편광판을 통과해 선형 편광된 빛은 분자의 꼬인 방향을 따라 편광을 함께 회전시킨다. 흡사 액정 분자의 장축에 편광 방향이 붙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반면에 전압을 가해 액정 분자를 수직으로 세우면 액정층은 통과하는 빛의 편광 방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결국 편광 상태를 유지하며 올라온 빛은 상부 편광판에서 흡수된다. LCD를 통과하는 빛의 편광이 액정에 의해 영향을 받기 위해선 빛이 액정의 복굴절을 느껴야 한다. 복굴절이 빛의 편광을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는지 알고 싶은 독자는 이 글의 끝에 있는 [덧붙인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빛이 액정의 복굴절을 느끼는 조건은 두가지다. 우선 빛의 입장에서 액정의 장축과 단축이 모두 보이면서 두 굴절률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둘째로 입사하는 빛의 편광 방향이 액정의 장축 혹은 단축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경사각을 가지며 만나야 한다. 그래야 장축과 단축에 나란한 각각의 성분이 서로 다른 굴절률을 느낀다.

 

[그림 5]는 하부 유리의 편광판을 막 통과한 빛의 입장에서 바라본 액정 분자의 모습으로서, 그림의 왼쪽과 오른쪽은 각각 [그림 4]의 왼쪽 및 오른쪽 그림과 대응되면서 전압을 가하기 전과 가한 후의 상황을 묘사한다. 이 그림에서 빛은 지면(혹은 스크린)을 뚫고 들어가는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은 TN 모드로 액정이 꼬여 있어 액정의 장축이 서서히 회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빛은 그림 속 1→2→3→4 순서로 액정 분자를 만난다.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된 전기장 벡터, 즉 편광 방향은 처음엔 1번 액정 분자의 장축에 나란해서 이상광선 굴절률 ne만 느끼고 복굴절을 느낄 순 없다. 그러나 액정층을 통과함에 따라 비스듬히 기울어진 액정과 만나며 ne와 정상광선 굴절률인 no를 같이 경험하는데 이 그림에서는 가령 노란색 전기장 벡터가 2~4번 액정 분자와 만날 때 비스듬히 각도를 이루며 만나게 된다(가령 전기장 벡터가 4번 분자와 만나는 경우를 보라). 이로 인해 빛은 두 굴절률을 동시에 느끼면서 편광의 방향의 회전이 일어난다. 편광 방향이 액정과 함께 90도 돌아가 상부 편광판의 투과축과 나란히 정렬하면 빛이 통과되어 밝은 영역이 된다.

오른쪽은 전압이 가해져 분자들이 모두 수직으로 배열된 모습을 보여준다. 빛의 입장에선 액정 분자의 장축이 전혀 보이지 않고 원으로 묘사한 분자의 단면만 보이니 전기장은 항상 장축에 수직인 방향으로만 정렬해 no 굴절률만 느낀다. 복굴절을 경험하지 못하니 편광 방향도 돌아가지 않아서 액정층을 통과한 빛은 상부 편광판에서 흡수된다. 따라서 전압을 가한 영역은 어둡게 된다. 전압을 끄면 탄성 회복력으로 액정이 다시 TN 모드로 돌아가 꼬이니 빛이 통과되어 밝게 변한다. 즉 전압의 온∙오프를 통해 빛의 투과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시중에 판매되는 다양한 LCD 제품에 적용되는 액정 모드를 큰 틀로 구분하자면 위에 설명한 TN 모드, IPSin-plane switching 모드, 그리고 VAvertically aligned 모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IPS와 VA 모드는 TN 모드의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모드들이다. 시야각 특성, 명암비 등 여러 성능에 있어 모드별 장단점이 있지만 이들이 빛의 투과도를 조절하는 원리는 같다. 바로 액정의 복굴절을 이용한 편광 제어다. [그림 6]의 IPS 모드에선 액정 분자들이 기판 표면에 대해 수평으로 배향되어 있다. 전압을 가하는 두 전극을 하부 기판에만 배치한 후 수평 방향의 전기장을 가하면 액정 분자를 수평면 내에서 회전시킬 수 있다. 입사되는 빛의 편광이 처음엔 액정 분자의 장축과 나란했다면 평면 내에서in-plane액정을 돌리면switching 편광 방향과 분자의 장축이 어긋나면서 빛은 복굴절을 느끼고 편광이 바뀐다6). VA 모드는 이름대로 액정 분자들이 수직으로 정렬되도록vertically aligned 표면처리를 한다. 전압을 가하면 수직의 액정 분자를 기울일 수 있다. 전압을 가하기 전의 상태는 [그림 5]의 오른쪽과 정확히 동일한 상태로, 빛은 액정 분자의 단축 방향 단면만 보인다. 전압을 가해 분자를 기울이면 장축과 단축이 다 보이게 되므로 빛이 복굴절을 느끼고 편광 상태를 바꾼다.

 


LCD의 태동과 개화, 그리고 약진

액정 물질이 처음 발견된 때는 19세기 후반이지만 이를 디스플레이에 활용한 첫 사례는 1960년대 중반에 나왔다. 미국의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사에서 일하던 연구원들이 액정의 동적 산란 모드dynamic scattering mode, DSM를 발견한 것이다. 네마틱 액정이 얇은 층으로 잘 정렬되어 있으면 빛은 대부분 통과하지만 전기장을 가해 배열을 흩트리면 빛이 산란되어 투과도가 떨어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투명 전극을 다양한 패턴으로 입혀 전압을 가하면 해당 영역만 뿌옇게 보이는 방식으로 흑백 디스플레이가 구현되었다. 이를 토대로 시험용 LCD가 1968년 처음 선을 보였다. 하지만 DSM 방식을 사용한 LCD는 구동 전압이 높고 화질이 선명하지 않아 응용 분야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1970년대 후반, 그리고 필자가 중학교에 입학한 1980년대 초반에, 누구나 원했던 입학선물이 있었다. 바로 카시오 전자 손목시계였다. 측면에 있는 버튼만으로 다양한 기능이 펼쳐지던 작은 화면은 대단한 신세계였다. 필자도 중학교 입학 선물로 전자 손목시계를 받고 최애 보물로 애지중지했던 기억이 난다. 이 화면에 사용된 기술이 바로 TN-LCD7)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지만 말이다. LCD 산업의 본격적 태동을 일으킨 획기적 전기가 바로 1971년 제안되고 LCD 기술의 주류가 된 TN 모드 LCD(TN-LCD)였다. TN-LCD의 구동 원리는 앞 절에서 상세히 설명했다. TN-LCD는 구동전압이 수 볼트 정도로 작고 적당한 명암비와 응답시간을 갖고 있어서 전자계산기와 손목시계 등에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하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밝기가 상당히 달라지고 동영상을 구현할 정도로 충분히 빠르지 않아 오늘날 사용되는 LCD가 탄생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LCD가 손목시계나 전자계산기의 표시창을 넘어 본격적 디스플레이로 진화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술적 진보가 1980년대 이루어졌다. 바로 박막 트랜지스터thin-film transistor, TFT의 등장이었다. 반도체 스위칭 소자인 트랜지스터는 LCD 화면에서 뛰어난 계조gray scale 표시를 가능케 해서 다양한 색조의 영상 구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8)  TFT의 기본 구조에 대한 특허는 1930년대 출원되었으나 비정질amorphous 실리콘을 기반으로 한 TFT-LCD 기술은 1970년대 완성되었다. 물질 내 전자가 흐르는 정도를 나타내는 이동도mobility는 비정질 실리콘보다 다결정 실리콘이 더 높지만 대형 유리 기판 위에 형성할 수 있는 실리콘은 비정질이고 여기에 유리에 변형을 일으키지 않는 조건으로 결정화 공정을 추가해야 다결정 실리콘이 만들어진다. 이런 이유로 대면적 LCD는 비정질 실리콘 기반 TFT를 활용하고 프로젝터나 ARaugmented reality용 소형 디스플레이 등 고성능을 요구하는 LCD에 다결정 실리콘 기반 TFT가 적용된다9). TFT의 성공적 개발은 1980년대 중후반 LCD 붐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본 회사를 중심으로 소형 TFT-LCD 제품이 선을 보이다가 1988년 샤프가 14인치 풀 컬러 TFT-LCD를 발표했다. 이후 TFT-LCD는 노트북, 모니터, 휴대용 소형 TV 등에 본격적으로 활용된다. LCD의 본격적 개화에는 상온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액정, 배향막, 컬러필터 물질, 편광필름 등 다양한 재료 기술의 발전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LCD가 중대형 TV를 포함한 보편적 디스플레이 영역으로 확실히 진입하기 위해선, 특히 대형 디스플레이의 터줏대감인 PDP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화질 특성 및 공정기술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대대적인 기술 혁신이 필요했다. 가장 핵심적 기술적 이슈를 몇 가지 들면 시야각 특성, 투과율과 소비전력, 동영상 화질, 대면적화를 위한 공정 기술 등이다. 이중 LCD의 대형화에 있어 핵심이 되었던 시야각 특성과 동영상 화질을 중심으로 LCD 진영이 기울인 기술적 노력을 살펴보자. 이 두가지 기술적 이슈는 21세기초 LCD가 노트북과 같은 소형 디스플레이로만 국한될 것이라는 예상을 뒷받침했던 요인들이었다.  

액정 분자는 길쭉해서 이들이 정렬하면 장축으로 방향성이 생긴다. 따라서 TN 모드나 VA 모드에서 네마틱 액정이 기울어져 있을 때 이를 보는 방향에 따라 빛의 투과 특성이 다르게 보인다. 방향에 따라 복굴절 효과도 달라지니 밝기나 색상이 각도에 따라 변한다. 이런 시야각 특성은 LCD가 주로 정면에서 문서 등의 정지영상을 보는 노트북이나 모니터 용도를 벗어나 넓은 시야각 특성을 요구하는 TV로 응용을 넓히는데 있어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다. 액정 분자가 수평으로 놓인 상태에서 돌아가는 IPS 모드는 어떨까? 수직 방향으로 기울어진 모드보다는 상황이 좋지만 그래도 시야각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진 않는다. 시야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다중 구역multi domain 화소 구조가 개발되었다. 예를 들어 VA 모드의 경우 수직을 기준으로 어느 방향으로든 액정을 기울일 수 있지만 돌출부나 패턴화된 전극을 이용해 화소 내 기울임을 여러 방향으로 조절한 다중 구역들을 두면 시야각에 따른 특성 편차를 보상할 수 있다. S-PVAsuper patterned VA 모드의 경우 한 화소 내 여덟 개의 다중 구역을 설정해 우수한 시야각을 구현할 수 있었다. IPS 모드 역시 비슷한 개념의 다중 구역을 적용해 시야각의 추가적인 개선이 가능했다. 게다가 적절한 광학 보상 필름을 추가로 적용함으로써 LCD가 대형 디스플레이 분야로 진출하기 위한 시야각 특성이 확보되었다.

액정 상은 부분적으로 액체의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반응에 대한 움직임에 시간이 걸린다. 가령 TN 모드에서 전압이 가해지면 액정 분자는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회전 점성 등의 속성으로 결정되는 반응 시간response time을 갖는다. 느린 반응 시간은 동영상이 화면에 펼쳐질 때 영상의 번짐blurring 현상을 유도한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는 점성이 낮은 액정을 개발해 반응 시간을 줄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액정을 돌리기 위해 가하는 전압을 화면이 바뀌는 초기에 목표 전압보다 더 높게, 즉 과하게 가해 액정을 더 빨리 돌리는 것이다. VA 모드의 경우 수직으로 정렬한 액정 분자들을 미리 사전에 기울이는 전압 신호를 가해서 반응 시간을 줄이고 동영상 화질을 개선하기도 했다. 

 

동영상 화질과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LCD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LCD가 유지형holding-type 디스플레이라는 점이다. 디스플레이의 재생률이 60 Hz이면 1초에 60 장면이 재현된다. LCD의 경우 이는 60분의 1초 동안 유지되는 정지영상을 초당 60번 보여주는 꼴이다. 한 프레임frame이 지속되는 60분의 1초 동안 영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다가 그 다음 프레임이 재현될 때 갑자기 바뀐다. 하지만 인간의 시각 체계는 움직이는 피사체의 궤적을 선형으로, 연속적으로 따라가며 인지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한 프레임 동안 움직이지 않는 정지 영상이 이어지는 상황과 이를 연속적 움직임으로 인지하려는 인간의 시각 체계 사이의 충돌은 동영상 속 피사체를 흐려 보이게 만든다. CRT처럼 전자빔이 형광체 화소를 때리는 짧은 시간 동안만 화소가 빛을 내뿜고 나머지 시간은 발광하지 않는 디스플레이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 결국 유지형 디스플레이가 배태한 동영상 화질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LCD를 CRT와 비슷하게 만들려는 기술적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한 가지 방법은 백라이트를 프레임 구동과 동기화해서 한 프레임의 절반만 점등하는 것이다. [그림 8]은 LCD의 프레임별 구동을 도식화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위의 그림은 통상적으로 60 Hz로 구동되는 상황을 나타낸다. 가운데 그림은 한 프레임에 해당하는 1/60 초 중 50%는 백라이트를 켜고 50%는 끄는 방식을 묘사한다. 이는 동영상의 품질을 높일 수 있지만 평균 밝기가 떨어지거나 백라이트를 짧은 시간 동안 과하게 켜야 하는 문제가 있다. 다른 방법은 [그림 8]의 아래 그림처럼 프레임 수를 늘리는 것이다. 즉 60 Hz 구동을 가령 120 Hz로 늘리면 한 정지영상당 유지 시간이 반으로 줄어 동영상 화질이 개선된다10). 빠른 영상을 재현해야 하는 게임용 모니터가 보통 144 Hz 이상의 프레임 수를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끝으로, LCD의 대형화에 있어 공정 기술의 혁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대면적 TFT 기술의 개발에 이어 대면적 LCD에 액정을 효율적으로 주입하는 공정 개발이 없었다면 LCD의 약진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액정은 두 장의 유리 기판 사이 수 μm 간격의 빈 공간에 균일하게 적정량으로 주입되어야 한다. 초기에는 셀을 진공 챔버에 넣고 펌프로 오랜 시간 동안 내부 진공을 잡은 후 진공을 해제해서 액정이 주입구를 통해 압력차와 모세관 현상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활용했다. 하지만 LCD의 면적이 커지면서 이 방식으로는 액정 주입에만 하루나 2-3일씩 걸리는 상황이 발생, 생산성의 측면에서 큰 문제가 있었다. 그 대신, 진공 상태에서 액정 셀 위에 액정을 적하滴下, dropping 방식으로 일정 간격으로 적정량을 뿌려 줌으로써 대형 LCD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현업에 있던 엔지니어들은 이 액정 적하방식의 개발이야말로 LCD 대형화의 일등공신이라 평가한다.


글을 마치며

이런 치열한 노력의 결과로 LCD는 소형 디스플레이 영역에서 탈피해 중대형 디스플레이로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대형 디스플레이로 출발해 중형으로 입지를 넓히고 있던 PDP와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2004년 11월, 일본 샤프에서 65인치 TFT-LCD TV를 최초로 개발한 사건은 그 신호탄이었다. 다음 글에서는 PDP가 작동하는 방식 및 장단점, 그리고 LCD-PDP 디스플레이 대전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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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액정의 복굴절 특성은 어떻게 빛의 편광을 바꾸나?

원글에서 LCD는 편광을 다루는 디스플레이 소자라 불렀다. 액정의 TN 모드를 거치는 빛의 편광 상태는 액정의 복굴절에 의해 변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부록에서는 선형편광과 원형편광을 집중적으로 비교함으로써 복굴절이 빛의 편광 상태를 어떻게 바꾸는지 이해해 보자. (물론 디스플레이 기술의 흐름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이 부록 글을 생략해도 좋다.)

z축 방향으로 진행하는 빛이 있다. 빛은 횡파이므로 이 빛의 전기장 벡터는 x-y 평면 내에서 진동한다. x축에 대해 45도 기울어진 선형편광의 전기장 벡터를 [그림 S1]에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선형편광은 x축 성분(파란색)과 y축 성분(녹색)으로 분리할 수 있다. 가령 그림의 위에서 x축을 향해 손전등을 비출 때 빨간색의 전기장 벡터가 만드는 그림자가 파란색으로 표시한 x축 성분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의 오른쪽으로부터 y축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면 y축 상에 생기는 전기장 벡터의 그림자가 녹색의 y축 성분이 된다. 빨간색 전기장 벡터가 45도 기울어진 상태로 진동하면 x, y 두 성분도 동시에 같은 방식으로 진동한다. 즉 동시에 0이 되고 동시에 증가하여 동시에 최대가 되고 동시에 줄어들면서 0이 되고 음의 방향으로 커지면서 동시에 최소가 되는 식이다. 즉 x, y 두 성분이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위상으로 움직이면 선형편광이 된다. 이때 편광의 방향은 굳이 45도일 필요는 없다. 두 성분이 동일한 방식으로 제1 사분면과 제3 사분면을 왕복 운동하면 그림 속 빨간색 전기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다양한 크기와 각도의 선형 편광을 만들 수 있다.

 

 

 

[그림 S2]에 표시된, 전기장 벡터의 끝이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원형 편광은 어떨까? 전기장 벡터의 끝이 원의 궤적을 그리며 돌아갈 때 이를 x, y 두 성분으로 나눠 보면 두 성분의 움직임이 다르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첫 그림에서 y축(녹색) 성분이 최대가 될 때 x축(파랑) 성분은 0이고 편광이 회전함에 따라 y축 성분이 줄어들면서 x축 성분이 증가한다. 그러다 세 번째 그림처럼 x축 성분이 최대가 되면 y축 성분은 0이 된다. 이처럼 x, y 두 성분 사이에 한 주기의 1/4라는 어긋남이 존재하면, 즉 위상으로 (한 바퀴가 360도이므로) 90도만큼 위상 차이가 존재하면 원형 편광이 만들어진다11). 물론 x, y 두 성분의 최대값이 같아야 원형의 궤적을 그리게 되고 최대값이 다르거나 위상 차이가 90도에서 벗어나면 타원 편광이 된다.

 

이제 빛의 편광이 [그림 4]의 왼쪽 그림처럼 TN 모드 액정의 복굴절을 느끼는 방식으로 LCD의 액정 셀에 입사할 때 편광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아보자. 하판의 편광판을 거쳐 선형 편광으로 바뀐 전기장 벡터는 진행함에 따라 꼬여 있는 액정 분자를 비스듬히 만난다. 그럼 빛의 전기장 벡터는 당연히 액정의 장축과 단축에 나란한 전기장 성분으로 나눌 수 있고 이 두 성분은 각각 이상광선 굴절률 ne와 정상광선 굴절률인 no를 느낀다. 이처럼 복굴절을 느끼는 선형 편광의 상태가 액정층을 통과함에 따라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그림 S3]을 이용해 설명해 보자.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 이 그림에서 묘사한 액정 셀 속 네마틱 액정 분자들의 장축은 x축 방향으로 정렬해 있다고 가정하자. 왼쪽 그림은 장축에 비스듬히 입사하는 전기장 벡터가 이상광선 굴절률(ne)을 느끼는 성분(Ex)과 정상광선 굴절률(no)을 느끼는 성분(Ey)으로 나뉘는 상황을 보여준다. 두 전기장 성분이 느끼는 굴절률이 다르므로 액정 셀 내에서 두 성분의 파장(진공 중 파장을 굴절률로 나눈 값)도 달라진다. [그림 S3]의 오른쪽 그림에선 no가 ne보다 큰 상황을 가정했다. 따라서 액정 셀 내 Ey의 파장이 Ex의 파장보다 짧다. 셀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선형 편광인 전기장의 두 성분의 위상이 같다. [그림 S1]에서 봤듯이 두 성분은 완벽히 동기화된 상태로 진동한다. 그런데 셀 내에서 파장이 달라지면 두 전기장의 진동 상태가 서서히 어긋나게 되면서 빠져나오는 순간의 진동 방식도 서로 달라진다. 그림에선 액정 셀 밖으로 나왔을 때 한 전기장 성분이 최대가 될 때 다른 성분은 최소가 되는 방식으로 진동하며 위상이 180도 어긋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진동은 어떤 편광을 그릴까? x-y 평면의 제1 사분면과 제3 사분면 사이를 왕복하며 선형 편광을 그리는 [그림 S1]의 진동 방식을 놓고 고민해 보면 이 경우는 제2 사분면과 제4 사분면 사이를 왕복하며 진동하는 선형편광이 됨을 알 수 있다. 액정 셀을 통과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면 선형 편광의 방향이 90도 회전한 셈이다. 만약 액정 셀을 빠져나오는 순간 Ey와 Ex의 위상이 90도 차이가 나면 어떨까? 위에 분석한대로 이 경우는 원형 편광이 된다.

TN 모드 액정셀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액정이 일정한 방향으로 정렬한 게 아니고 연속적으로 꼬이며 90도만큼 회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접근 방법은 동일하다. 꼬여가는 액정 셀을 매우 얇게 수십 혹은 수백 층으로 나눈다고 가정하면 각각의 얇은 층 속에서 액정의 회전은 무시할 수 있어서 [그림 S3]의 상황으로 고려해 분석할 수 있다. 이 분석법을 수많은 층에 확장에 적용하면 TN 모드를 통과하는 선형편광의 운명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본문에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선형 편광의 방향이 꼬인 액정분자를 따라서 함께 회전한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1. [디스플레이 이야기 3] (주병권 저, 열린책빵)

  2. [디스플레이 공학 I(LCD)] (김상수, 김현재, 이신두 공저, 청범출판사)

  3. [액정] (피터 J. 콜링스 저, 이신두 역, 전파과학사)

  4. [디스플레이 공학 II] (김근배 외, 청범출판사)

  5. [디스플레이 산업의 오해와 진실] (문국철, 황인선, 임화림 공저, 바른북스)

  6.  Kyeong-Hyeon Kim and Jang-Kun Song, “Technical evolution of liquid crystal displays,” NPG Asia Mater. 1, 29-36 (2009).

  7. Larry F. Weber, “History of the Plasma Display Panel,” IEEE Trans. Plasma Science 34, 268 (2006).

  8. O. Sato, and S. Fujimura, “Influence of Product Architecture on the Competition Between LCD and PDP Technologies” RISUS-Journal on Innovation and Sustainability 3, 65 – 78 (2012). https://doi.org/10.24212/2179-3565.2012v3i3p65-78

  9. T. Kurita, “Desirable Performance and Progress of PDP and LCD Television Displays on Image Quality” SID Digest, 34, 776-779 (2003).

  10. K. Hirai et al., “Comparison of Image Qualities of LCD and PDP-Consideration of Relationship between Subjective Evaluation and Physical Properties”, The Journal of The Institute of Image Information and Television Engineers 61, 1352-1355 (2007).

  11. [빛의 핵심] (고재현 저, 사이언스북스)

고재현
한림대학교 반도체 ∙ 디스플레이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