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국채표는 미국에서 한국인 최초 기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1961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국립중앙관상대의 제2대 관상대장으로 임명되면서 한국 기상학의 현대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자동응답으로 전달받는 <자동일기예보기> 설치, <고층기상관측소>와 <농업기상관측소> 설립, 해외 기상도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기상 팩시밀리> 구입 등을 추진하며 한국의 선진화된 기상예측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한, 그는 관상대장으로 바쁜 와중에도 1963년 한국기상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한국기상학회지 창간에도 힘썼다. 그의 이런 노력 덕분에 1960년대 낙후된 한국의 실정에서 기상학만큼은 세계적 수준에 뒤처지지 않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국채표는 전라남도 담양에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담양은 일찍부터 근대 학문을 가르쳤던 ‘창흥의숙’이 있어 근대 교육에 대한 지역민들의 이해가 남달랐던 곳이었다. 실제로 고려대 창립자인 김성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송진우, 김병로 등 정·재계 유명인들이 창흥의숙 출신이었고, 김삼순, 리승기와 같은 과학자를 배출한 지역이었다. 국채표의 아버지 역시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고향의 토지를 팔고 경성으로 이주했다.

 

1920년 경성으로 온 국채표는 김성수 일가가 운영했던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입학했고, 졸업 후 1925년 연희전문학교의 수물과로 진학했다. 연희전문 수물과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수학과 과학을 전문으로 배울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중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는데, 당시 조선에는 기독교계 중등학교가 많아 연희전문 졸업생은 어렵지 않게 취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물과 졸업생들은 수학 및 과학 교사로 진출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국채표 역시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된 국채표는 학생들의 교육뿐 아니라 대중의 과학계몽에도 남다른 노력을 했다. 그는 신문과 잡지에 과학 관련 기사를 기고하고, 당대 최고의 매체라 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과학을 소개하였다. 주요 주제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절기와 같은 계절, 대기, 기상 등 하늘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가을 하늘은 어째서 푸른가>, <춘분과 백양궁>, <여름의 밤하늘은 별꽃 바다> 등은 그가 대중을 대상으로 쓴 글의 제목이다. 라디오에서는 취미 강연이라는 프로그램에 나가 <납량천문>, <유성이야기>, <우주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과학 교사로서도 과학계몽가로 활발히 활동했던 국채표는, 돌연 10년간의 교사 생활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국채표는 1939년에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수학과에 32세의 나이로 입학했다. 원래 교토제대는 규정상 여석이 있을 때만 관립 전문학교 출신을 시험으로 선발하는 방계입학을 허용했고, 연희전문 같은 사립 전문학교 출신은 입학 자격 자체가 없었다. 1932년 교토제대에 입학한 연희전문 출신인 박철재의 경우 위탁생으로 들어가 지도교수의 도움으로 선과생으로 수료한 사례가 있었으나 그는 정식 학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1938년 2차 세계대전의 가속화로 교토제대의 학생부족 문제가 발생하자 방계 선발의 확대로 연희전문의 졸업생도 시험을 통해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제국대학을 다니던 일본인들이 장병으로 차출되면서 대학마다 결원이 발생했고, 학교들은 학생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방계 선발을 늘리면서 조선인들의 제국대학 진학이 늘어났다. 1941년 졸업한 그는 조선으로 돌아와 다시 이화고등여학교에서 교감으로 활동했다. 제국대학을 나와도 피지배민이라는 그의 신분은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되면서 국채표는 십여 년간의 교직 생활을 접고 완전히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1945년 조선총독부가 운영했던 기상대가 국립중앙관상대로 개편되면서 초대 대장으로 이원철이 임명됐다. 이원철은 한국 최초의 이학박사로 천문학 분야에서 학위를 취득한 국채표의 연희전문 시절 수물과 교수였다. 그는 관상대장이 되자마자 아꼈던 제자인 국채표를 만나, 학교를 떠나 자신과 함께 관상대를 이끌어 가보자며 부대장직을 제안했다. 평소에도 하늘에 대한 관심이 컸던 그에게 이원철 제안은 매력적이었다. 오랜 기간 교사로 활동했던 국채표에게 관상대로의 이직은 정말 과감한 도전이었다. 국채표는 일본인 관료가 놓고 간 자료부터 검토하면서, 관상대의 주요 기능은 기상 예측이라는 생각을 하고, 무엇보다 기상관측의 수준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1946년 국채표는 부하 직원들을 이끌고 고층권의 기상 연구를 위해 기상관측기를 기존 5㎞에서 23㎞로 띄워 올렸다. 이에 대해 이원철은 ≪자유신문≫에서 “고층권의 기상을 완전히 관측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과학계에 귀한 기록이라 할 것이다. 수소의 보전과 또 무전을 지상에서 맞도록 장치를 하는 데에 기술이 필요하니까 이 점에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앞으로는 세계 기상학계에 어깨를 겨누도록 노력할 것이며 이 방면에 우수한 기술자를 양성하도록 미주로 학도를 파견도 할 계획이다”라고 성과를 극찬하며, 기술진 양성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리고 이 같은 이원철의 기술진 양성계획에 국채표가 선정되면서 그는 미국유학길에 나서게 된다. 국채표는 관상대에서 활동하면서 기상학을 전문적으로 배울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에 기회가 생기자 42세의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유학을 택했던 것이다.


1949년 국채표는 시카고대학의 기상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제국대학 졸업생들이 일반적으로 대학원으로 진학했던 것과 달리 그는 기상학에 대한 전문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학부과정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1953년 졸업한 그는 동 대학 대학원의 석사과정으로 진학했다. 석사과정을 수료한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던 미군 제6군단에서 기상학 관련 강사로 2년을 근무했다.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해 다시 대학으로 온 그는 「3일간의 허리케인 이동 예측에 관해 On the prediction of three-day hurricane motion」라는 성과를 발표하여 1958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미국의 허리케인 기상관측은 24시간이라는 단기 예보에 그쳐 매번 큰 피해를 발생시켰는데, 국채표는 자신이 고안한 일기도의 데이터를 이용한 수리적 방법을 통해 예보 시간을 3일로 대폭 늘려 장기예보를 가능하게 했다. 이에 대해 1958년 미연방 기상국 보고서는 “허리케인 이동의 72시간 예보는 국채표가 고안한 기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라며 그의 성과를 인정했다. 그는 석사학위를 받은 후 위스콘신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3년간 연구를 이어갔으나, 학위를 취득하지 않고 돌연 귀국했다.

1961년 3월 국채표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원래 직장이었던 관상대로 가지 않고, 서울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돌아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시기 서울대 천문기상학과에서 기상학 교수를 뽑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그도 예상치 못했던 그해 5월에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관상대의 상황이 급변했고, 교육 활동에 집중했던 그의 행보도 달라졌다. 군인들이 관상대를 접수하며 이원철 대장이 사퇴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몇 달의 공백 기간을 거친 후 국채표는 9월에 제2대 관상대 대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관상대장이 되자마자 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인공강우에 최적”인 나라라고 얘기하며, 인공강우 추진을 관상대의 주요 사업으로 할 것을 밝혔다. 지금의 시각에서 인공강우는 꿈의 기술, 불필요한 도전 정도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 인공강우는 국가의 기상학 수준을 보여주는 기술 지향점으로 여겨졌다. 당시 미국, 프랑스,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과 소련 등 세계 각국이 이 인공강우 연구에 힘을 쏟고 있었다. 그만큼 기상학에서 인공강우는 실현할 수 있는 기술로 생각되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채표는 자신이 박사과정에서 농업기상, 태풍예보, 인공강우를 배웠다는 것까지 언급하며, 한국에서의 인공강우 연구를 시도해 볼 것을 강력이 주장한 것이다.

국채표는 인공강우를 실현시키기 위해 사업계획을 세웠다. 우선 인공강우 선진국인 일본을 방문하여 그 실태를 알아보고, 늦어도 다음 해 여름 안으로 인공강우에 필요한 약품증기발생기와 약품분무기를 구입하여 인공강우를 시도한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2년 안에 인공강우를 부분적으로 실용화할 것으로 계획했다. 완료는 5년을 생각했다. 인공강우에 대한 국채표의 계획은 대통령 박정희의 관심을 끌어냈다. 1962년 1월 박정희는 문교부를 연두 순시하면서 장관을 대동하고 관상대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1965년까지의 목표연도를 당겨 인공강우 계획을 완성시키라”고 지시했다. 이에 국채표는 인공강우 연구실을 새로이 마련하고, 1965년을 ‘인공강우 완성의 해’로 정하면서 인공강우를 관상대의 대표 업무로 내걸었다.


1962년 봄은 겨울부터 이어진 가뭄이 유난히 심했다. 이에 박정희는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긴급 소집하여 가뭄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이 회의에는 문교부 장관, 농림부 차관, 공군참모차장, 그리고 관상대장인 국채표가 참석했다. 국채표는 여기서 가뭄 대책으로 인공강우를 강하게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은 인공강우를 위한 회사가 있으며 실제로 성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에서 인공강우를 하려면 3년의 기간이 소요되나, 시급한 사안인 만큼 적기인 1년뒤 1963년 7-8월에 실시하기 위해 늦어도 이번 해 8월에는 일본에 가서 인공강우 기계를 사오려고 한다고 했다. 이런 그의 주장에 당시 국군참모차장은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인공강우 기술은 아직 불확실하므로 국가 예산을 낭비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반대 의견의 제기로 이 회의에서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해산했다.

인공강우 시험에 대한 정부 판단은 박정희에 의해 확실히 정리되었다. 5월 25일 다시 소집된 국가재건최고회의에는 박정희가 직접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박정희는 국채표에게 인공강우의 진척 상황에 대해 다시 보고케 했다. 여기서 국채표는 진전 회의와 달리 “시기적으로 긴박하기 때문에 내년 5-6월에 실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의견을 바꾸었다. 그러므로 “금년에는 최단 시일 내에 일본에 가서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여 7.8월에 실험을 실시하겠다”라고 밝힌 것이었다. 이에 정부는 인공강우 시험을 위한 예산을 가뭄대책 예산에 긴급 편성하고, 언론들은 다가오는 7-8월이면 인공강우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인공강우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일본에서 인공강우와 관련한 정보와 기술을 확인하고 입수하려고 했는데, 이 단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일본은 정부 주도로 드라이아이스를 살포하여 비가 내리게 하려는 대규모 인공강우 실험을 진행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 대학교수들의 참여 거부로 시작도 못 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하는 방법이 성공할지 의심스럽고, 실패 시 책임을 져야하는 입장에 대해 거부감을 표했다. 국채표는 일본의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급히 일본을 방문하면서, 기대하던 정보는커녕 기술도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더욱이 몇일지나 비가 내리면서 인공강우에 대한 국가적 절박함도 사라졌다. 결국 국채표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인공강우 사업은 최초의 계획대로도 되지 않았을뿐더러 국가의 관심에서도 점차 멀어지면서 어느새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국채표는 관상대장으로서 인공강우만큼이나 중요하게 추진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국내 기상예보 시스템을 선진적으로 바꾸는 계획이었다. 그는 기상관측에 필요한 새로운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 연구비, 미국의 원조, 대일청구권 자금에서 기상 관련 재정을 확보하였다. 이 자금을 가지고 우선, 전화번호 73-0060을 누르면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전날 확인된 관상대의 기상예보를 누구나 들을 수 있게 <자동일기예보기>를 설치했다. 이 방식은 현재 국번없이 131을 누르면 들을 수 있는 기상예보의 전신으로, 특히 날씨에 민감한 직종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 밖에 고층대기권의 기상현상을 관측할 <고층기상관측소> 설립, 농업기상 업무를 수행할 <농업기상관측소> 설립, 모스 부호를 <라디오·텔레타이프 통신>으로 전환, 해외 기상도를 실시간으로 전달받을 <기상 팩시밀리> 구입 등을 추진하여 한국의 기상시스템 현대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런 현대적인 기상시스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는 예보업무규정을 새롭게 정비하였다. 일일예보 뿐 아니라 주간예보, 월간예보, 계절예보와 같은 장기예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국채표는 관상대장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연구를 지속했다. 1963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세계기상기구 열대기상학심포지움>에서 한국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는 태풍의 중심 이동과 지상기압 예보에 관해 발표했다. 그는 이 연구를 진전시켜 1964년 일본의 교토대학에 「한국과 그 주변을 강타할 수 있는 태풍 중심부의 이동과 지표면 압력의 통계적 예측」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기상학 분야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석사논문을 발전시켜 한국에 적용한 것으로 태풍 진로 예보법을 제안한 획기적인 연구였다. 이 예보법은 ‘국의 방법Cook’s Method’은 국제적으로 알려졌고 이후 기상예보에도 널리 활용되면서, 기상학자로서의 그의 능력과 위상을 공고히 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상학자로서의 국채표의 역할은 자신의 연구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관상대 기술연구원들과 기상학 관련 대학 교수들과 함께 1963년 한국기상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그는 창립 기념강연에서 “낙후된 한국의 기상학 발전을 위해서는 기상학을 연구하는 학자 간의 교류 및 후진 양성이 중요하다”며 학회 창설의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1965년에는 한국기상학회지를 창간했다. 그 창간호에 자신의 연구 결실인 “1964년 9월 13일 서울근교를 통과한 Tornado에 대하여”를 게재하며, 한국 기상학의 발전을 위한 그의 진심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국채표는 1967년 7월 정년퇴직을 했다. 퇴직 이후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기상학 분야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후진양성이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또한 그는 기상학자로서의 연구의 소임도 다 할 것이라는 뜻도 내비쳤다. 그런데 그의 퇴임 후 계획은 지켜질 수 없게 됐다. 1969년 겨울에 그는 눈길에 넘어져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예기치 않은 기상의 악화로 말미암아 그의 생도 마감을 하게 되었다.

국채표는 1961년 관상대장이 되면서 한국 기상학계를 이끌어가는 존재가 됐다. 그는 당시 최신의 과학으로 여겨진 인공강우 실험을 추진하여 세계 기상학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보고자 했다. 또한 그는 현대적 기상예보 시스템 구축과 기상학의 제도화를 통해 한국 기상학의 발전을 꾀했다. 거기에 자신의 연구도 지속하며 한국 최초의 기상학 박사가 되면서 국의 방법까지 창안해냈다. 덕분에 낙후된 한국의 현실 속에서도 한국 기상학만큼은 세계 수준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는 기반을 쌓을 수 있었고, 후학들은 그를 “세종대와 이후 최초의 기상학자”라고 부르고 있다.

선유정
전북대학교 과학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