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일본에서의 계약직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2003년 초, 필자는 디스플레이용 부품을 생산하는 한 회사에 입사했다. 회사에선 입사한 신입 직원들을 대상으로 보통 OJTOn the Job Training 이라 부르는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한다. OJT의 일환으로 방문했던 곳 중 하나는 당시 회사의 주력 생산품인 CRTcathode ray tube, 음극선관 용 유리를 생산하던 라인이었다. 그때는 회사 정문을 통과해 연구소로 가는 도로 한 쪽으로 하얀색 유리용 원료가 잔뜩 쌓인 창고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 원료는 적절한 조건으로 용해되고 가공되어 브라운관을 이루는 몸체로 재탄생할 운명이었다.

약간은 긴장하며 들어간 생산 라인은 완전히 자동화된 곳이었었다. 사실 1970년대 초 합작 법인으로 설립되어 30여년간 브라운관용 유리를 생산한 회사 연혁을 보면 자동화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게 이상할 법했다. 용해된 유리가 주형mold, 몰드 에 적정량 떨어지면 또 다른 틀이 이를 눌러 성형하고 서서히 냉각시키며 브라운관 특유의 유리 부품으로 척척 탄생하는 과정은 무척 생소하며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습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디스플레이 기술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CRT 디스플레이가 평판형 디스플레이Flat Panel Display, FPD 로 대체되어 가던 때 입사한 내게 주어진 연구 과제는 사양산업으로 접어든 CRT의 뒤를 잇는 디스플레이 신기술을 개발하는 임무였다.

오늘날 고사양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대형 TV 등 각종 FPD로 둘러싸인 생활 및 업무 환경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는 널찍한 책상의 절반을 차지하던 CRT 모니터, 성인 두 명은 달라붙어야 움직일 수 있었던 거실의 배불뚝이 CRT TV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쉽진 않을 것 같다. 그런데 1960년대 국내에서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이래 반 세기 넘게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CRT 기술에 친숙했던 세대라 하더라도 이 기술이 19세기 후반에 탄생했다는 점은 잘 알지 못한다. 이번 글에서는 CRT 기술의 맹아가 싹트는 시점부터 출발해 기술의 개화, 성숙, 그리고 쇠퇴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살펴보려 한다.

음극선의 발견과 브라운관의 탄생

물리학은 이미 완성된 학문이라 믿는 학자들이 대부분이었던 19세기의 끝 무렵, 방사능, 엑스선, 그리고 제만 효과와 같은 새로운 물리적 현상들이 연이어 발견됐다. 전자의 흐름인 음극선의 발견도 그 중 하나다. 1859년 음극선을 발견한 과학자는 “인공 광원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1 에도 등장했던 독일의 줄리어스 플뤼커Julius Plücker, 1801-1868 와 그의 학생이었던 요한 빌헬름 히토르프Johann Wilhelm Hittorf, 1824-1914 였다. 히토르프는 공기를 뺀 튜브 속 음극에 전압을 가하면 미지의 선이 튀어나오고 이 선이 튜브의 벽에 그림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음극선의 직진성을 확인한 것이다.2 히토르프와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1919 는 자기장으로 음극선을 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라운 운동에 대한 정교한 실험을 수행한 장 바티스트 페랭Jean Baptiste Perrin, 1870-1942 은 1895년 패러데이 컵을 활용한 실험으로 음극선이 음의 전하를 띤 입자라는 점을 밝혔다. 이후 음극선관 내 진공도가 좋아짐에 따라 전기장에 의해서도 음극선이 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3 즉 전기장과 자기장으로 음극선의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후일 CRT 구현의 기본적 원리로 활용된다.

기체 방전관 속에서 처음 관측된 음극선에 대한 연구는 원자 속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1897년 영국의 톰슨J. J. Thomson, 1856-1940 은 음극선의 성질을 연구해 전자를 발견하고 전자의 질량과 전하량의 비를 구했다. 원자를 구성하는 아원자 구조가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같은 해 독일의 물리학자 페르디난트 브라운Ferdinand Braun, 1850-1918 은 오늘날 우리가 CRT라 부르는 브라운관Braun tube 을 발명했다. 브라운관은 크룩스 튜브의 냉음극cold cathode 을 사용했기 때문에 수십~100 kV의 높은 전압이 필요했다. [그림 1]에 제시된 브라운의 초기 CRT를 보면 음극과 양극에 가해진 고전압으로 가속된 전자가 편향판에 의해 방향이 바뀐 후 형광면에 부딪혀 발광되는 기본 구조가 보인다. 현대의 CRT는 매우 복잡한 구조로 진화했지만 전자를 형성하고 전자빔의 방향을 조절해 가속시키며 형광물질을 자극해 발광시킨다는 기본 원리는 브라운관의 초기 디자인에도 그대로 구현되어 있다.

냉음극을 활용할 경우 CRT 내 잔류하는 이온이 고전압으로 가속되며 음극과 충돌하고 이로 인해 방출되는 이차전자secondary electrons 의 역할이 중요하다. 반면에 현대의 CRT는 적절한 금속 산화물이 코팅된 열음극hot cathode 을 가열해 방출되는 열전자를 활용하기 때문에 구동 전압이 상대적으로 낮다. 일함수work function 가 낮은 바륨 혹은 스트론튬 계열 산화물을 음극에 코팅함으로써 열음극의 작동 온도를 순수 금속보다 낮출 수 있다는 사실은 독일 에를랑겐Erlangen 의 아서 베넬트Arther Wehnelt, 1871-1944 에 의해 처음 보고되었다. 이런 초기 연구 후 20세기 초반에 어빙 랭뮈어를 포함한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전자 방출 과정이 상세히 조사되었다. 냉음극 방식은 최초로 상용화된 브라운관에 사용되었지만 후일 CRT TV의 본격적 상용화에 있어서 열음극 방식의 적용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림 1] 1897년 브라운이 발명한 냉음극 방식의 음극선관 @public domain

전체 전자식all-electronic TV의 탄생

지난 글4 에서 소개했던 기계식 TV는 송신기와 수신기 모두 회전하는 부품과 모터가 있어 소리가 심하고 영상의 품질이 조악하며 해상도의 제약도 컸다. 영국의 공학자 캠벨 스윈턴A. A. Campbell Swinton, 1863~1930 은 움직이는 부품을 제거하고 전자공학적 부품만으로 송신기와 수신기를 모두 구성하는 “전체 전자식all-electronic TV의” 개발이야말로 TV의 진정한 미래라 보았다. 그는 1908년 저널 네이처에 투고한 글5 에서 음극선관에 기반한 전자식 TV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송신기와 수신기 모두 음극선관 방식을 채택하고 서로 수직으로 배치된 두 전자석을 전자빔의 편향에 활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특히 기존의 브라운관을 개조하고 최적화해 개발할 수 있는 수신기(즉 디스플레이 튜브)보다는 피사체의 영상을 획득해 전달해야 할 효율적인 송신기(즉 방송/비디오 카메라 튜브)의 개발이 더 어려운 문제일 것으로 예상했다. 송신기는 우선 피사체의 상 정보를 획득한 후 이를 송신 가능한 전기 신호로 변환해야 한다. 그가 생각했던 송신기의 스크린은 빛에 반응하는 루비듐 조각들을 모자이크 방식으로 배열한 광감응 스크린이었다. 이 경우 각 루비듐 조각은 오늘날 디스플레이의 화소에 대응된다.

1926년 동일 저널에 발표한 글6 에서 스윈턴은 과거에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송신기의 구조와 실험 결과를 제시했다. 이 송신기는 일반적인 브라운관의 형광 스크린 자리에 셀레늄이 코팅된 금속판이 위치해 있다. 피사체의 모습이 렌즈를 통해 셀레늄 표면에 입사되면 위치별 광량 차이에 의해 생성되는 광전자 분포가 피사체의 상을 반영한다. 최종적으로 음극선이 셀레늄 판 위에 투영된 영상 이미지를 스캔해 전기적 신호로 변환하는 방식이다. 그는 수신기와 송신기에 CRT 기술이 적용된다면 기계적 부품이 모두 제거된 전체 전자식 TV 시스템의 구현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다. CRT 기술이 성숙하기 위해선 신뢰성 있는 열음극의 개발, 전자빔의 집속과 정교한 방향 조절을 위한 기술이 필요했고 1920년대는 이에 대한 다양한 제안과 연구가 이루어진 시기다.

CRT 방식 카메라 튜브의 개발을 통한 전체 전자식 TV 시스템의 등장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두 인물이 있다. 바로 필로 판즈워스Philo Farnsworth, 1906-1971 와 블라디미르 즈보리킨Vladimir K. Zworykin, 1888-1982 이다. 정식 교육과정을 밟아 박사학위를 받은 러시아계 공학자인 즈보리킨에 비해 판즈워스는 정식 과학 교육을 받지는 않았고 자신의 아이디어에 근거해 TV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개발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판즈워스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밭이 갈리는 모습을 보며 TV 스캐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판즈워스가 제안한 카메라 튜브는 영상 분석기image dissector 라 불리는데 기계식 TV에서 닙코 디스크가 하는 역할의 전자식 버전이라 할 만하다. 고진공 실린더형 튜브로 구성된 이 장치에서 피사체의 상은 렌즈를 통해 광감응 판 위에 집광되고, 피사체의 위치별 광량에 비례해 방출된 광전자가 “전기적 상”을 형성한다. 이 전기적 상을 전자기적으로 유도해 방향을 조정한 후 고정되어 있는 작은 구멍으로 통과시키면 그 뒤에 배치된 양극으로 광전자가 입사해 전기 신호(영상 신호)로 바뀐다. 구멍을 통과한 영역의 광신호가 일종의 화소 신호가 되는 것이다. 전자기적으로 유도된 전체 상의 신호 중 구멍을 통과해 지나가는 극히 좁은 면적의 전자만 스캔되므로 전기적 상의 이용 효율이 매우 낮고 잡음이 큰 문제가 있었지만, 이 기술은 송신부와 수신부 모두 전자식으로 구성된 최초의 “전체 전자식 TV” 시스템이었다. 1928년 자신의 TV 시스템을 최초로 공개한 판즈워스는 이로 인해 대중적 주목을 받았고 투자자를 모아 회사를 설립하며 상용화에 나선다.

하지만 판즈워스의 영상 분석기는 전자빔을 집속할 방법이 포함되지 않아서 피사체가 매우 밝게 비춰져야만 겨우 전송가능한 정도의 영상 신호를 얻을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판즈워스는 미약한 신호를 증폭할 수 있는 전자 증배관을 개발, 카메라 튜브의 감도를 높이는 등 성능을 개선하기 위한 작업을 이어갔지만, 판즈워스의 경쟁자였던 즈보리킨이 개발한 아이코노스코프iconoscope 와의 경쟁에서 뒤진다. 초기 카메라 튜브의 주류가 된 아이코노스코프의 디자인에선, 판즈워스의 디자인에선 보이지 않던 전자빔을 이용해 스캔한다는 개념이 들어갔다. 최초의 디자인에서는 산화알루미늄의 한쪽에는 금속막이, 반대편에는 광전 효과를 갖는 광감응 물질이 코팅된 신호판signal plate 이 사용됐다. 피사체의 상이 광감응 물질의 코팅막에 맺히면 상의 위치별 밝기에 의해 광전자의 생성량이 달라지는데, 이를 전자빔으로 스캔할 경우 전기적 반발력으로 인해 밀려나는 위치별 광전자가 회로를 따라 흘러가며 영상 신호를 형성한다.

CRT 방식으로 송신기와 수신기를 구성하기 위해선 우선 신호판과 형광 스크린을 스캔할 전자빔을 효과적으로 집속할 전자총 기술이 필요했고 다음으로 신호판이나 형광 스크린 자체를 화소로 분할해 해상도를 높이는 기술도 요구됐다. 즈보리킨은 1928년 유럽을 방문해 당시 독일에서 개발되고 있던 전자빔 집속 장치, 특히 빛을 모으는 광학 렌즈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전기장 방식의 집속 장치를 접하고 이를 미국으로 들여와 연구함으로써 향후 CRT 기술의 핵심 부품을 완성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화면의 세밀함, 즉 해상도는 광감응 신호판 혹은 형광 스크린을 때리는 전자빔의 단면적에 의해 좌우되었기에 더 작은 면적으로 집속되는 전자총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가 유럽에서 들여와 개발한 정전 방식의 전자총은 이후 그가 일했던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 사의 제품들에 채택되었다.7 화면의 감도를 높이기 위한 화면 분할의 개념도 후일 즈보리킨이 제안한, 개선된 아이코노스코프의 신호판에 반영되었다.

[그림 2] 즈보리킨이 개발한 초기 아이코노스코프의 디자인 중 하나(왼쪽), 그리고 자신의 개발품을 들고 있는 즈보리킨의 모습(오른쪽). @public domain

판즈워스의 영상 분석기에는 하나의 광감응 셀이 사용되었지만 아이코노스코프의 경우 모자이크 식으로 구분되어 정렬된 광감응 셀들이 포함되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각 셀(화소)이 금속과 금속 사이에 놓여 일종의 전하 저장 소자인 축전기를 형성했다는 점이다. 전하 저장 소자를 카메라 튜브에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1920년대 초반 헝가리 공학자 칼만 티하니Kálmán Tihanyi, 1897-1947 에 의해 제안되고 특허로 출원되었다. 이런 전하 저장 방식은 CRT의 전자총에 의한 스캔과 결합하며 카메라 튜브의 감도를 크게 높였다. 아이코노스코프의 초기 디자인 중 하나를 [그림 2]로 살펴보자. 오른쪽 신호판의 우측엔 금속 전극이, 왼쪽에는 광감응 물질 알갱이를 은으로 코팅한 배열이 자리잡고 있고 그 사이는 운모mica 와 같은 절연막이 있다. 렌즈를 거친 광학적 상이 신호판에 맺히면 각 셀별로 빛의 세기에 비례하는 광전자가 방출되며 이를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빔으로 스캔하는 방식이다. 빛의 세기에 비례해 광전자가 방출되면서 각 셀은 양으로 대전되기 때문에, 양전하의 분포가 바로 피사체의 정보를 반영한다. 여기에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빔의 방향이 편향코일에 의해 조정되며 셀을 스캔해 전자를 보충한다. 이 전하량의 변화가 셀별 축전기의 전하 변화를 일으키고 이는 영상 신호에 해당하는 전류로 바뀐다. 경우에 따라서는 광학적 상의 정보를 셀별 음의 전하 분포로 저장한 후 이를 전자빔으로 스캔하기도 한다. 이 경우 전자-전자 사이의 반발력으로 반사되는 전자빔을 순차적으로 모아 그 세기를 영상 신호로 전송한다.8

카메라 튜브에 비해 CRT 수신기, 즉 시청자가 즐기는 디스플레이 기술은 개발 속도가 빨랐다. 전자총이 발사하는 전자빔의 세기를 조절하는 방식, 열음극의 사용, 전자 집속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특허가 1920년대 제안되고 실험된다. 1926년 일본 TV의 아버지라 불리는 켄지로 타카야나기Kenjiro Takayanagi, 1899-1990 가 40줄의 주사선을 갖는 CRT TV를 선보였고[그림 3] 이는 곧 100줄의 해상도로 개선되었다. 비슷한 시기 판즈워스도 CRT 수신기 모델을 개발해 제시했다. CRT란 이름은 즈보리킨이 명명했고 RCA가 상표 권리를 갖고 있었지만 1950년 일반 용어로 사회에 환원되었다. [그림 4]에 제시된 CRT 수신기의 구조는 기본적인 구성의 면에서 [그림 1]의 브라운관과 비슷하다.

[그림 4] CRT 디스플레이의 기본 구조 @CC BY-SA 3.0 (Theresa Knott)

전자총 내 히터로 가열된 음극의 산화물에서 방출된 열전자는 집속 코일을 통해 모인 후 편향코일로 방향이 조정된 상태로 형광 스크린에 부딪힌다. 형광 스크린에 화소 단위로 형성된 형광물질은 전자의 운동에너지를 가시광선 에너지로 변환하며 영상 정보를 화면에 표시한다. 하지만 이런 비교적 간단한 원리와는 다르게 CRT TV의 개발과 진화는 여러 기술적 난관을 헤쳐가는 과정이었다. CRT 기술이 송신기와 수신기에 모두 성공적으로 적용된 후 나라별로 시험 방송을 거친 각국은 본격적인 TV 방송의 시대를 연다. 가령 미국의 경우 1939년 RCA의 자회사인 NBC 방송이 뉴욕 월드페어에서 개막연설을 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모습을 생중계하는 등 RCA가 주도하는 본격적인 상업 방송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그림 5]. 하지만 이차세계대전의 발발은 TV의 본격적 보급을 가로막았다. TV 산업의 진정한 개화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시작되었다. 본 글의 마지막 절에서는 현대적 CRT 디스플레이의 특징과 진화 과정을 기술적 관점으로 국한해서 다룬다.


CRT형 디스플레이의 발전과 특징, 그리고 쇠퇴

40대와 그 이후의 기성세대들은 어린 시절 흑백 TV의 추억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소형 모니터 크기의 다소 볼록한 화면을 지닌 배불뚝이 TV는 거실 한 면의 중앙을 차지하며 온 가족의 사랑을 받았다. 그 시절 신문 지면에 실린 TV 프로그램 편성표는 가족 구성원 모두의 보물섬이었고 단 하나의 TV 수상기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시청에 성공했던 만화 영화의 장면들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게다가 1980년대 초반의 한국은 흑백의 영상이 컬러로 바뀌는 드라마틱한 경험을 선사한 시기였다. 오늘날이야 대각선이 60-90인치에 달하는 거대하고 얇은 벽걸이 TV가 보편화되었지만 20세기의 TV는 한마디로 CRT 기술이 장악하고 있었다. CRT의 기술적 흐름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20세기 중반 흑백단색 CRT에서 컬러 CRT 시대로 바뀌는 혁명적 변신이 이뤄지며 컬러 방송의 시대가 열렸고 1980년대를 지나며 평면 CRT, 슬림 CRT로 진화해 왔다. 하지만 대면적, 고해상도의 디스플레이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과정에서 평판형 디스플레이와의 경쟁에서 뒤쳐지며 21세기 초 CRT는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림 6] 엘지에서 판매했던 14인치 CRT의 후면 구조(왼쪽, @CC BY-SA 3.0/Blue tooth7 – Own work) 및 컬러 CRT의 작동원리를 보여주는 개략도(오른쪽, @CC BY-SA 3.0/ Søren Peo Pedersen – Own work).

[그림 6]은 14인치 컬러 CRT의 사진왼쪽과 내부 구조의 개략도오른쪽를 보여주고 있다. 단색 CRT가 한 대의 전자총을 구비하는데 비해 컬러 CRT는 화소를 이루는 적록청RGB 부화소subpixel 에 각각 대응하는 세 대의 전자총을 장착한다. 음극 속 히터로 가열된 산화물에서 방출되는 열전자는 집속 렌즈를 거쳐 좁은 빔으로 탈바꿈한 후 양극에 걸린 고전압으로 가속되어 형광 스크린에 부딪힌다. 음극 표면에는 일함수가 낮은 금속산화물이 코팅된다. 산화바륨BaO 이 대표적인 예다. 집속 코일을 전자식 렌즈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현미경이나 망원경에서 볼 수 있는 유리로 만든 투명한 렌즈가 아니다. CRT 속 집속 렌즈는 전기장 혹은 자기장을 전자빔에 가해 전자기력을 줌으로써 전자빔의 크기를 줄이는 역할을 담당한다. 집속 렌즈를 거쳐 좁아진 전자빔은 음극과 양극 사이에 걸린 고전압으로 가속되고 두 개의 편향 코일편향 요크라고도 한다이 만드는 자기장으로 방향이 조절되며 형광 스크린을 향한다. 전자빔은 형광 스크린의 왼쪽 위에서 출발해 오른쪽 아래까지 형광체 화소를 스캔해야 하므로 빔을 수평과 수직으로 정밀하게 움직일 편향 코일이 두 개 필요하다. 결국 전자빔 속 전자의 속도를 v, 전하량을 q라 할 때 전자는 전기장 E와 자기장 B를 느끼며 F = q∙(E + v×B)로 표현되는 로렌츠 힘을 받아 정밀하게 조정되고 가속되는 것이다. 스크린의 형광체를 때릴 때 충분이 높은 운동에너지가 필요하므로9 양극에서 음극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고, 전자빔의 궤적을 방해하는 기체가 없도록 CRT 유리 내부는 고진공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CRT 디스플레이는 기본적으로 부피가 크고 무겁다는 숙명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화면으로 볼 수 있는 45인치 급 CRT TV는 질량이 대략 200킬로그램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그림 7] 선형(in-line) 형광체 화소(왼쪽) 및 델타형 배치의 형광체 화소(가운데)를 확대한 사진. @CC BY-SA 2.5 / w:User:Planemad – Own work. 오른쪽은 전형적인 컬러 CRT의 스펙트럼으로 세 부화소의 색상을 나타낸다. @ CC BY-SA 3.0 / Deglr6328 – Own work.

컬러 CRT의 형광 스크린에 형성되는 형광체 화소는 적록청 등 빛의 삼원색을 내는 부화소들로 구성된다. 디스플레이와 조명 기술에서 형광체는 약방의 감초 격으로 자주 사용되는 발광물질이다. 고에너지 광자를 흡수해 발광하는 광발광photoluminescence, 전류 주입에 의해 발광하는 전계발광electroluminescence 원리가 디스플레이용 형광체의 발광에 많이 사용되지만 CRT용 형광체는 고속의 전자빔이 가진 운동에너지를 빛으로 변환하는 음극선 발광cathodoluminescence 으로 분류된다. 지난 시기 CRT의 밝기가 20배 이상 증가한 이유의 상당 부분은 고효율 형광체의 개발과 적용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림 7]에 선형 혹은 델타형으로 배열된 형광체 화소들을 볼 수 있다. 세 개의 전자총은 각각 삼원색에 대응된다. [그림 7]의 오른쪽에 전형적인 컬러 CRT의 발광 스펙트럼이 제시되어 있다. 세 부화소가 내는 삼원색 스펙트럼은 해당 CRT가 구현할 수 있는 색상의 범위, 즉 색역color gamut 을 결정한다.

세 대의 전자총에서 출발한 전자빔이 각 부화소에 깨끗이 입사되면 좋겠지만 음극의 온도가 변해 전자빔의 방출 분포가 바뀌거나 집속 렌즈의 구면 수차aberration 가 발생하거나 전자-전자 사이의 반발력으로 인해 빔이 커지면 형광체 부화소에 정확히 부딪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형광 스크린 앞에 각 화소에 대응되는 위치에 미세한 구멍이 뚫려 있는 섀도우마스크가 도입되었다. 세 전자총에서 방출된 빔은 목표 화소 앞에 위치한 하나의 구멍을 통과해 RGB 부화소에 각각 부딪힌다. 하나의 구멍을 이용하기 위해선 [그림 8]과 같이 전자총이 약간의 각도를 갖고 기울어져야 한다. 전자총의 배치 구도는 RGB 형광체 부화소의 패턴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CRT 디스플레이가 개화하기 위해선 신뢰성 있는 열음극과 집속 렌즈 등을 포함하는 정교한 전자총 기술, 전자빔의 미세한 방향 조절을 위한 편향 요크를 포함한 전자 부품의 개발과 정교화, 높은 발광효율을 지닌 형광체의 개발 등 다양한 요소 기술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게다가 내외부 압력 차이에 따른 내파 방지나 고속 전자빔이 만드는 엑스선의 차폐, 지구의 자기장이 전자빔에 미치는 영향의 방지 등 안전과 품질 면에서 극복해야 할 기술적 이슈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RT의 기본 구조와 작동 원리는 19세기 말 탄생한 브라운관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고 이를 끊임없이 개선함으로써 현대적 CRT 기술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가정용 TV와 사무실의 모니터, 대형 프로젝터형 CRT에 이르기까지 20세기는 CRT의 전성시대였다. 게다가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의 평판화, 40인치 대 중반에 이르는 대면적화, 두께를 줄이는 슬림화, HDhigh definition 급을 넘어서는 고해상도를 추구하며 지속적인 화질 개선과 형상 요소form factor 의 혁신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등장한 평판형 디스플레이와의 경쟁에 있어 CRT는 기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CRT 기술의 본질적 속성에서 비롯되는 대형화와 박형화의 근본적 한계가 CRT의 발목을 잡게 된다.

21세기 초는 떠오르는 평판형 디스플레이 기술에 대항해 CRT 기술 진영의 마지막 반격이 시도되던 시기다. 기존 CRT 디스플레이의 슬림화, 대면적화에 더해 새로운 방식의 CRT를 시도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비장의 카드는 바로 전계방출 디스플레이Field Emission Display, FED 였다. FED는 반도체 공정 등을 활용해 미세 전자총을 부화소별로 만들고 여기에 고전압을 가해 전자를 방출, 형광체를 여기하도록 디자인된 디스플레이로서 ‘진공 미소전자공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 9]는 FED의 개략도를 보여 준다. 기판 위에 형성되는 수많은 전자 방출 이미터emitter, 즉 미세 전자총은 보통 금속이나 탄소나노튜브 등을 이용해 형성한다. 이미터 전극과 추출 그리드 사이에 걸리는 전압에 의해 이미터에서 전자가 방출되면 투명 전극에 걸린 더 높은 전압으로 인해 가속되며 전면의 형광체에 입사되어 발광되는 방식이다. 화소별로 전자총이 달려 있는 셈이므로 전자빔으로 화소를 스캔할 필요도 없고 두께가 약 1 mm에 불과해 LCDliquid crystal display나 PDPplasma display panel 와 같은 평판형 디스플레이에 대항할 형태를 갖춘 셈이다. 그러나 장기 구동이 가능한 미세 전자총의 신뢰성 확보라든가 전자 방출의 균일성 등 여러 기술적 이슈와 더불어 이미 상용화에 성공해 시장을 장악한 LCD 등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부담 등의 외적 환경으로 인해 결국 상용화 제품으로 탄생하지는 못했다.

[그림 9] 전계방출 디스플레이의 개략도. 수많은 미세 전자총에 걸린 높은 전기장으로 방출된 전자가 화소의 형광체에 부딪혀 발광시키는 방식으로 평판형 디스플레이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10

글을 마치며

20세기 전반부, TV 기술의 탄생을 통해 인류는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을 실시간으로 생생히 볼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CRT는 TV 기술의 핵심을 이루면서 본격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엔터테인먼트의 시대를 열어젖혔고 이를 통해 인류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CRT는 화면의 화소에서 직접 빛이 만들어져 방출되는 자발광 방식으로 인해 뛰어난 화질을 자랑했다. 밝기와 색상, 해상도의 개선으로 성취된 CRT의 화질은 21세기 초 떠오르던 LCD나 PDP와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었고 오히려 화질로만 평가하자면 더 우수한 측면이 많은 디스플레이였다.

필자는 과거 회사에서 디스플레이 부품을 개발하던 때, LCD의 극복 대상이었던 CRT를 공부하며 종종 그 내부가 작동되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가령 XGA가로 1024개, 세로 768개의 화소 해상도의 스크린을 가진 CRT 내부를 보자면, 스크린 위에 한 프레임한 장면 을 구현하기 위해 세 대의 전자총이 1280개의 화소로 구성된 주사선을 순차적으로 내려오며 부지런히 720번의 스캔을 하는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영상신호가 입력되는 각 전자총에서 발사된 전자빔이 유리로 밀봉된 고진공의 공간을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전자기력의 세심한 지휘 하에 약 80만 개의 화소를 단 60분의 1초 동안 정확히 두들기며 지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동작이 단 60분의 1초 동안 이루어져야 통상 60 Hz인 TV의 프레임 수를 만족시킨다. CRT 디스플레이가 영상을 연출하는 장면을 경기장의 카드섹션 쇼에 비유하자면 786,432명의 사람이 각자 빨강, 녹색, 파란색 카드섹션 3종 세트를 들고 서서 1초에 60번씩 자신에게 부여된 색상의 조합을 들며 연출하는 쇼와도 같다.

이제 CRT의 시대는 완전히 저물었다. 기성세대의 기억 속에나 남아 있는 즐거운 추억의 잔향 정도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혹은 일부 농촌 지역이나 개발도상국의 가정집에서 아직도 자신의 존재감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내는 CRT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CRT는 인류의 문화사, 정보통신의 역사 속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인류의 자산이다. CRT는 20세기에 전 세계 곳곳을 실시간으로 묶어내며 ‘지구촌’을 글자 그대로 실현하는데 크게 기여한 핵심적인 전자 소자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게다가 CRT와 FED 기술은 전형적인 진공 공학의 일부로 휴대형 엑스선 장비나 다양한 진공 소자 등 여러 진공 기술에 활용되고 있다.

CRT가 차지했던 위치는 이제 평판형 디스플레이가 이어받았다. 21세기의 시대는 벽걸이 TV로 상징되는 박형 디스플레이, 언제 어디서나 접할 수 있도록 유비쿼터스 환경에 대응되는 디스플레이, 다양한 형상 요소를 가진 디스플레이를 거쳐 가상현실,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기술로 진화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대표적인 평판형 디스플레이가 태동하는 상황부터 출발해 각 디스플레이별 구현 원리와 특징, 그리고 앞으로 디스플레이가 진화해 나갈 방향에 대해 다루려 한다.

참고문헌

[1] R. W. Burns, [Television, an international history of the formative years] (The Institution of Engineering and Technology, 1998).
[2] [디스플레이 이야기 1] (주병권 지음, 열린책빵).
[3] [Handbook of Visual Display Technology] Vol.2 (Edited by J. Chen 외, Springer).
[4] [Display Systems] (Edited by L. W. MacDonald 외, Wiley).
[5] [전자 디스플레이] (마츠모토 쇼이치 외, 성안당).
[6] [정보디스플레이 소자의 기초 및 응용] (서대식 지음, 숭실대학교 출판부).
[7] 주병권, “전자 디스플레이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인포메이션디스플레이 25권 41쪽 (2024).
[8] A. A. Campbell Swinton, “Distant Electric Vision”, Nature 78, 151 (1908).
[9] A. A. Campbell Swinton, “Electric Television”, Nature 118, 590 (1926).
[10] J. D. McGee, “Campbell Swinton and Television”, Nature 138, 674 (1936).


연재글

정보전달의 총아(1): 디스플레이 기술의 개화

고재현
한림대학교 반도체 ∙ 디스플레이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