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역사란 무엇인가?

문명civilization은 여러 의미로 쓰인다. 애초에 문명은 야만과 대조하여 유럽과 비유럽을 차별하는 의도가 담긴 용어였다. 때로는 문화culture와 대비하여 정신적 가치적 소산을 문화, 물질적 기술적 소산을 문명이라 하기도 한다. 역사학에서는 아놀드 토인비가 국가보다는 크고 세계보다는 작은 중간적 범위의 역사 공동체라는 의미로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등과 같은 지칭에 썼다.문명은 국가, 제도, 사회적 계층, 도시, 문자 등으로 특징되는 복잡 사회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문명의 역사에서 문명은 이 의미로 썼다.

문명의 역사는 고도로 조직된 대규모 인간 사회가 형성되고 진화해 온 과정을 담은 서사다. 인류는 행동 양식의 변화를 통해 빙하기에 적응하며 생존과 번식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뇌 용량이 커지고 집단 협력을 고도화한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고, 인지 혁명을 통해 정교한 학습 능력, 상징적 사고, 고도의 사회성을 갖춰 문화를 축적하게 됨으로써 집단 협력의 규모와 유연성에서 도약이 일어났다. 12,000년 전쯤 현재의 간빙기가 도래하자 지리적 여건이 갖춰진 일부 지역에서 인류는 정주와 농경을 시작하면서 인구가 빠르게 증가했고, 그 결과로 심화한 집단 간의 경쟁은 규모가 커지고 분업화를 통한 고도의 조직화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인간 사회의 진화를 이끌었다. 인간 사회의 진화는 여러 지리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됐고, 그 결과 다양한 규모와 구조의 사회가 등장해서 서로 경쟁하게 됐다. 작은 촌락에서 시작해서 규모가 커진 마을이 형성됐고, 공통 조상으로 연결된 씨족 사회와 여러 씨족 사회의 연맹인 부족 사회가 등장했다.

문명의 시작으로 간주 되는 고대 도시국가는 5,500년 전쯤에 최초로 출현했는데, 그 이후 국가로 대표되는 고도로 조직된 대규모 사회가 역사의 주도적인 주체가 됐다. 그 구조와 기능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음에도 국가가 역사를 주도하는 상황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국가의 출현은 문명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출현한 지역과 시기에 따라 고대 국가의 모습은 다양성을 보이지만 도시, 군주, 군대, 제도, 종교, 문자 등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가진 국가 형태가 자주 등장했는데, 이는 이런 특징들이 집단의 경쟁력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대 국가 체제는 최초의 발생지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서로 간의 치열한 경쟁을 거쳐 여러 도시국가를 통일한 초기 제국이 출현했다. 경쟁에서 밀려 문명 지역의 변방에 자리한 초원 지역으로 이주한 집단은 유목 부족을 형성했다가 점차 유목 국가로 발전했다. 변방에 남아 있던 수렵채집 집단은 더 척박한 지역으로 밀려나며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정주농업 국가와 유목 국가의 경쟁과 흥망성쇠는 오랫동안 역사 전개의 중심축이 됐으며 문명의 중심 지역이 두 영역의 경계를 따라 계속해서 이동하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문명화된 지역이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장거리 교역의 증가와 더불어 기술의 발명과 전파를 통한 집단 협력의 지리적 규모도 같이 커졌다. 말의 가축화와 바퀴의 발명으로 이동 수단의 혁신이 일어나 원거리 교역과 정벌이 가능해짐으로써 거대 제국이 등장했고, 그 결과 문명 지역의 지리적 확장과 여러 문화의 혼합으로 문명의 역사는 한층 복잡해졌다. 하지만 문명의 역사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흐름도 나타나는데, 인간 사회가 조직화하는 과정에 작용했던 주요 요인들을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다.

문명의 역사에 초석을 놓은 것은 농업이었다. 농업을 통해 여분 식량이 생산되자 사회의 진화 방향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생명의 역사에서 광합성에 의한 여분 에너지 공급이 포식 전략의 확산과 복잡한 조직을 갖춘 진핵세포의 등장으로 이어진 결과에 비교된다. 정주와 농업으로 토지의 중요성이 커졌고 토지와 식량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격화됐다. 곧 그 경쟁은 개인 간을 넘어 집단 간 경쟁 차원으로 발전했다. 집단 간 경쟁에는 충분한 인구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투에 전문화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집단이 유리했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내부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도 커지기 마련인데, 문화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사회적 제도를 갖춤으로써 안정성을 유지해야만 집단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작용함으로써 인간 사회는 규모가 커지고 조직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집단 간의 경쟁, 특히 국가 간의 조직적인 전쟁은 인간 사회의 진화에서 주도적인 동력으로 작용했다. 여분 식량은 집단 간 경쟁을 위한 군대와 내부 질서를 위한 관료의 유지뿐만 아니라 상품의 생산과 교역의 증가를 불러왔다. 이에 따라 장인과 상인 등의 전문가 집단이 생겨나 분업화가 이루어졌고 상품의 교역으로 형성된 시장과 경제가 사회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 시작했다. 경제의 규모는 계속 커졌고, 점차로 경제 전쟁은 군사 전쟁 못지않게 중요한 역사의 동력이 됐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정주농업 사회로의 전환에는 개인의 지위 면에서 평등 사회에서 불평등 사회로의 전이도 따라왔다. 사냥한 고기는 보관이 어려워 서로 나눠 먹었지만, 길들인 가축과 곡물은 저장할 수 있어서 개인의 능력에 따른 부와 명예의 축적이 가능해졌다. 사유 토지와 재산의 인정은 개인 간의 불평등을 발생시켰고 서서히 집단 내부에 부와 명예에 따른 계급의 분화와 계층의 형성을 가져왔다. 불평등 사회로의 전이에 대한 다수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집단 간 경쟁이라는 외부적인 압력, 부와 권력을 확장하려는 지배층의 욕망, 이에서 비롯된 집단 간의 정복과 합병은 개인 차원을 넘어 집단 간 불평등을 만들었고 사회적 계급과 계층이 자손에게 세습되어 고착되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국가 체제가 등장하자 불평등은 제도적으로 고착돼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근대 이후 세습적 계급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부의 불평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여분 식량(에너지)의 공급은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지만, 이를 어떻게 분배하는가는 중대한 사회적 문제였고 사회 변화의 커다란 요인이었다. 분배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사회적 과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인류가 집단을 이루는 데는 유대감 형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떤 종류의 유대감이 작용했는지는 집단의 규모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집단이 소규모였을 때는 가족, 혈연 같은 생물학적 유대감과 주술적 의식이나 통과의례 같은 공동 경험(기억)이 작용했지만,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서 토템, 신화, 종교 등의 사회적으로 학습된 문화적 유대감으로 전환됐다. 문화적 유대감의 형성에는 인간이 인지 혁명을 통해 획득한 상징적 사고,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모형을 만드는 능력, 그리고 그 결과로 생산된 허구까지 믿는 능력(부작용?)이 작용했다. 그 결과 씨족과 부족 집단은 물론 고대 국가의 형성과 유지에도 상징과 신화를 바탕으로 한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종교는 집단 간 경쟁에서 결속력을 높이는 유대감의 형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제도와 계급, 지배-피지배 관계와 불평등의 수용을 통한 사회적 질서 유지에도 작용했다. 근대에 이르러 과학혁명이 일어나면서 종교적 유대감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이념적 유대감으로 대치되기 시작했다.

사회의 진화는 많은 요소가 서로 되먹임으로 얽혀있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예를 들면, 집단 학습을 하고 문화를 축적하는 인간의 능력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 결과 국가를 조직화하고 시민을 통치하는 방법도 이전 세대로부터 축적된 경험을 반영해 꾸준히 진화했다. 새롭게 시도된 효율적인 체제를 갖춘 신흥 국가가 낡은 체제의 국가를 도태시켰다. 거기에 더해서 기술과 지식의 축적은 사회의 구조적 변화와 더불어 인간의 행동 양식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인간 사회는 구성원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농업이 경제의 주요 기반인 농업 사회에서 제조업 중심의 산업 사회를 거쳐 서비스업과 정보산업 중심의 현대 사회로 전환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행동은 생존과 번식 중심에서 벗어나 엄청난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게 됐지만, 동시에 개인이 속한 사회의 문화가 행동 양식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게 됐다. 하지만 각 사회는 문명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르게 전개해 온 사회 진화가 만들어낸 다양한 모습의 사회 중의 하나일 뿐이다. 각자가 속한 사회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는지, 다른 과정을 거쳐온 사회는 무엇이 다른지, 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를 염두에 두고 사회 진화의 전반적인 여정을 살펴보면 문명의 역사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인류, 정주와 농업을 시작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20(~30)만 년 전에 출현한 이래로 작은 규모의 집단을 이루어 수렵과 채집 자원을 쫓아서 이동하는 수렵채집 사회를 유지해 왔는데, 12,000년 전 무렵부터 몇몇 지역에서 한 곳에 정주하며 농업을 하는 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정주농업 사회는 수렵채집 사회를 밀어내고 점차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정주농업 사회로의 전이는 왜 일어났을까? 정착과 농업 중 어느 쪽이 먼저 시작됐는지는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는데, 최근에는 정착이 먼저 시작됐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수렵채집 자원이 풍부한 곳에서 농업이 시작되기 전에 정착 생활이 시작됐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다수 발견됐기 때문이다. 최초의 정착 문화는 15,000~11,500년 전에 레반트 지역에 있었던 나투피안Natufian 문화로4, 이 지역에서 12,000년 전쯤 농업도 최초로 시작됐다. 11,500~10,000년 전쯤 형성된 튀르키예의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의 유적은 농업이 시작되기 전에 형성된 사원 형태의 집단 정착 주거지로 이 시기에 이미 종교 기반의 사회적 연결망이 형성돼 있음을 보여준다. 특정 지역들에서 시기를 달리하며 서로 독립적으로 정착과 농업이 시작됐는데, 이에 대한 주요 요인으로는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수렵채집으로 부양할 수 있는 인구밀도의 한계에 도달했음을 들 수 있다.5

일정 면적의 토지에서 수렵채집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구에는 (지리적인 조건에 의존하는) 한계가 있으며, 지구 전체로는 그 한계가 수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간빙기가 되면서 조건이 좋은 지역에서는 인구가 더 빠르게 증가했고 수렵채집 인구의 한계에 더 일찍 도달했을 것이다. 한정된 토지를 두고 집단 간 경쟁이 잦아지면 이동 대신 정주를 하며 농업을 시도하는 집단이 생겨나고, 정주농업 집단이 수렵채집 집단보다 경쟁력의 우위를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정착 생활은 여성의 출산 주기를 줄여서 인구 증가가 빨라지고,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서 수렵채집에서 농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했을 것이다. 농업을 갑자기 시작했기보다는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소규모 농업이 이미 식량 일부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정착 생활이 계속되면서 농업 기술이 축적되자 본격적인 농업을 시도했고, 인간의 향상된 예측 능력과 간빙기의 안정된 기후가 맞아떨어져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최초의 농업이 시작된 요인으로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건조한 기후가 거론된다. 6


이 시기에 계속되는 가뭄으로 야생 곡물이 건조한 기후에 더 적합한 다른 식물들로 대체되자 인류가 생존을 위해 이들을 제거하고 야생 곡물을 심으면서 농업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농업의 시작도 행동 적응을 통해 시련을 극복해 온 인류 역사의 연장선에 있음이다. 정착과 농업과 인구 증가는 서로 양의 되먹임 작용이 있고, 정착과 농업을 선택함으로써 늘어난 인구는 집단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기에 수렵채집 한계 인구를 넘어서는 상황에서 정주농업 집단이 주류가 됨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인구 증가로 수렵채집이라는 단순한 기술을 통해 부양할 수 있는 인구의 한계에 도달했고, 농업은 생존을 위한 선택의 하나였는데, 농업을 선택한 집단이 생존과 번식에서 우위에 올라 살아남았음은 집단 간 경쟁이 불러온 문화적 집단 선택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농업은 약 2,000년에서 8,000년 사이의 시차를 두고 전 세계의 7개 이상의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 [그림 1].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12,000~11,000년 전 사이에 최초로 농업이 시작됐으며, 양쯔-황허 유역에서 9,000년 전, 뉴기니 고지대에서 9,000~6,000년 전 사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5,000~4,000년 전 사이, 중앙 멕시코에서 5,000~4,000년 전 사이, 남아메리카 서부에서 5,000~4,000년 전 사이,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4,000~3,000년 전 사이에 시작됐다. 농업의 왜 특정 지역들에서 발생했고 시기가 서로 다른지는 농업의 발생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이 있고, 농업의 필요성과 직결되는 인구 증가 양상이 지역마다 달랐기 때문으로 본다.지역에 따라 길들일 수 있는 동물과 식물은 한정돼 있고, 쉽게 길들일 수 있는 곡물(밀, 보리, 쌀, 수수, 콩, 옥수수 등)과 가축(개, 고양이, 양, 염소, 소, 돼지, 말, 낙타, 당나귀, 라마, 순록, 물소, 야크 등)이 다양한 중위도 지역에서 농업이 먼저 시작됐다.지리적 환경의 차이와 인류의 진출 시기에 따른 인구의 차이는 농업이 발생하는 지역과 그 시기의 차이를 만들었고, 이어서 문명이 발생하는 지역과 그 시기의 차이까지 영향을 끼쳤다. 농업이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양상도 주목할 만하다. 위도가 같은 동서(가로축) 방향으로는 기후가 비슷해서 농업의 전파가 쉽지만, 남북 (세로축) 방향으로는 기후가 달라서 전파가 어렵다. 동서로 긴 축이 있는 유라시아 대륙은 농업의 지리적 확산이 빨랐고, 남북으로 긴 축이 있는 아메리카 대륙은 상대적으로 더뎠다. DNA와 언어의 확산 경로를 추적해 보면 농업의 지리적 확산은 농업 기술의 (문화적) 전파보다는 주로 정주농업 집단이 (수렵채집 집단과의 경쟁에 이겨서) 정복과 이주를 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이는 문화가 다른 집단 간 경쟁의 한 양상을 보여주며, 그 이면에는 소위 ‘농업의 역설’이 숨어 있다. 개인의 관점에서는 농업을 선택함으로써 노동 시간은 늘어났고 음식의 질(다양성)과 영양 상태는 나빠졌다는 다수의 증거가 있다. 더군다나 여분 식량의 생산과 인구의 증가로 개인 간의 불평등이 발생했고 다수의 개인은 피지배층으로 떨어졌다. 농업의 선택이 다수의 개인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지만, 집단으로서는 인구가 늘고 경쟁에서 유리하게 작용했기에 정주농업 사회는 수렵채집 사회를 밀어내고 주류가 될 수 있었다.

인류와 문명의 역사에서 농업의 시작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는데, 이는 농업이 여분 식량을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렵채집 생활은 사냥한 고기나 채집한 곡물을 장기적으로 저장할 방법이 없기에 생존에 필요한 양 이상을 획득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 정주농업은 긴 주기로 이루어졌고 길들인 가축과 수확한 곡물은 장기간 저장이 가능했다. 수렵채집보다 노동력을 더 투자하면 생존에 필요한 양 이상의 생산이 가능했고, 농업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했다. 여분 식량(에너지)의 공급은 일부의 사람들에게 상품 생산과 판매 등 농업 이외의 전문적인 노동으로 생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여분 식량의 공급이 늘면서 교역의 확장과 시장의 형성, 이를 위한 다양한 상품의 생산으로 이어졌고, 상품의 생산과 순환은 인간 사회에 경제라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었다. 그 결과로 다양한 전문적인 직업이 출현했으며, 인간의 행동이 생존과 번식 중심에서 벗어나 훨씬 다양해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도구와 기술의 발전으로도 이어져 석기는 더욱 정교해졌으며 다양한 도구와 토기가 제작됐다. 그래서 농업이 시작된 시기는 구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와 일치하며, 그런 맥락에서 농업의 시작을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른다. 지구 생태계 차원에서 보면 농업의 시작은 인류에 의한 생태계 에너지 독점의 출발점이었다. 인구 증가와 더불어 농사를 짓기 위한 토지가 늘어났고, 그만큼 다른 종들이 서식할 토지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인류가 직접적으로 지구의 모습을 바꾸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농업은 인간과 길들어진 동식물의 상호 길들이기를 통한 공진화 과정이었다. 곡물과 가축은 인간에게 종속됐고, 인간은 농업에 종속됐다. 인간은 선택적 길들이기를 통해 농업에 적합하도록 동식물의 형질 변화를 만들었으며, 그 결과 길들어진 종 대부분이 인간의 도움 없이는 번식할 수 없게 됐지만, 역설적으로 인간과 더불어 가장 번성하는 종이 됐다.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수렵채집 대신 농업에 적응하면서 유순해지고 뇌 용량이 줄었지만, 자연에 대한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서서 심화한 이해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곡물과 가축 길들이기를 비롯한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적 실험을 시작했고, 곡물의 파종과 수확을 위해 기후와 계절의 변화를 파악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연관된 지리와 천문에 대한 세심한 관찰로 이어졌다.


인류, 문명을 열다.

농업의 확산과 더불어 기술이 축적되고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인류의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전 세계 인구는 10,000년 전쯤에 600만 명 정도였지만 5,000년 전쯤에는 5,000만 명으로 늘었다. 이 기간에 일어난 주목할 변화는 농업이 발생하거나 전파된 지역에서 인구가 밀집된 대규모 집단 거주지가 등장하고, 그렇게 형성된 사회는 점차 분업화가 진행되며 조직화했다는 점이다. 환경이 좋은 농업 지역에는 인구가 수백 명인 마을에서부터 수천 명에 이르는 도시가 형성됐다. 9

인구 구성에서도 혈연 중심의 씨족 집단에서 씨족 집단의 연합체인 부족 집단을 넘어 점차로 다양한 집단이 혼합된 정치-경제 공동체가 출현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는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고 서로 상품을 교환하는 데 유리했고, 경제의 규모가 커짐으로써 공동 분담을 통해 성벽이나 관개 등 대규모 공공사업을 함으로써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규모가 커진 사회에서는 부와 명예의 축적을 통해서 정치 지도자(족장)의 위치에 오르는 사람이 생겼고, 자신의 부와 명예를 확장하려는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상인을 육성해 교역을 늘리거나 군사를 조직해 이웃 집단을 정복해 나갔다. 내부적인 불평등 심화와 외부적인 이웃 집단 정복을 통해 피지배층이 늘면서 점자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뉘며 세습 계급이 형성됐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갈등은 집단의 결속력을 약화하는 요인이었다.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집단 간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집단의 결속력을 다져서 공공사업과 조직적인 전쟁을 잘 이끌 수 있는 정치와 종교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지배층은 세금과 노동력을 부담하는 피지배층의 저항에 설득과 무력으로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야 했으며, 신화와 종교를 활용해서 자신들이 지배를 정당화했다. 인구와 경제 규모의 증가는 기술의 발전도 촉진해서 토기가 발명됐으며, 구리를 비롯한 금속이 활용되기 시작했고,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이 발명되어 석기에서 청동기로 넘어가는 기술 혁신이 일어났다. 10

문화에서도 영혼의 인식, 조상 숭배, 애니미즘 등의 원시 종교를 넘어서 인간과 각 집단의 기원에 대한 전설과 신화가 만들어지고 자연현상과 결부된 다양한 신들이 등장했다. 각 집단은 자신들과 연결된 상징(토템)이나 신을 상정했고 신들을 모시는 사원을 건축했으며 공식화된 종교의식을 시작했다. 농업이 시작된 후 문명이 발생하기까지 걸린 1,000년에서 5,000년 사이의 기간은 늘어난 인구와 경제 규모, 축적된 기술과 문화를 토대로 종교와 정치 지도자가 출현해서 세금과 노동력 징수 등 제도화된 통치를 통해서 대규모 공공사업과 정복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도로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고도로 조직화하는 데 걸린 시간이라 볼 수 있다. 문명의 역사에서 일어난 이 과정은 생명의 역사에서 해양 산소 농도의 증가로 에너지 활용률이 올라가자 단순한 세포 군집에서 기능이 분화된 여러 조직을 갖춘 다양한 고등 생물로 진화했던 과정에 비교될 수 있다. 조직화한 고등 생물은 단순한 세포 군집보다 포식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고등 생물 간의 대결이 포식 경쟁의 새로운 양상이 됐음은 인간 집단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5,500년 전쯤부터 2,000년 내외의 시차를 두고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네 강 유역과 아메리카 대륙 남부와 중부의 해안 지역에서 차례로 문명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도시국가들이 생겨났다 [그림 1]. 11

5,500년 전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수메르 문명, 5,100년 전쯤 나일강 유역이집트 문명, 4,500년 전쯤 인더스강 유역인더스 문명, 3,800년 전쯤 중국의 황하 유역황하 문명, 5,000년 전쯤 남아메리카 북부의 수페강 유역카랄-수페 문명, 3,500년 전쯤 중앙아메리카 해안 지역올멕 문명에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복합 사회가 출현했다. 초기 도시국가는 하나의 큰 도시, 몇 개의 작은 도시, 여러 개의 큰 마을, 작은 촌락으로 이어지는 4단계 이상으로 구성된 통치 계층 구조를 갖췄으며, 도시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농업 배후지는 대규모 관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큰 도시는 통치, 종교, 교역의 중심지로 1만에서 5만 명 사이의 인구가 거주했고, 방어를 위한 성곽을 갖춘 경우가 많았다. 도시의 중심에는 사원(신전)이 자리했고, 구획을 나누어 주거지와 시장이 배치됐다.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 문명을 예로 살펴보면, 지리적으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하류 지역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는 경로에 있었으며, 농업이 최초로 시작된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끝자락에 있다. 이 지역에는 7,000년 전 이전부터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인구가 늘면서 에리두, 우르, 우루크 등 여러 도시가 생겨났다. 그중에서 우루크가 가장 먼저 도시국가로 발전했으며 점차 다른 도시들도 그 뒤를 따랐다. 강의 하류이자 건조한 기후를 가진 지역의 특성상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조직화한 인력 동원과 관리 체계를 통해 관개 시설을 갖춘 대규모 농업을 했다. 도시의 중심에는 지구라트라 불리는 큰 신전을 건축했으며, 지구라트는 각 도시의 수호신을 모시는 종교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식량의 보관과 분배 등 통치와 경제의 중심이기도 했다. 이는 도시국가가 신정 국가로서 종교가 국가 운영에 중대한 역할을 했음을 말해준다. 도시의 시장에는 인근 지역 간뿐만 아니라 원거리 교역도 이뤄졌다. 수메르 문명에는 쐐기(설형)문자로 불리는 문자가 있었으며, 점토판에 상거래와 세금 내역 등 실용적인 내용을 기록하는 데서 출발해서 문학과 역사 기록까지 쓰임이 확장됐다.12 도시국가는 앞서 언급한 공통적인 특성을 가졌지만, 문명이 발생한 지역과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고유한 특성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인더스 문명의 도시에는 공공 건축물이 없어서 방어보다는 교역이 도시의 기반으로 추측된다. 카랄-수페 문명의 주요 도시는 성곽이 없어서 전쟁 대신 해안과 내륙 사이의 교역을 통해 도시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명의 발생과 국가의 형성은 여러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문명의 출현은 여분 식량(에너지)을 공급한 농업 혁명과 인구 밀집과 조직화를 이룩한 도시 혁명이 결합함으로써 일어났다. 여분 식량을 필요한 곳에 집중해서 투자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갖춘 집단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고, 이런 구조는 신화와 종교적 믿음에 근거해 신 또는 신의 대리인을 자처한 지도자(군주)가 시민들로부터 세금과 노동력을 거둠으로써 가능해졌다. 세금과 노동력의 징수는 국가 성립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징수가 과다하면 내부 불만을 키워 국가가 붕괴하는 원인을 제공했고, 징수가 부족해지면 방위력이 약해져 외부 침략에 의한 붕괴의 원인이 됐다. 집단 협력을 끌어내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요소도 필요했다. 집단 규모가 증가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줄이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체계적인 조직과 제도 그리고 규칙이 등장했고, 문자를 사용한 기록,13 종교를 통한 합리화, 제도화된 관료제가 이를 뒷받침했다.

문명이 왜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에서 발생했는가도 꾸준히 제기돼 온 질문인데, 이를 농업 혁명과 도시 혁명이 모두 가능한 지리적 조건과 연결한 논의도 흥미롭다. 문명이 발생한 지역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보면 1) 큰 강 하류에 형성된 충적토 평야 지대로 농업을 통해 대규모로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지역, 2) 건조한 기후로 인해 안정적인 농업을 위해서는 대규모 관개 시설이 필요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이 중요한 이유와 관련해서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묘사했다. 인구의 규모와 더불어 집단 협력이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의 시련이 있음으로써 문명이 탄생했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적절한 시련이 인류의 고유한 특성을 만들어 왔음을 보았는데, 문명의 역사도 이와 다르지 않음이다. 문명의 발생과 연결된 질문으로 고대 국가가 왜 (그런 형태로) 형성됐는지가 있다. 고대 국가의 형성을 설명하는 이론은 주요 요인이 무엇인지에 따라 두 범주로 나뉜다.

1) 자발적 형성 이론은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공동의 합리적 이익을 위해 국가를 형성했다고 본다.14 구체적인 이익이 무엇인가에 따라 몇 가지 세부적인 가설이 있다. 수력 가설은 대규모 관개 시설을 건설하고 유지할 필요성의 결과로 국가가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강 하류의 건조한 지역에서 발생한 수메르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 등에서 기후 변화로 도래한 시련을 극복함이 국가를 형성하는 동력이 됐다고 본다. 자동 형성 가설은 농업의 발전과 여분 식량으로 인해 다양한 노동 계급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국가가 자동으로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무역 거점 가설은 장거리 무역 망이 발전함에 따라 항구, 오아시스 등 교역의 주요 거점에 국가가 생겼다는 주장이다.

2) 갈등 이론은 집단 간 갈등과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우위에 오르고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억압함으로써 의해 국가가 형성됐다고 본다. 세부적으로는 경제적 계층 분화, 다른 집단을 정복, 지역 내 갈등 등으로 사유 재산의 보호, 사회질서의 유지 필요성이 생기고 이를 위해 관료제가 진화하고 국가가 형성됐다는 경제적 분화 이론, 정복지의 주민을 통제하기 위해, 정복자-피정복자 사이의 불평등을 굳히기 위해 국가를 형성했다는 정복 이론, 인구 이동이 제한되면서 생겨난 인구 압박과 집단 경쟁으로 국가가 형성됐다는 지리적 제한 이론, 지도력과 지도 체계의 진화를 통해 국가가 형성됐으며 사회 계층화에 따라 국가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형성되면서 사회 계층화가 이뤄졌다고 보는 진화 이론 등이 있다. 문명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협력과 갈등이다. 협력과 갈등 모두 인간이 집단을 형성하게 하는 요인이자 무너뜨리게도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국가 형성에 대해서도 자발적 형성 이론과 갈등 이론은 협력과 갈등 중 어느 쪽이 더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는지가 다를 뿐이다. 어느 쪽은 원인이고 어느 쪽은 결과인지를 따지기는 쉽지 않다. 어떤 요인으로든 한 국가가 형성되면 주변 지역의 집단들은 그에 복속되지 않고 맞서기 위해 비슷한 국가 체제를 갖춰야만 했다. 국가라는 체제가 내부적 갈등이 있음에도 외부적 경쟁력은 월등할 수 있음이다.

김항배
한양대학교 물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