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학자 박성래 교수는 『주간동아』 2004년 8월 12일자 원고에서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 1870-1917을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아버지’라고 강조하였다. 이상설은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침략을 피할 수 있는 조선 국력 신장의 열쇠는 서양의 선진학문 특히 자연과학 분야의 학습과 교육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근대사상과 근대학문 전 분야의 최신 서적을 대부분 독학으로 습득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학뿐 아니라 식물학, 화학, 물리학 등 서양의 과학도 선구자적으로 공부하고 그 중 새롭고 관심 있는 내용을 필사하여 『식물학』, 『화학계몽초』, 『백승호초』를 남겼다.
이 기록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이문원 수당기념관장이 갖고 있던 이상설 관련 책의 일부를 국사편찬위원회가 마이크로피시로 보관 중이라는 말을 듣고, 공동연구자인 오채환 선생이 국사편찬위원회를 방문해 색인도 없이 붙어있던 이상설의 필사 자료를 복사해오면서 그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독립운동가로서 이상설의 생애와 업적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졌으나, 이상설이 수학과 자연과학에 기여한 공로는 간과되어 왔다. 한국 근대수학에 기여한 수학자들을 소개하기에 앞서 우선 한국에 근대수학과 자연과학 교육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시작되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상설이 수학을 공부한 시기는 한국의 수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산학과 근대서양수학을 모두 담고 있는 이상설의 첫 번째 저서인 『수리數理』 표지 뒷면의 “戌亥(술해) 山房 溥齋(이상설) 主人 書(씀) 自 九月七(9월7일) 潮澣(마무리함)”이라는 기록에서 ‘술해’가 연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수리』는 1886년~1887년 사이 또는 1898년~1899년 사이에 저술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위당 정인보가 “이상설은 스승 없이 영어에 능통하였다”라고 회고했으며, 1885년 봄부터 8개월간 정릉 신흥사에서 학우들과 합숙하며 수리정온과 서양의 수학·영어·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설이 1886년부터 육영공원 교사로 일하던 호머 헐버트에게 서양수학 및 과학책을 구하여 학습하였다고 하면 1887년이 더 설득력이 있다. 조선정부가 1888년에도 산사 17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상설은 조선의 전통산학과 서양수학이 양립한 중첩기에 동서양의 수학을 학습한 셈이다.
이번 글에서는 19세기 말 성균관과 한성사범학교에서 강의할 고급인력들에게 서양의 근대수학 및 과학 내용을 미리 접하도록 한 것으로 추측되는 사료들을 분석한 최근 연구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인이 쓴 첫 번째 서양근대물리학 책, 『백승호초百勝胡艸』
이상설은 『수리』를 쓴 시기를 전후하여, 19세기 말 붓으로 총 8면에 걸쳐 『백승호초』라는 고전물리학 원고를 남겼다. 이상설은 『백승호초』에서 먼저 개념을 정의하고, 일상에서 나타난 대표적 현상을 간략히 요약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고, 물리학의 전체 분량에서도 특히 ‘통유성通有性’1에 중점을 두고 설명하였다.
『백승호초』의 원전은 1879년 일본에서 발간된 『물리학』이다. 서지정보와 표지를 살펴보면 『물리학』은 당시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조교수인 이이모리 테이조飯盛挺造, 1851-1916가 여러 책을 번역, 편집하여 하나의 책으로 정리한 것을, 도쿄대 교수인 단바 케이조丹波敬三, 1854-1927와 시바타 쇼오케이柴田承桂, 1850-1910가 교정을 보며 보충한 것이다. 『백승호초』에 기록된 그림과 내용 일부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땔나무를 태우면 끝내 형체가 사라져 겨우 재만 남고, 그 대부분은 탄산수증기 등이 된다. [그림2]의 갑甲처럼 유리원통을 준비하여 그 아래구멍은 나무로 원판을 만들고 판에 여러 구멍을 뚫고 초를 꽂는다. 윗구멍에는 코르크 마개로 막고 구멍 하나를 뚫어 U자 모양의 관 끝을 꽂고, 관의 다른 끝은 더 큰 U자 모양의 병丙관에 꽂는다. 이 병관에는 탄산수증기 등의 물질과 잘 결합하는 가성나트륨을 채운다. 먼저 가성나트륨의 양이 얼마인지 재고, 다음으로 초의 무게를 잰다.
초에 불을 붙여 갑통에 넣는다. 잠시 후 불을 끄고 다시 초의 무게를 달면 반드시 약간량이 줄어들었을 것인데, 바로 연소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병관의 무게를 재면 반드시 약간량이 증가하였을 것인데, 초의 무게가 줄어든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이것은 촛불이 연소할 때 탄소가 공기 중에서 산소와 화합하여 탄산을 만들고, 수소는 산소와 결합하여 물을 생성하는데, 병관을 지나면서 가성나트륨NaOH에 흡수된다. 이때 탄소와 수소 두 가지 물질은 (산소와) 서로 결합하여 질량이 증가되니, 이 때문에 물질이 연소할 때엔 터럭(털하나)만큼도 손실이 없다.
이는 화학의 기본법칙의 하나인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반응물질의 전체 질량과 반응 생성물질의 전체 질량은 같다는 법칙을 이상설이 이해한 것이다. 『백승호초』에서는 물에 소금을 타는 예를 들면서, 소금의 용해확산, diffusion를 통해 소금이 분해되는 분성分性을 가진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다양한 내용을 다룬 『백승호초』는 당시 서양의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배우는 최신 물리학 지식을 담고 있다.
『백승호초』는 이상설이 서양의 과학을 이해하여 가르치려던 열정과 노력의 결과물이라 보아도 될 듯하다. 동양에서 서양의 수리과학 개념이 들어와야만 말할 수 있는 ‘질량보존의 법칙’, ‘관성’과 같은 고전물리학의 중요개념을 포함하는 내용이 19세기 말에 이미 원고에 소개된 것으로 보아, 이상설은 19세기 말 유럽의 대학과정 물리학 지식을 이해하여 가르치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이 쓴 첫 번째 서양근대화학 강의록 『화학계몽초化學啓蒙抄』
이상설이 저술한 『화학계몽초』는 강의록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판단되는데, 수학교육자인 이상설이 자연과학 분야에 행한 교육적 기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화학계몽초』는 이상설이 일본어 번역본이 아닌 중국어로 번역된 서양 화학책 『화학계몽化學啓蒙』을 읽고 요약한 총 46쪽의 필사본이다. 『화학계몽』의 원전인 『Science Primers: Chemistry』의 저자는 영국 런던 출신의 화학자 헨리 로스코Henry Enfield Roscoe, 1833-1915이다. 그는 주로 바나듐과 광화학을 연구하였다.
이상설은 『화학계몽초』에서 『화학계몽』의 총 22장 69절을 골고루 요약, 필사하였다. 동시대에 필사된 『수리』, 『식물학』, 『백승호초』와 비교하면, 『수리』에 필적할 만하고 『식물학』, 『백승호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필사량이 많다. 이로써 이상설이 수학은 물론 화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시대적으로 당시 조선은 화학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때이므로 이상설은 『화학계몽』을 마법의 상자쯤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화학계몽』이 ‘이해가 쉬운 경험적 실험화학’의 예를 이용하여 화학의 기초이론을 기술한 책이기 때문에, 이에 매료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비금속 및 금속 원소들의 기초 반응과 응용에 관한 기술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상설이 더욱 높은 관심을 갖고 더욱 세밀하게 기록하여 필사량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상설은 『화학계몽』을 연구하면서 그 이해의 수준이 높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학계몽초』의 내용과 수준을 확인하기 위하여 『화학계몽초』에 있는 실험 내용의 일부를 원전의 그림 및 설명과 함께 우리말로 풀어서 소개한다.
1) 연소반응에 대하여 논한다 (논화, 論火, 연소반응 예)
[그림5]처럼 유리병 안에 촛불을 넣고 입구를 막은 채로 연소 시키면,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촛불이 꺼진다. 병 안에 맑은 석회수를 부어 넣으면 흰색으로 변한다. 석회수 내의 흰 분말은 CO2(탄강기)와 석회수가 합성된 물질 즉, 촛불 연소 때 초의 탄소(炭精,탄정)이 탄강기로 변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C(초, 탄정) + O2(양기) → CO2(탄강기)
또한 탄소(탄정)가 공기(양기)와 상합할 때 불이 생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합성이 진행된 후에도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6]처럼 설치한 후 저울이 수평이 되도록 추를 조절한다. 밸브를 열면 물이 나오면서 다공성마개를 통하여 풍기가 들어간다. 밸브를 잠그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촛불이 꺼지고 저울이 왼쪽으로 기운다. *백약은 연소할 때 생기는 CO2(탄강기)와 수증기水氣,수기를 흡수한다. 증가된 무게는 공기(풍기)중의 산소(양기)가 반응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3) 물에 관하여 논한다 (논수, 論水, 물의 구성성분, 물의 전기분해)
[그림7]과 같은 장치에 물(강수)을 담고 두 개의 플래티늄(백금) 도선을 수중에 돌출시킨다. 두 개 유리관을 거꾸로 설치할 때 각 전극이 각 유리관 안으로 들어가게 한 후 전극의 연장 도선에 전지의 전기를 통하게 하면 기포가 생성된다. 이때 유리관 신辛에 기체가 꽉 찰 때 유리관 경庚에는 반만 찬다. 전자는 수소(경기)이고 후자는 산소(양기)이다.
4) 물의 구성 성분
실험 시작 전 유리구 갑甲과 U자관 을乙의 무게를 측정한다. 아연을 넣은 물 병丙에 황강수를 첨가하면 수소(경기)가 발생하여 물병 정丁과 유리구 술戊안의 석회정 녹기산염을 통과하며 건조된다. 이때 유리구 갑을 가열하면 흑색 산화동 가루는 적색으로 변한다. 가열할 때 생기는 수분은 U자관 을에 의하여 흡수된다. 유리구 갑의 처음 무게는 1056g이고 실험 수행 후의 무게는 1016g으로 40g 감소하였다. U자관 을의 처음 무게는 803g이고 실험 수행 후 무게는 848g으로 45g 증가하였다. 즉, 물 45분에는 40분의 산소와 5분의 수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2x(40/16=2.5)= 5/1=5, 따라서 물은 산소(양기)와 수소(경기)가 1:2의 비율로 구성된다.
이상설이 양자역학이 나타나기 전인 19세기 말에 쓴 『화학계몽초』는 현대 화학의 입장에서 보면 대개는 고등학교 수준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학물질의 율수率數-원자량, 화학등수化學等數 등 원자론에 기초한 제반 법칙들은 현대 화학에서도 사용되는 내용들이다. 원저가 양자론이 발표되기 이전에 저술된 것이기에 양자화학에 기초한 원자구조, 화학결합론, 분자구조 등은 물론이고 유기화학, 핵화학, 생물화학 등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원고의 몇몇 부분에 있어서 다소 이론의 여지가 있으나, 원소, 열화학, 전기화학, 금속, 비금속 등에 관한 실험적 지식은 원리 면에서 현대의 기초화학과 대동소이한 지식을 전달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인이 쓴 첫 번째 서양근대식물학 강의록 『식물학植物學』
이상설이 『수리』를 쓴 시기를 전후하여, 붓으로 쓴 『식물학』은 총 4면의 초록 필사본으로 원전은 영국인 조지프 돌턴 후커J. D. Hooker, 1817-1911의 『Botany』이다. 이 책을 영국인 조셉 에드킨스Joseph Edkins, 1823-1905가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 『식물학계몽』인데, 이상설은 『식물학계몽』을 읽고 당시 조선 학자가 몰랐던 새로운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하여 『식물학』을 쓴 것으로 여겨진다. 『식물학계몽』은 1권 총 30장으로 구성되었고, 이상설은 『수리』의 후반부를 작성하던 시기에 『식물학』을 저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설은 자신이 이미 아는 내용은 짧게 기록하고, 새로운 지식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 이상설 자신이 필사한 『백승호초』, 『화학계몽초』와 『식물학』을 비교하면, 조선에 이전에 알려진 내용이 별로 없는 서양 전자기학, 역학, 화학은 매우 자세히 서술하였고, 조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식물의 형태 및 구조, 성질 등과 같은 거시적Macro인 식물학 지식은 간단히 언급하고 모두 생략하였으며, 식물의 영양, 현미경적 구조, 물질의 합성, 식물의 기능에 대한 실험과 같은 미시적Micro인 식물학 지식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이를 분석해 보면 당시 식물학은 물리학이나 화학보다는 조선의 학자들에게 좀 더 익숙한 분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19세기 말 조선의 학자가 식물학을 연구한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을 고려한다면, 『식물학』은 아마 조선인이 최초로 서양 생물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남긴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식물학 책을 중국어로 번역한 『식물학계몽』을 이상설이 정리하여 만든 식물학 강의록이 1890년대 전후 신흥사에서 설강을 할 때부터 쓰인 것이라면 서양의 과학지식이 당연히 일본을 통해 수용되었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고칠 수 있는 자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즉 서양의 과학지식이 우리가 아는 것보다 다양한 경로로 수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식물학』의 일부 내용이다.
식물은 뿌리를 통해 물을 대부분 흡수하는데, 남는 물은 잎을 통해 밖으로 증발하여 잎 면에서 잎 속에 있던 열기를 감소시킨다. 뿌리 사이로 흡수되어 안에 있는 질소는 안에 있는 각종 물질에 붙는다. 분정粉精은 라틴어로 알부민albumin이라 부르는데, 생각건대 바로 백물白物이다. 계란의 흰자위를 가리켜 말한 것인데, 대개 동물의 몸속에서 분정은 생장의 핵심이 되며, 식물에서는 없어선 안 되는 물질이다. 식물 전체에 충만해 있는 각종 조직액의 안에서 용해되어, 잎에서 생성된 분장粉漿과 합성되어 알부민의 각종 재료가 된다. (중략) 하나의 나무 상자를 가져다 네 면을 모두 틈이 없게 단단히 막고, 그 안에 겨자씨를 뿌려둔다. 겨자씨가 싹이 나서 생장할 때에 한 면에 구멍을 뚫고 암홍색 유리를 끼우면, 그 줄기와 잎은 모두 곧바로 위로 자란다. 가령 푸른색 유리로 바꾸면, 줄기와 잎은 굽어진 형상을 띄어 보통의 무색유리를 쓸 때와 차이가 없다. 이로써 사물을 햇볕을 향하게 하는 능력은 햇볕의 7색 가운데 자주색에 속한 끝부분이 근본이 됨을 알 수 있다.
『식물학』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식물학』은 『식물학계몽』의 극히 일부만 필사한 것으로 전반적으로 학문적 수준을 논하기에는 양이 지나치게 적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식물의 형태학적 내용보다 식물의 기능, 생화학적인 내용, 실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상설이 현대적 의미의 과학자로서 기본소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설은 조선에 이미 잘 알려진 과학 지식은 간단히 언급하고, 조선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과학 지식에는 그림을 그려가며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다. 1894년 이승만, 김구와 같이 치른 과거 대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이상설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기 이전에 이미 독자적으로 서양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론
대부분의 역사 서술에서 이상설을 독립운동가로만 기록한다. 그러나 한국 역사에서 이상설의 진정한 ‘선구자’ 역할은 독립운동가 이전에 한국 근대 수학교육 및 근대과학교육을 시작한 개척자라는데 있다. 130여 년 전 이상설은 중국, 일본, 미국의 책을 보면서 서양 근대수학과 과학을 스스로 이해하고 『수리』와 『식물학』, 『백승호초』, 『화학계몽초』를 집필하여 강의했다. 1900년 수학교과서 『산술신서』를 발간하면서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정사로 파견되기까지 이상설은 교육 중에서도 특히 수학교육에 몰두한다.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교육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2편에서는 한국 수학사에서 신구 수학이 양립한 중첩기에 수학교육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선의 천재 이상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호머 헐버트 그리고 이상설의 동생 이상익에 대해서도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이어서 3편에서는 한국인 최초의 수학학사와 석사 등 주요 인물들을 소개하고, 4편에서는 한국인 최초의 수학박사와 한국에서 배출한 최초의 수학박사 그리고 세계적으로 처음 알려진 한국인 수학자들을 소개하며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