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란 무엇인가?
우주는 우리가 속해 있는 (하나로 연속적으로 연결돼있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물질의 총체다.1 우주에 대한 이런 관념은 20세기 초 일반상대성의 등장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의 동역학이 서로 엮여있음을 인지함으로써 확고해졌다. 그 이전에는 땅과 하늘로 대표되는 공간적인 실체가 더 강조됐다. 우주 변화의 시간 척도에 비해서 인간의 수명, 나아가 인류 문명의 기간이 지극히 짧았기 때문이다. 땅과 하늘에 대한 빈약한 관찰 위에 얹은 상상력의 산물인 고대의 우주론에서는 우주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얘기도 담겼지만, 세밀한 관찰과 실험에 근거한 근대 과학이 등장하면서 대체로 우주는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졌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의 등장 이후 100년에 걸쳐 다듬어진 현대 우주론은 우주의 탄생에서 현재까지 우주는 팽창과 함께 변화해왔으며 그 변화의 과정을 통해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졌음을 이론적 예측과 관측 결과를 통해 입증했다.
1 우주(宇宙)와 Universe의 어원: 한자어 우주(宇宙)는 원래 지붕의 처마(宇)와 들보(宙)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한나라 고유가 회남자(淮南子)에서 우(宇)를 상하사방(上下四方)의 공간(空間)으로, 주(宙)를 왕고래금(往古來今)의 시간(時間)으로 주해한 이후에 천지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재의 우주 개념과 맞닿아 있다. 영어 Universe는 라틴어 universum에서 왔는데, 이는 하나를 뜻하는 un과 회전함을 뜻하는 vorsum을 축약하여 만들어진 단어로 ‘하나로 회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을 상징하는 천구의 회전을 반영한 조어로 볼 수 있다.
우주의 역사는 무엇을 다루는가?
우주는 모든 것의 총체이므로 단순히 생각하면 우주의 역사는 모든 것의 역사를 포함해야 한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모든 개인들의 세부적인 역사가 아니라 그들의 삶이 펼쳐졌던 사회와 문화를 주로 다루듯이 우주의 역사도 제각각인 별과 행성의 역사가 펼쳐지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우주, 즉 거대 규모에서의 변화를 다룬다. 특히 빅 히스토리에서 다뤄지는 우주의 역사는 우리의 존재와 연결된 우주적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우주의 탄생, 물질과 구조의 기원, 우주의 팽창으로 유발된 물질 상태 변화의 역사를 다룬다.
우주는 어떤 모습을 가졌으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주의 역사를 살펴보기 전에 현재 우주의 모습부터 그려보자. 우주는 어떤 모습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디일까?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이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관측 기술의 발전과 과학지식의 축적을 통해 훨씬 더 멀리 있는 천체들을 볼 수 있게 되고 그들의 거리를 측정해냄으로써 우리가 인식하는 우주의 규모는 엄청나게 확장됐다. 더불어 우주에서 우리가 갖는 지위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19세기 초에 별까지의 거리 측정에 성공함으로써 우주의 끝은 유한한 천구라는 생각을 버리고 우주는 별들이 무한히 펼쳐진 공간이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이어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가 수천억 개의 별의 집단인 하나의 은하임을 알게 되고, 20세기 초에 우리은하의 크기와 외부 은하의 거리 측정에 성공하자 이제 우주는 은하들이 무한히 펼쳐진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은하수라는 한 은하에서 중심으로부터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태양이라는 별에 딸린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다. 우리은하는 수십 개의 은하가 모여 있는 지역 은하군에 속해 있으며, 이는 다시 처녀자리 은하단이라는 더 큰 규모의 은하 집단의 변방에 위치하고 있다. 은하들은 크고 작은 규모의 집단을 이루며 불균일하게 분포하지만, 범위를 조금 더 넓혀 가면 평균적으로 균일하게 분포에 도달한다.
은하는 빛을 내는 원자들의 분포를 반영한다. 따라서 그것이 우주의 물질 분포 전체를 반영한다는 보장은 없다. 실제로 우주에는 빛을 내지 않는 원자가 더 많으며, 빛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체가 무엇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물질인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존재함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원자보다 훨씬 더 크고, 그들의 분포 또한 원자들의 분포와 다르다. 하지만 원자는 별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구성하는 물질이다. 이들이 우주에 분포된 양상은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고 (유한한 과거의 한 시점에 우주가 탄생했다.) 빛의 속력도 유한하기 때문에 현재 (또는 어느 주어진 시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observable universe는 우주의 나이 동안 빛이 진행할 수 있는 범위로 제한된다. 현재의 관측 결과를 종합하면 우주의 나이는 약 138억 년이고, 볼 수 있는 우주는 반지름이 465억 광년인 구로, 그 안에는 수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2 우주의 전체 크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볼 수 있는 우주보다는 커야 하며, 유한하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무한할 수도 있다.
2 1광년은 거리 단위로 빛이 1년 동안 진행하는 거리로 약 10조 km이다. 우주의 나이가 138억 년인데, 볼 수 있는 우주의 반지름이 465억 광년인 것은 우주의 탄생 이후 현재까지 빛이 진행하는 동안 공간이 계속 팽창해서 빛이 이미 지나간 거리가 그만큼 늘어나기 때문이다.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접근
우주의 역사는 우주의 동역학에 대한 법칙과 몇 가지 중요한 관측 사실들을 바탕으로 현재의 모습으로부터 시간을 거꾸로 돌려 재구성한 이야기다. 문명의 역사가 기록과 유물로부터 재구성된 이야기임과 마찬가지다. 우주는 시공간과 물질의 합이므로 시공간의 동역학과 물질의 동역학을 결합하면 우주의 동역학이 된다. 시공간의 동역학 법칙은 일반상대성으로, 시공간에 분포하는 물질의 상태와 양이 시공간의 휘어짐을 결정한다. 물질의 동역학 법칙은 입자물리 표준모형으로,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입자들인 6종의 쿼크와 렙톤이 강, 약, 전자기의 세 가지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물질의 상태를 만든다. 시공간과 물질의 동역학은 상태의 변화를 기술하는 법칙일 뿐 우주가 최초에 어떤 상태로 시작됐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최초의 상태는 현재의 상태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이를 가능케 한 몇 가지 중요한 관측 사실들이 있다.
첫 번째는 우주 공간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초에 에드윈 허블은 비교적 가까운 은하들을 관측해서 거리와 적색이동이 비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는 팽창의 증거가 됐다. 우주의 팽창은 우주를 채운 물질의 에너지밀도의 작용이다. 보통의 물질은 팽창에 의해 에너지밀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팽창 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느려진다. 20세기 말에는 훨씬 멀리 있는 은하들의 거리-적색이동 관계를 관측할 수 있게 됐고, 이로부터 팽창이 감속되던 단계에서 전환되어 현재는 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의 가속 팽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주의 에너지밀도에서 암흑 에너지로 불리는 압력이 음인 특이한 속성을 가진 물질이 보통의 물질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
두 번째는 은하들이 공간에 분포하는 양상이다. 우주의 모습에서 살펴본 대로 은하들의 분포 양상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그림1] 충분히 큰 규모에서 보면 평균적으로 균일한 분포로 우주의 모든 곳이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반면 작은 거리 규모로 내려오면 은하들이 밀집된 영역과 희박한 영역이 나타나는데, 밀집의 규모에 따라서 은하단, 초은하단 등으로 부르며 총체적으로 이를 우주 거대 구조라 한다.
세 번째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cosmic microwave background 복사의 존재다. 복사는 뜨거운 물체에서 나오는 전자기파를 의미한다. 열평형 상태에 있는 뜨거운 물체는 열복사 스펙트럼이라 불리는 고유한 스펙트럼을 갖는 복사를 방출하는데 온도에 따라 주로 나오는 전자기파의 파장대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온도가 5,800K인 태양표면에서는 가시광선대가 방출되고 온도가 300K인 우리 몸에서는 적외선대가 방출된다. 우주에 모든 곳을 이런 열복사 스펙트럼을 가진 복사가 채우고 있는데 마이크로파대로 온도는 2.7K이다. 2.7K이면 모든 것이 얼어붙는 절대온도 0도(0K = -273℃)에서 불과 몇 도 높은 온도인데, 이렇게 낮은 온도의 열복사는 보통의 상황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하지만 우주에서는 팽창의 결과로 가능하다. 열복사는 공간이 팽창하면 온도가 반비례해서 내려가기 때문이다. 초기 우주에서는 온도가 매우 높았지만, 팽창으로 인해 식어서 현재 2.7K이 된 것이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의 존재는 우주가 매우 높은 온도의 열평형 상태에서 시작했고, 어느 순간 물질로부터 방출됐음을 암시한다.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에는 중요한 측면이 한 가지 더 있다. 어느 방향에서 오는 열복사든 온도가 거의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것으로 등방성이라 한다. 이것은 은하(원자)들의 분포가 충분히 큰 규모에서 균일하다는 사실과 부합한다. 균일한 은하의 분포와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의 등방성은 우주가 최초에 거의 완벽하게 균일한 물질 분포를 가진 상태에서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다른 방향에서 오는 열복사의 온도가 완벽하게 같다면 은하(원자)들의 분포가 작은 규모에서는 우주 거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모순된다. 원자가 밀집된 영역에서 오는 열복사와 희박한 영역에서 오는 열복사의 온도에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1990년대에 시작되어 30년간 이어진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에 대한 정밀 관측을 통해 방향에 따른 온도요동의 존재가 세밀하게 확인됐다. 관측된 온도요동은 10만분의 1 정도의 작은 값이지만, 이는 우주 구조의 씨앗이 되는 태초의 밀도요동의 크기로 우주 구조의 형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숫자이다.
이상의 관측 사실들로부터 유추되는 우주의 시작 상태는 균일한 물질 분포와 높은 온도의 열평형 상태로 우주의 모든 곳이 거의 완벽하게 똑같은 모습이지만, 아주 작은 (약 10만분의 1) 크기의 밀도요동을 가진 상태였다. 이제 이런 상태로 시작된 우주에서 물질이 유발하는 공간의 팽창(시공간 동역학)과 팽창이 유발하는 물질의 상태 변화(물질 동역학)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현재 우주의 모습을 만들었는지 알아보자. 그 과정에서 우주 역사의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현재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한 장의 그림으로 보는 우주의 역사
[그림2]는 지구에 있는 관찰자에게 (빛을 통해서) 보이는 우주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원(실제로는 3차원 공간상의 구이지만 지면에서 원으로 표현된다.)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맨 바깥의 회색 원은 볼 수 있는 우주의 경계선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주가 무한하더라도 볼 수 있는 우주는 유한하다. 그림 상의 중심으로부터 거리는 실제 거리의 로그 값에 비례한다. (실제 거리는 그림 상의 거리의 10의 거듭제곱에 비례해서 커진다.) 그림에서 중심에서 반지름 방향으로 나갈수록 우주의 과거 모습을 보게 된다. 빛의 속력이 유한하기 때문에 천체에서 나와서 지금 도착한 빛은 거리가 멀수록 더 과거에 출발했던 빛이고, 그래서 그만큼 과거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래서 현재 보고 있는 볼 수 있는 우주의 모습은 공간에 펼쳐놓은 우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림의 오른쪽 맨 위는 이것을 시간에 펼쳐진 우주의 역사로 변환한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맨 바깥 둘레의 원이 나타내는 우주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중심이 나타내는 현재까지 138억 년 동안 변해온 우주의 모습이 시간순으로 담겨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우주 역사의 주요 장면을 살펴보자.
맨 바깥의 원은 흔히 빅뱅이라 부르는 우주 탄생의 순간이다. 지금부터 약 138억 년 전에 일어났다. 그 안에 있는 붉은색의 원은 양성자와 전자가 결합하여 원자가 만들어지면서 이들과 강하게 결합하고 있던 빛이 우주배경복사로 분리돼 나오는 순간이다. 빅뱅 후 약 38만 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빅뱅 후 우주를 채우며 물질(원자)과 끊임없이 충돌했던 빛은 이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충돌한 후 자유롭게 우주를 날아다니게 된다. 그래서 이 구면을 (빛의) 최종산란면이라고 부른다.
맨 바깥쪽의 두 원 사이는 그림에서는 좁은 틈으로 나타나지만 우주의 역사에서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기간이다. 이때는 물질과 복사가 아주 높은 온도의 플라즈마 상태로 우주를 채우고 있다.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온도가 내려가면서 무거운 입자들은 차례로 사라지고 가벼운 입자들만 남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물질-반물질의 비대칭성이 만들어지고, 남은 물질에서 헬륨과 몇몇 가벼운 핵들이 만들어지는 빅뱅 핵합성이 진행된다. 이 기간이 회색으로 표현된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플라즈마 상태는 빛에 대해서 불투명해서 (빛이 물질과 충돌을 거듭해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사실 우리는 이 기간의 상황을 빛을 통해서는 볼 수 없다. 최종산란면 이후에야 우주는 빛에 대해서 투명해져서 우주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최종산란면 안쪽에 있는 그물망 모양의 구조는 별의 형성을 나타낸다. 그 경계가 되는 원은 최초의 별이 등장하는 순간을 나타낸다. 이는 빅뱅 후 약 2억~4억 년에 일어난 일이다. 별은 핵융합 과정에서 얻은 에너지로 빛을 사방에 방출해서 어두운 우주를 밝힌다. (혹자는 이 최초의 별로부터 나오는 빛을 태초의 빛이라 부른다. 사실 여전히 우주배경복사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최종산란면 이후 온도가 계속 내려가서 이때는 적외선대가 된다. 인간은 적외선대를 볼 수 없으므로 혹자는 최종산란면과 별의 등장 사이의 빛(가시광선대)이 없는 시기를 우주의 암흑시대라고도 부른다.)
그물망 구조 안쪽에 있는 밝은 점들은 은하의 형성을 나타낸다. 빅뱅 후 약 10억 년 정도에 최초의 은하가 형성되고, 이후에 은하들이 늘어나면서 서로 밀집해서 우주 거대 구조를 형성해간다. 우주는 차츰 현재와 같은 은하들이 펼쳐진 공간으로 변모한다.
이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빅뱅의 순간(맨 바깥의 원)부터 별이 등장하는 순간(그물망 모양의 원형 띠)까지 우주는 원둘레를 따라 방향과 관계없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우주가 균일한 물질의 분포로 시작해서 어디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하지만 별과 은하 등 우주의 구조물들이 생겨나면서 우주는 점차 불균일해진다. 우주의 초기에는 우주의 팽창에 따른 온도 하강이 물질 상태의 변화를 주도하지만, 우주의 구조물들이 생겨나면서 물질의 상태는 더욱 다양한 양상의 변화를 겪게 된다.
우주, 시공간과 물질의 기원
138억 년 전 우주가 생겨났다. 우주의 탄생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우리는 그 사건을 빅뱅Big Bang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아직 모른다.
빅뱅의 존재는 팽창하고 있는 우주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유추한 것이다. 현재의 우주 상태를 시공간의 동역학 법칙을 통해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유한한 과거 시간에 물질밀도와 시공간곡률이 모두 무한대가 되는 특이점에 도달한다. 무한대는 과학이 다룰 수 없는 영역이다. 빅뱅 특이점이 나타남은 현재의 시공간 동역학이나 물질 동역학을 적용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뜻한다. 실제 우주는 무한대는 아니지만 매우 큰 밀도와 높은 온도의 물질로 채워진 거의 완벽하게 균일하고 편평한 우주에서 시작됐다고 보인다. 일반 상대성에 의하면 현재 큰 거리 규모에서 관찰되는 정도의 균일함과 편평함이 138억 년의 팽창 과정에서 유지되려면 우주는 이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균일하고 편평한 상태로 시작됐어야 한다. 한편 작은 거리 규모에서 관찰되는 우주의 구조가 만들어지려면 작은 크기나마 물질밀도 요동이 시작 상태에 이미 존재해야 한다. 현재의 시공간 동역학인 일반 상대성과 물질 동역학인 표준모형에 들어있는 물질(기본입자)만으로는 우주가 어떻게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상태로 시작했는지 설명하기가 난감하다. 만약 우주의 시작 상태가 무작위로 선택된 것이라면 엄청나게 많은 가능한 상태 중에서 선택될 확률이 높은 불균일하고 휘어진 상태는 동역학을 통해 균일하고 편평한 상태로 바뀔 수 없고, 균일하고 편평한 상태는 그 수가 매우 작아서 선택될 확률이 거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우주의 시작은 그럼에도 그 작은 확률을 뚫고 복권에 당첨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가(신이?) 마법을 부린 것일까?
급팽창inflation은 우주의 시작 상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도입됐다. 급팽창은 우주가 시작될 때 순간적이지만 엄청나게 큰 가속팽창이 있었다는 가설이다. 이 가속팽창은 (10-36초 정도의)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유지되지만 원자핵보다도 작은 크기의 공간을 수 미터의 크기로 (1026배 이상으로) 팽창시킨다. 엄청난 가속팽창에 의해 작은 공간에 있던 불균일성과 휘어짐은 사라지고 거의 완벽하게 균일하고 편평한 공간이 된다. 가속팽창이 끝난 후 이 공간은 138억 년 동안 균일함과 편평함을 유지한 채 팽창을 지속하여 현재 볼 수 있는 우주의 크기로 커진다. 하지만 이런 가속팽창이 일어나려면, 현재의 가속팽창을 설명하기 위해 암흑 에너지를 도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음의 압력을 가진 특이한 속성의 물질이 필요하다. 존재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이 물질을 급팽창장이라 부른다. 엄청난 가속팽창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맞춰 에너지밀도가 엄청나게 크며 압력의 크기는 에너지밀도에 필적하면서 음의 값을 가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급팽창이 끝난 후 급팽창장은 기본입자들을 생성하며 붕괴하는데, 급팽창장의 큰 에너지는 이들을 가열하는 데 쓰여 우주는 높은 온도의 플라즈마 상태인 기본입자들로 채워진다. 작은 크기의 밀도요동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급팽창은 정확히 현재의 상태로부터 유추되는 시작 상태를 만들어낸다.
급팽창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급팽창은 우주의 구조 형성에 필요한 작은 크기의 밀도요동도 만들어내는 마법을 발휘한다. 원자보다 작은 크기의 세계에서는 물질의 양자역학적 속성이 드러난다. 급팽창이 엄청난 가속팽창을 통해 원자핵보다 작은 공간을 거시적인 크기의 공간으로 키우는 과정에서 미시세계에 숨어있던 급팽창장의 양자요동quantum fluctuation은 거시세계 물질의 밀도요동으로 바뀐다. 이는 중력이 강력해지면 일어나는 놀라운 현상이자, 우주의 구조와 그 구조에서 기원하는 모든 정보의 기원이 된다. 급팽창은 현재의 우주 모습을 설명하기에 필요한 완벽한 시작 상태를 만들어내기에 아직 관측으로 확인된 증거는 없지만 대다수 연구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급팽창도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왜 그리고 어떻게 급팽창이 시작됐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직 없다. 사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는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이는 철학에서 제기된 ‘왜 아무것도 없기보다 무엇인가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와도 연결된다. 우주의 기원은 연속적인 변화가 아니라 무에서 유로 가는 도약이다.
현재 시공간 동역학인 일반 상대성에서는 도약이 있을 수 없다. 반면 물질 동역학인 표준모형에서는 에너지에서 물질로 도약이 가능하고, 이것은 특수 상대성과 양자역학을 결합한 결과이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은 일반 상대성에도 양자역학의 원리를 적용한 양자중력이론을 만들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왔고, 초끈이론, 고리양자중력 등 몇 가지 후보를 내놓았다. 양자중력이론의 틀 안에서 진공으로부터 양자요동에 의한 우주의 생성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들 이론에 대한 이해가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우주의 기원을 정량적으로 논의할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