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세계에 실험실이 몇 개나 될까? ILAC 인증기관에 등록된 실험실은 18,000여 개이다. ILAC에 모든 나라가 가입한 것이 아니기에, 실제 존재하는 실험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다른 통계에 의하면 전 세계 과학자의 수가 880만 명인데, 과학자의 상당수가 실험실에서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역시 실험실은 18,000여 개보다 더 많을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실험실 하나를 발견하기 힘들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의하면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6세기의 철학자 존 디(John Dee, 1527-1608)였다. 그는 신비주의 사상가였는데, 1592년에 출판된 자서전에서 “화약을 연구하는 나의 세 실험실”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가 사용한 laboratory라는 단어는 라틴어 라보라토리움laboratorium에 그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 단어는 중세 수도사가 노동하는 공간을 의미하다가 16세기부터 연금술사들의 작업장을 의미하기 시작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동안에 연금술이 근대 화학으로 서서히 바뀌면서, 실험실도 화학자들의 실험 공간을 뜻하게 되었다. 1)


    화학자들의 실험실에는 연금술사들의 실험실과 마찬가지로 화로(furnace), 증류기, 천칭 같은 기구가 즐비했다. 고온을 얻기 위해 나무와 석탄을 때고, 산(酸)으로 금속을 녹이던 이들의 실험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기였다. 반면에 불을 때지 않는 물리학 실헐실에서는 환기는 덜 중요했고 오히려 진동이 없는 곳에 실험실의 위치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19세기 말엽 독일 베를린에 표준 실험을 담당할 <물리-기술 제국 연구소 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가 설립될 때, 그 옆으로 전차가 지나가게 되었다. 전차의 운행이 지면에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고, 물리학자들은 독일 제국을 위한 중요한 연구가 전차의 운행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고 항의했다. 결국 전차 운행보다 표준 실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프러시아 제국의 관료들은 전차 노선을 다른 길로 변경하는 결정을 했다.2)

 

    <물리-기술 제국 연구소>는 당시 최고로 멋진 건물과 첨단 설비를 자랑했고, 정부로부터 받는 예산도 풍부했다. 그렇지만 이는 예외였다. 대학에 위치한 물리학 분야의 실험실은 훨씬 열악했다. 그래스고(Grasgow) 대학교의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 후에 Lord Kelvin이 됨)의 실험실처럼 전신(telegraph) 기사를 훈련하기 위한 물리 실험실은 기업과 정부로부터의 후원금을 받아서 팽창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다른 물리 실험실은 학부 학생들의 교육을 보조하기 위한 공간이었다.3) 19세기 말까지도 연구를 위한 실험실은 주로 화학자들의 공간이었다.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의 수제자였던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는 킬(Kiel) 대학교에 첫 직장을 잡았다. 그런데 이 대학에는 물리학 실험실이 아예 없었고, 그는 이론 연구만을 해야 했다. 헤르츠는 1885년에 칼스루에(Karlsruhe) 대학교로 옮겼지만, 여기도 사정이 비슷했다. 헤르츠는 이 대학교에 재직하던 1887~1888년에 전자기파를 발견했지만, 그의 발견은 잘 갖춰진 실험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대학에는 독립된 물리 실험실이 없어서 헤르츠는 큰 강의실 일부를 실험실로 사용해서 이 중요한 실험을 해야 했다.4) 전자기파의 발견 이후에 헤르츠는 더 유명한 본 대학교로 이직했지만, 여기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헤르츠는 본 대학교의 화학과 교수들이 매우 “사치스러운 실험실”을 가지고 있음에 비해 물리학 실험실은 제대로 갖춰진 게 없다고 한탄했다. 본 대학교에의 화학과 건물에는 용도별로 구분된 실험실이 여럿 있었으며, 심지어 교수들의 편의를 위해서 교수들의 아파트를 건물 내에 마련했을 정도였다. 이에 비해서 물리학 실험실은 초라하기만 했다. 실험 물리학을 하는 교수들이 모두 자기 실험실을 가지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실험실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겪었던 또 다른 문제는 실험실에 접근하는 외부인을 통제하는 것이었다.5) 자수성가한 독일의 물리학자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Joseph von Fraunhofer, 1787~1826)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19세기 초 프라운호퍼는 프리즘을 이용한 정밀한 실험을 통해 가시광선 스펙트럼에 수많은 선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는 이 검은 선을 정교한 색지움 렌즈를 만들기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프라운호퍼의 발명은 렌즈 산업의 주도권을 영국에서 독일로 옮길 정도로 중요한 발견이었기 때문에, 영국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물리학자들이 그의 실험실을 방문해 색지움 렌즈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다. 프라운호퍼는 실험실을 방문한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선 스펙트럼 라인의 존재를 보여주고 알려야 했지만, 비전적인 렌즈 제작의 비밀은 숨겨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그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구조를 실험실 겸 공장으로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전통적으로 수도사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화장실을 렌즈 작업장으로 개조하고 수도사의 개인 방을 자신의 실험실로 개조했다. 렌즈 작업장은 내부 직원에게는 개방되었지만 외부 방문객에게는 폐쇄되었고, 그의 실험실은 공장 직원에게는 폐쇄되었지만 외부 방문객에게는 개방되었다. 프라운호퍼를 방문한 외국 과학자들은 수도사들의 공용 공간인 화장실에는 출입할 수 없었지만, 프라운호퍼의 실험이 시연되는 실험실에는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원래 수도원이었을 때 개방된 공간은 폐쇄했고, 폐쇄적이었던 공간은 개방했다. 이러한 공간 구성을 통해 프라운호퍼는 렌즈 제작의 비밀을 숨긴 채 자신의 실험을 유럽 전역에 알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6)    


    대학의 물리학 실험실은 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교육을 위해서 설립된 실험실을 연구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충돌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물리학 연구소 중에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냈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의 사례는 이러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캐번디시 연구소는 18세기 영국의 귀족과학자였던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1731-1810)의 가계손인 데본샤이어 공작(7th Duke of Devonshire, 1808-1891)의 기부에 의해 1873년에 설립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은 당시 영국에서 최고의 물리학자로 평가되던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을 초대 소장으로 초빙했다.

 

    맥스웰은 그의 이름을 딴 맥스웰 방정식을 완성한 이론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는 영지를 운영하고, 저택을 짓고, 장부를 기록하는 영지 소유자의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는 “복식 부기(double-entry bookkeeping)가 서양 과학 사상사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할 정도로 실용적인 활동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했고, 당시 엔지니어였던 랑카인(William Rankine, 1820-1870)의 영향을 받아 교각에 걸리는 힘을 계산하기도 했다. 또 맥스웰은 전신 엔지니어 젠킨(Fleeming Jenkin, 1833-1885)과 공동연구를 수행해서 저항의 표준을 만드는 정교한 실험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표준과 단위의 차원에 대한 이론적인 논문을 쓰기도 했다.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이 물려받은 집을 증축하는 일을 직접 했던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수로 임용된 뒤에 건축가 포셋(W. M. Fawcett)과 함께 캐번디시 연구소의 건물을 설계했다 (그림 1 참조).7)

    캐번디시 연구소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를 위한 실험실’(research laboratory)이다. 그렇지만 이 연구소를 지을 때 케임브리지 대학은 이를 학부 학생들을 위한 물리학 강의를 보조하기 위한 실험실로 간주했다. 당시 영국의 정치인, 관료, 법률가, 성직자를 배출하던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연구’라는 개념은 물론, 과학이나 물리학도 아직 생소했다. 체계적인 대학원 과정도 물론 존재하지 않았다. 학교의 중심은 영국 제국을 운영할 학부생을 지적・육체적으로 훈련해서 졸업시키는 것이었다. 물리학 교수인 맥스웰도 학부 학생들을 위한 수업을 진행했고, 학부 학생들의 실험을 지도해야 했다. 그렇지만 맥스웰은 취임 초부터 이 연구소가 새로운 연구를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정밀한 측정을 하고, 이러한 측정과 이론을 결합해 새로운 현상을 탐구하는 것이 캐번디시 연구소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다. 맥스웰은 학부 학생 교육을 보조하는 실험을 ‘예증 실험’(experiment of illustration)이라 불렀고, 연구소에서 수행해야 하는 진짜 실험을 ‘연구 실험’(experiment of research)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자신의 취임 강연에서 이 둘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증 실험의 목적은 학생이 과학적 아이디어를 파악할 수 있도록 과학적 아이디어를 조명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는 학생이 적절한 과학적 아이디어를 연관시킬 수 있도록 현상을 학생의 감각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학생이 이 아이디어를 이해했다면, 이를 설명하는 실험은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반면에 연구 실험에서는 이것이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해 실험 연구에서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이미 본 것을 측정하여 어느 정도 규모의 수치적 추정치를 얻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실험, 즉 어떤 종류의 측정이 수반되는 실험은 물리 실험실의 적절한 작업입니다.8)

    실험을 두 가지로 나눈 뒤에 맥스웰은 정밀한 실험이 진행되면서 물리학의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과학의 역사가 잘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실험실에서는 무개를 재고 측정하는 방법, 시간을 관찰하는 방법, 광학적 방법, 전기적 관찰 방법처럼 측정 방법에 따라서 기구의 위치가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그의 취임 강연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 실험을 꾸준히 진행할 때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과학 비평의 학파’(school of scientific criticism)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으로 마무리되었다.

    문제는 학부 학생들이 자주 들락날락할 때 이러한 정밀한 연구 실험이 방해를 받는다는 데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 연구소는 학부 학생들의 실험 교육을 위해 세워진 것이었고, 따라서 학생들의 출입을 막을 ‘규율’을 따로 만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맥스웰은 정밀한 실험이 진행되는 연구실에 학생들의 실질적인 접근을 어렵게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연구소의 1층을 정밀 연구실험을 위한 닫힌 공간으로, 2층을 학생에게 완전히 개방된 공간으로, 그리고 3층을 학생들에게 거의 닫힌 공간으로 구분했다.

    그림 1에서 보듯이 캐번디시 연구소의 1층 맨 구석에 있는 실험실은 고가의 실험기기를 갖춰서 정밀한 자기(磁氣) 측정을 하는 방이고, 그 옆 실험실에는 표준 시계와 표준 추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 두 방은 연구소 내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방해를 덜 받는 방이어야 했다. 1층에는 복도가 없이 방과 방이 연결되어 있었고, 따라서 학생들이 이 두 방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방을 여러 번 거쳐야 했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학부 학생들이 정밀 실험이 행해지는 방에 접근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1층의 또 다른 방에는 정밀한 저울이 있었고, 열역학 실험을 위한 방도 있었다. 거리와 인접한 방은 실험 기기 상자를 푸는 방, 기기를 수리하는 작업실이었다.


    반면에 2층의 큰 실험실은 학부 학생이 실험하는 공간이고, 그 옆에 교수 연구실, 기기실, 준비실, 그리고 학부 강의실이 있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2층의 강의실과 실험실에 자유롭게 들락날락할 수 있었다. 여기에 맥스웰 자신이 수업을 위한 실험을 준비하는 방도 있었다. 2층은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이 가능한 공간이었다. 반면에 3층에는 음향학 실험실, 제도실, 광학 실험실, 전기 실험실, 그리고 사진 현상을 위한 암실이 위치했다. 3층은 고급 실험에 관심이 있는 학부 학생이나 학부를 졸업하고 펠로(fellow)의 자격으로 실험실에 머물러 있는 연구원이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고급 실험에 관심이 없는 학생들은 2층에서 강의를 듣고 역시 같은 층에서 일반 실험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연구소에는 ‘출입금지’라는 표지판 하나 붙어있지 않았지만 (그리고 이런 표지판을 붙일 수도 없었지만), 연구소의 구조는 학생들이 정밀 기기가 있는 1층과 3층의 방에 출입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무척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연구소의 공간 배치는 맥스웰이 생각하던 이상적인 물리학 교육과 연구의 역할분담, 그리고 예증 실험과 연구 실험에 대한 엄격한 구분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렇게 교육을 위한 실험과 연구를 위한 실험, 그리고 이 각각을 위한 공간은 점차 분리되어 갔다. 주로 20세기 이후에 나타난 이 과정은 대학교에서 물리학 실험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이를 위한 공간이 확장되었던 과정과 그 궤를 같이했다.

 

 

 

홍성욱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