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아해에 닿아 있는 휴양 도시 두이노를 62세의 물리학자가 부인과 딸과 함께 휴가차 들렸다. 북 아드리아해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가족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물리학자는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던 우울증 속에 스스로 세상과 작별을 고할 준비를 했다. 1906년 9월 5일, 오스트리아 출신의 이론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은 목을 매어 자살했다.

볼츠만의 죽음이 언급될 때면 종종 ‘악당’으로 소환되는 인물이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이다. 마흐는 비엔나 대학에서 귀납과학의 역사와 철학 교수로 있으면서 고전역학을 비판해왔고 철저한 경험주의에 근거하여 원자의 실재성을 부정했다. 원자론자였던 볼츠만은 마흐와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였으며 누적된 갈등과 이로 인한 피로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원자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이 볼츠만에게는 그만큼 심각했던 일이었을까? 볼츠만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물리학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의 세계는 역학적 세계관mechanical world view 혹은 기계적 세계관으로 표현된다. 역학적 세계관은 모든 물리 현상을 입자들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모든 열현상을 기체를 구성하는 입자의 운동으로 설명하는 기체 분자 운동론이 대표적인 예다. 때로는 원자로, 때로는 입자corpuscle나 분자molecule로 명칭은 달라졌지만, 19세기 역학적 세계관에서 보는 입자는 화학자들이 말하는 원자와는 달랐다. 화학원소마다 다르지도 않고 물질의 기본 단위라는 생각도 강하지 않았다. 현대에서 보는 원자와 달리 내부 구조에 대한 정교한 논의도 진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저 충돌의 역학법칙을 따르는 탄성을 지닌 입자면 족했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의 원자에 대한 생각이 정교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들을 원자론자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가 고민을 하게 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 물리학자들의 머릿속에서 입자/원자는 물리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건에 해당했다는 것이다.

역학적 세계관의 다른 버전은 mechanical의 두 번째 번역어에 해당하는 기계적 세계관이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은 톱니바퀴, 나사, 크랭크 같은 기계들을 사용하여 물리 현상의 메커니즘을 구현하는 모형을 제작했다. 대표적으로 영국 물리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은 유동 바퀴idle wheel 모형을 고안하여 전기와 자기의 상호작용을 설명했고 이 모형을 이용하여 변위전류를 발견하기까지 했다. 켈빈 경으로 알려진 윌리엄 톰슨은 물리적 메커니즘에 대한 기계적 모형을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을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기계적 모형 만들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볼츠만도 이런 기계적 모형 만들기에 익숙했고, 또 능했다. 일례로 1891년 볼츠만은 맥스웰 전자기 이론 강의를 위해 작동 기계 모형을 제작하여 전기 회로 간의 유도 작용을 설명하는 데 이용했다.[그림1]

역학적·기계적 세계관은 당시 물리학자들의 물리적 실재에 대한 관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계적 모형을 만든 물리학자들은 물리적 실재와 기계적 모형 사이의 유비analogy를 강조했고, 기계적 모형의 작동 방식을 통해 물리적 실재에서 일어나는 작동 방식을 모방해서 구현하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계적 모형이 물리적 실재를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물리 현상의 메커니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고 그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메커니즘 중에 한두 가지 정도를 기계적 모형으로 구현해 본다는 입장이었다. 어찌 보면 이렇게 물리적 실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유보적인, 때로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입장 덕분에 19세기 물리학자들은 물리현상에 대한 기계적 모형을 자유롭게, 장난감 다루듯이 만들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볼츠만은 19세기 역학적·기계적 세계관의 모범생이라 할 수 있다. 볼츠만은 물리 세계를 입자들의 운동으로 보는 입장에서, 맥스웰의 기체 분자 속도 분포 함수에 열광하고 그것을 보편적 법칙으로 끌어올리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단원자 기체 분자에 국한되어 있던 맥스웰 속도 분포함수를 다원자 분자로까지 확장하여 속도 분포 함수의 보편성을 이끌어냈다. 또한 볼츠만은 기체 분자들의 속도가 초기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든 간에 시간이 흘러 열평형 상태에 이르면, 기체 분자들의 속도는 맥스웰 분포함수를 따르게 되며 다른 방식의 속도 분포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처럼 초기 상태에 상관없이 모든 기체 분자의 속도 분포함수가 결국에는 맥스웰 속도 분포함수를 따른다는 것을 보이는 과정에서 볼츠만은 의도치 않게 열 현상이 비가역적 과정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어떤 상태에 있든 기체 분자들의 속도는 결국 맥스웰 속도 분포 함수를 따르는 상태로 귀결되며, 일단 그 상태에 도달하면 다른 상태로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열 현상은 한 방향으로만 일어나야 했던 것이다. 이런 비가역성은 역학적 세계관에서 우선시 되는 역학법칙과 충돌했다. 역학법칙은 시간에 대해 대칭적이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의 역학적 변화가 가능하다면 그것을 시간상으로 반대로 돌린 반대 방향으로의 역학적 변화도 가능해야 하는데, 열평형 상태에서 맥스웰 속도 분포 함수에 이르면 다른 상태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귀결은 이와 충돌했다.

볼츠만은 역학법칙과 열역학 제2법칙의 화해를 위해 확률적 해석을 끌어냈는데, 여기에도 역학적 세계관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볼츠만은 이것을 역학법칙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계의 초기 상태에 관한 문제로 규정함으로써 역학법칙을 구해냈다. 그는 열평형 상태로 도달하는 과정에서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가는 기체 분자들의 초기 상태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이런 초기 상태에 있을 확률이 매우 낮고 그에 비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가는 초기 상태의 확률이 엄청나게 크다고 해석했다. 1877년 볼츠만은 이 생각을 다양한 분자 상태에 놓일 확률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분자 상태는 존재할 가능성이 낮은 상태에서 좀 더 높은 상태로, 즉 존재할 확률이 높은 상태로 변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볼츠만은 열역학 제 2법칙을 확률적으로 해석했는데, 이런 해석에서 볼츠만의 머릿속에는 항상 공간을 움직이는 입자, 입자들의 배치와 속도가 그려져 있었다.

볼츠만처럼 역학적 세계관을 가진 물리학자들에게 마흐의 비판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마흐는 원자의 실재를 부정했다. 아니, 부정보다는 유보라는 입장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경험으로 입증되지 않은 원자라는 존재의 실재성이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그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입장이었다. 이런 마흐의 비판은 볼츠만과 같은 역학적 세계관에 속하는 물리학자들에게는 당혹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운동하는 원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것이었고, 그것으로 그동안 수많은 물리현상을 훌륭히 설명해왔으며, 그 훌륭한 설명들만으로도 원자의 존재는 입증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보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이런 질문은 역학적 세계관에서는 제기되지 않았던 새로운 종류의 질문이라는 점에 있었을 것이다. 입자와 역학적 운동만 제외하면 역학적 세계관에서는 물리적 실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물리적 실재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물리적 실재가 무엇인지 알기 힘들다는 입장이 그런 질문을 막았던 것이다. 전혀 다른 종류의 질문에 당면한 물리학자들의 답변은 그 질문을 던진 마흐에 비해 세련되지도 정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젊은 세대의 물리학자들은 마흐에게 열광했다.

그렇다면 결국 볼츠만의 죽음은 마흐의 원자론 공격 때문이었단 말인가? 볼츠만이 죽기 한해 전, 아인슈타인이 브라운 운동 논문을 통해 원자의 존재를 증명했는데 볼츠만은 그것도 모르고 죽었을까? 개인의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대학 교수 자리에서 기인했을 과도한 업무의 부담감, 과학적 논쟁에서 쌓였던 피로감 등도 그의 정신 건강과 육체 건강 모두를 악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더해 그의 물리 세계, 그 세계를 지탱하는 역학적 세계관의 쇠퇴를 목도하는 것도 볼츠만에게는 깊은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젊은 세대의 물리학자들은 더 이상 기계적 모형을 만들지 않았고, 기계적 유비를 통해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지도 않았다. 볼츠만이 입자와 그 운동, 그것의 속도 분포라는 미시적 메커니즘을 통해 열역학을 일구고 열역학의 세상을 그려낸 것에 비해, 아인슈타인 같은 신세대 물리학자들은 미시적 세계에 대한 가설 없이 온도와 열량과 같은 거시적 물리량들의 관계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열역학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이런 점에서 1906년 볼츠만의 죽음은 19세기에 번성했던 역학적 세계관의 물리 세계의 붕괴를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P. M. Harman, Energy, Force, and Matter: The Conceptual Development of Nineteenth-Century Physics (Cambridge Univ. Press, 1982)
  2. Christa Jungnickel and Russell McCormmach, Mastery of Nature: Theoretical Physics from Ohm to Einstein, 2vols. (The Univ. of Chicago Press, 1986)
박민아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