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Maria Goeppert Mayer, 1906-1972는 40년 인생에 걸쳐 처음으로, 물리학자로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었다. 박사가 된 직후부터 15년 동안 그의 이름 앞에는 “자원봉사voluntary”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자원봉사 조교수voluntary assistant professor”라는 창의적인 타이틀을 달고 다닌 적도 있었다. 1946년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시카고 대학교와 아르곤 국립연구소에, 각각 파트타임이기는 했지만,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봉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남의 연구를 돕는 일을 벗어나 그녀 자신의 독립적인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작한 원자핵 껍질 모델 연구로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196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의 역사가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여성 과학자는 2018년 수상자인 도나 스트리클랜드Donna Strickland, 1959-를 포함해 총 세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한 명은 마리 퀴리Maria Curie, 1867-1934이다.) 그런데 여성 수상자가 세 명뿐이 안 되는데도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의 이름은 낯설다. 그의 원자핵 연구가, 보어의 전자 궤도로부터 시작된 20세기 원자모형 발전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어, 상대적으로 이론적 참신함이 커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첫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파리에 유학 온 외국인 여성의 불굴의 성공기를 보여준 마리 퀴리나, 남성 과학자 사회에서 희생양의 전형처럼 그려지는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1958같은 여성과학자에 비해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가 없다는 점도 그녀를 주목하지 않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평범함 때문에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과학자로 살아가는 동시에 현모양처의 전통적 미덕을 교육받았던 수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마리아 괴페르트에게는 두 개의 롤모델이 존재했다.1 첫 번째 롤모델을 제공한 것은 괴팅겐 대학의 소아과 교수였던 아버지 프리드히리 괴페르트Friedrich Göppert, 1870-1927였다. 마리아 괴페르트는 교수 가문의 전통을 이어 6대째 교수가 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신도 과학을 공부하고 교수가 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아버지는 무남독녀 외동딸에게 태양 일식 관측용 검은 렌즈를 만들어 주며 과학 공부를 격려했고, 딸을 현모양처로 키우려던 어머니의 잔소리로부터 딸의 과학적 호기심을 보호해 줬다.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천상 과학자였던 아버지를 더 좋아했지만, 사교성 있는 교수 부인의 역할에 충실했던 어머니 또한 그녀의 롤모델 역할을 했다. 괴팅겐의 교수 부인들에게는 홈파티를 열어 괴팅겐 대학의 사교 모임을 이끄는 역할이 주어졌었는데, 어머니 마리아 괴페르트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밤이 늦어 밴드가 돌아가면 새벽까지 직접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괴페르트 가에서 열리는 파티를 흥겹게 만들었다. 마리아 괴페르트는 과학자와 현모양처라는 두 가지 롤모델을 동시에 받아들였고 두 역할 모두를 좋아했지만, 현실 세계에서 두 역할을 조화시키는 것은 그다지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1930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녀가 간 길은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괴팅겐 대학에 입학한 마리아 괴페르트는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의 총애를 받았으며 행렬역학을 발전시킨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 밑에서 양자역학을 전공했고 양자역학의 이론, 특히 수학 계산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남편 조셉 에드워드 메이어Joseph Edward Mayer, 1904-1983를 따라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으로 옮겨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가 된 후에는 그 길을 계속 걸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교수 부인으로서 마리아 메이어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를 낳아 기르고 동료 학자들, 특히 유럽 출신 학자들을 위해 흥겨운 파티를 열며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나갔다. 하지만 연구에서는 아버지처럼 교수가 되기가 쉽지 않았다. 교수의 친인척, 특히 교수 부인의 고용을 막는 친족고용금지법에 따라 그녀의 존스 홉킨스 취업은 금지되었다. 그 법이 없었더라도 남성 과학자들마저 일자리를 잃던 1930년대 대공황기에 여성 과학자가 번듯한 일자리를 얻기는 힘들었다. 양자역학의 발전이 유럽보다 한발 뒤처져 있던 미국 물리학계의 상황도 마리아 메이어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미국 물리학계에서는 양자역학 전공자를 그리 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리학과는 그녀에게 독일 물리학자들과의 교류를 돕는 간단한 일을 맡겼고, 연구는 남편이나 유럽에서 온 한 물리화학자와만 공동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다.

 

능력이 출중한 비정규직, 동시에 교수 부인. 이 모순된 두 지위의 공존에 주변 사람들은 불편해했다. 그중에서 가장 불편해했던 사람은 마리아 메이어 본인이었다. 1939년 남편이 홉킨스에서 해고되자 그녀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남편이 불이익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어 죄책감을 느꼈다. 다행히 남편이 컬럼비아 대학에 자리를 잡아 가족들은 모두 뉴욕으로 이주했다. 컬럼비아에서 그녀는 “자원봉사 조교수”라는 이상한 타이틀을 얻었다. 이는 월급은 주지 않겠지만 연구는 해도 된다는 학교 측의 이상한 배려였다.

1946년 메이어 가족은 그녀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연구자로 환영받게 되는 시카고로 이주했다. 그녀는 시카고 대학교의 물리학과와 핵연구소Institute for Nuclear Studies, 그리고 아르곤 국립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에 반반씩 고용되었다. 파트타임이었지만, 그녀는 시카고에서 인생 처음으로, 자신의 연구를 통해 제대로 된 월급을 받았다. 월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 그녀의 제대로 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누군가의 조수로, 타인의 연구를 돕는 입장이었던 것에서 벗어나 이제 그녀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시카고의 분위기는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다. 파시즘과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다수의 유럽 출신 과학자들이 이곳을 고향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1938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 1925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이자 괴팅겐에서 그녀의 박사 논문 심사에 참여했던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 1882-1964, 곧 수소 폭탄의 아버지로 악명을 떨칠 헝가리 출신의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1908-2003가 시카고에 있었다. 그녀는 특히 텔러와 학문적 교류가 많았는데, 곧 그와 함께 원소의 기원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에서 마리아 메이어는 자연계에 동위원소가 풍부하게 존재하는 원소의 목록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원자핵에 포함된 양성자나 중성자의 수가 50개이거나 82개일 때 동위원소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양성자의 수가 50개인 주석에는 10개의 동위원소가 존재했다. 중성자의 수가 50인 원자핵에도 6개의 원소의 동위원소가 존재했고, 중성자 수가 82개일 때는 7개의 동위원소가 존재했다.

마리아 메이어는 이 수들이 소위 말하는 “마법수magic number”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법수magic number”는 1933년 독일 물리학자 발터 엘자서Walter Elsasser, 1904-1991가 찾아냈다. 엘자서는 전자껍질 모형을 원자핵에 적용하여, 중성자나 양성자의 개수가 2, 8, 20, 28의 마법수에 해당할 때, 중성자나 양성자는 특정 에너지 준위를 꽉 채우고 원자핵의 결합에너지가 커져 안정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20까지는 잘 맞았지만 28에는 잘 맞지 않았다. 원자핵 껍질 모형에 회의적이었던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Paul Wigner, 1902-1995는 원자핵 껍질 모형에 회의를 나타내면서 이 숫자들을 “마법수”라고 비꼬았다.

위그너를 비롯해 당시 물리학자들은 원자핵 껍질 모델에 회의적이었다. 전자껍질 모델에서는 원자핵이 만든 포텐셜 우물potential well 주변의 궤도에 전자가 있는 것으로 상정했다. 하지만 원자핵에는 중성자와 양성자가 있고 그 두 핵자 간의 상호작용이 강해서 전자껍질 모델을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원자핵을 균질한 물방울처럼 생각하는 물방울 모델liquid drop model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보어가 제안했던 물방울 모델이 핵분열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는 것도 이 모델에 대한 신뢰를 높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 메이어는 2, 8, 20, 28 외에 50, 82, 그리고 중성자의 경우에는 126도 마법수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엘자서의 논문에 주목했고 원자핵 껍질 모델을 적용해서 마법수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지만, 20이 넘는 마법수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그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면 28 대신 30이 마법수가 되어야 했다. 이때 페르미의 한 마디가 실마리를 던져줬다. 페르미는 중성자나 양성자의 스핀과 궤도 사이의 커플링을 고려해보라고 조언했다. 즉, 핵자 입자의 스핀 방향과 궤도 회전 방향이 반대거나 혹은 같을 때 그로 인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안정적인 에너지 준위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반영하여 중성자나 양성자의 원자핵 내의 에너지 준위를 계산하자 마법수가 도출되었다. 메이어의 연구를 통해 원자핵 내의 각 핵자들은 다른 핵자들에 영향받지 않고 원자핵 내의 평균장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리아 메이어는 원자핵의 껍질 모델을 입증하는 증거들을“On Closed Shells in Nuclei”라는 제목으로 1948년과 1949년 피지컬 리뷰Physical Review에 출판했다.3 그 무렵 그녀는 독일의 연구자들도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독일 연구자들은 그녀와는 전혀 교류가 없던 채로, 독립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과학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동시발견 혹은 복수발견이라고 하는 사건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한 명인 한스 옌센J. Hans D. Jensen, 1907-1973과 1950년 처음 만나 공동 연구를 시작했고, 두 사람은 껍질 모델에 관해 함께 책을 내고 그 공로로 1963년 노벨물리학상을 1/4씩 나눠 가졌다. 그해 나머지 1/2은 마법수에 회의적이었던 위그너에게 돌아갔는데, 그는 두 사람과는 별개의, 원자핵에 대한 이론적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 이후 연구자로서 마리아 메이어의 삶은 평탄하게 나아갔다. 1956년에 미국 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의 회원으로 뽑혔고, 1960년에는 UC 샌디에고U.C. San Diego 대학 물리학과 교수가 되어 54세 나이에 생애 처음으로 번듯한 정규직에 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뇌졸중이 그녀를 덮쳤다. 이로 인해 인해 정교수가 되어 하려던 여러 계획들을 모두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된 후에 그녀는 연구를 이어나갔고 노벨상의 영예를 얻었다.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의 삶은 과학연구, 특히 여성의 과학연구에 몇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 첫째는 독립 연구자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의 중요성이다. 성공적인 연구학파research school의 조건에 대해 연구했던 과학사학자 모렐J. B. Morrell은 그 조건 중 하나로 가능한 빨리 자신의 이름을 달고 논문을 출판하는 것의 중요성을 꼽았다. 자신의 이름을 단 논문 출판은, 지도교수의 조수로서 연구를 돕는 역할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연구주제를 가지고 독립적인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의 노벨상 수상 연구가 제대로 봉급을 받기 시작한 194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전에도 그녀는 몇 번 연구로 돈을 받기는 했지만 정기적이지 않았고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연구 계산을 돕거나 다른 연구 프로젝트의 조수 역할을 맡는 것이었다. 1946년부터 제대로 봉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다시 말하면 독립 연구자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연구는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독립 연구자로서의 학문적, 사회적 지위의 확보는 생산성 있는 연구를 위해 매우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첫 번째 시사점과 관련된 두 번째 시사점은, 여성연구자들의 독립 연구자로서 지위에 관한 것이다.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나 그보다 먼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를 보면 남편의 존재는 여성 연구자들이 독립 연구자로 인정받는 데 있어 오히려 득보다는 실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구체적인 양상은 달랐다. 마리 퀴리는 남편이 공동 연구자였기에 조수로 여겨진 반면,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미국 대학의 친족고용금지법이 크게 작용했다. 마리 퀴리의 경우에는 남편 피에르 퀴리도, 마리 퀴리 본인도 마리 퀴리가 독립 연구자로서 인정받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반면,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남편도, 본인도 이를 위해 큰 노력을 하지 않았던 점도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 괴페르트 메이어는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남편에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독립 연구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컬럼비아 대학에서 연구공간만 제공하면서 “자원봉사 조교수”라는 이상한 직함을 주었을 때도 크게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연구자로서의 롤모델과 어머니에게서 배운 현모양처로서의 롤모델 사이의 균형잡기 속에서 그녀는 독립성에 대한 요구를 강하게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문헌

  1. Robert S. Sachs, “Maria Goeppert Mayer, 1906-1972, A Biographical Memoir,” in Biographical Memoirs of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1979), pp. 309-328.
  2. Maria Goeppert Mayer, “The Shell Model”, Nobel Lecture, December, 12, 1963
  3. Sharon Bertsch McGrayne, Nobel Prize Women in Science: Their Lives, Struggles, and Momentous Discoveries (Birch Lane Press, 1993)
박민아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