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1월 11일, 파리의 라듐 연구소에서는 얇은 알루미늄판에 폴로늄에서 나온 알파 입자를 쏘는 실험이 진행 중이었다. 알루미늄판에서 방출되는 양전자를 관찰하던 중 예상치 못한 현상이 발견되었다. 방사선 소스인 폴로늄을 제거했는데도 알루미늄에서는 계속해서 양전자가 방출되었다. 양전자 방출은 단 몇 분간, 그것도 지수함수를 그리며 급격히 감소하는 양상을 보였지만, 이 현상의 의미는 분명했다. 알파 입자, 즉 헬륨 이온(He2+)과 부딪힌 알루미늄이 방사성 물질로 바뀐 것이다. 화학 분석 결과 이 물질은 인(P)의 방사성 동위원소라는 것이 밝혀졌다. 과학의 역사상 최초로 인간이 원소 변환에 성공한 것이다.

1934년 2월 10일 네이처Nature에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의 인공적인 생산”이라는 제목의 한 페이지짜리 짧은 논문이 실렸다. 논문에서 과학자들은 낯익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퀴리Curie. 하지만 마리 퀴리의 M이 아닌 I로 시작하는 또 다른 퀴리, 이렌느 퀴리Irène Joliot-Curie, 1897-1956였다.

이렌느 퀴리의 성장 환경은 어머니인 마리 퀴리를 비롯해 당시 대부분의 여성 과학자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를 부모로 두었다는 점에서 이렌느 퀴리의 삶은 시작부터가 남달랐다. 이렌느 퀴리의 학창 시절 또한 평범하지 않았다. 이렌느 퀴리는 한동안 친구들과 함께 홈스쿨링을 받았다. 이렌느의 부모처럼 같이 공부했던 친구들의 부모들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화학을 가르쳤던 장 페렝Jean Perrion, 1870-1942은 브라운 운동에 대한 연구로 192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고, 수학을 가르쳤던 폴 랑주뱅Paul Langevin, 1872-1946은 초음파 탐지기를 개발한 뛰어난 물리학자였다. 물리학을 담당했던 마리 퀴리와 당시 먼저 세상을 떠난 피에르 퀴리까지 포함해서, 네 명의 물리학자는 생전에도 가까이 살면서 아이들의 교육을 함께 했고 죽어서는 프랑스 위인들이 안장된 팡테옹에서 사후의 삶을 함께 했다.

 

노벨상 메달이 집에 세 개나 있고 친구의 집에도 노벨상 수상자가 있는 환경 속에서 이렌느 퀴리가 과학자의 삶을 선택한 것은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피아니스트이자 문학가가 된 동생 이브 퀴리Ève Curie, 1904-2007의 선택이 낯설게 여겨질 정도로 홈스쿨링을 함께 한 친구들도 대부분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당시 대학 진학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던 여성 과학자들과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남성 주도의 과학계에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과학자로서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던 마리 퀴리와도 달랐다.

굳이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알리기 위해 따로 노력할 필요 없이, 퀴리라는 이름 자체가 모든 것을 대신해줬다. 퀴리라는 이름이 그녀에게는 큰 자산이었지만 가끔은 제약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부모의 후광 속에서 남들보다 편하게 시작할 수 있었지만, 부모의 이름에 가려 누군가의 딸로만 주목받기 쉬웠던 것이다. 이는 2세대 과학자 자식들이 공통적으로 처한 상황이었는데, 닐스 보어의 아들 아게 보어나 J. J. 톰슨의 아들 G. P. 톰슨, 그리고 이렌느 퀴리 모두가 상대적으로 부모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했다.

1926년 이렌느 퀴리는 라듐연구소의 동료였던 프레더릭 졸리오Frédéric Joliot-Curie, 1900-1958와 결혼했다. 어울리지 않아 보였던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주변 사람들은 조금 당황스러워했다. 이렌느 퀴리는 무뚝뚝하고 내성적이며 꾸미는 데에도 관심이 없었던 반면, 프레더릭 졸리오는 주변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는 사교적인 성격이어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예상외로 잘 맞는 커플이었다. 프레더릭 졸리오는 피에르 퀴리를 흠모했는데, 차가운 이렌느 퀴리의 내면에 숨겨진 섬세한 따스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렌느 퀴리는 연구소에 온 후배에게 실험 기술을 가르치다가 그의 영민하고 사교적인 성격에 반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졸리오-퀴리Joliot-Curie”를 성으로 택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논문에는 각자의 결혼 전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인공 방사성 원소 발견에 이르는 그들의 공동 연구는 1929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를 다른 물질에 쏘았을 때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방사선 소스인 폴로늄을 다루는 일은 10대 시절부터 작업을 해왔던 이렌느 퀴리의 전문 분야였다. 프레더릭 졸리오는 방사선 입자나 양전자 같은 입자의 궤적이 나타나는 이온 챔버ionization chamber나 구름상자cloud chamber 장비를 개선하는 일을 담당했다.

 

1933년 초, 졸리오-퀴리 부부는 붕소, 불소 알루미늄, 나트륨, 베릴륨 등의 원자에 알파 입자를 쏘는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당시 연구자들은 원자핵에 알파 입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이 붕괴되고 그 결과 양성자가 방출된다고 생각했다. 졸리오-퀴리 부부도 이런 실험 결과를 예상하면서 다양한 원자핵에 알파 입자를 쏘았다. 그 결과 기대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원소에서 양성자 방출이 관찰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원소에서는 중성자 방출도 관찰되었고, 양전자도 관찰되었다. 또한 베릴륨에서는 양성자 방출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졸리오-퀴리 부부는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알파 입자를 쏜 원자핵에서는 일차적으로 양성자가 발생하는데, 때로는 양성자가 중성자와 양전자로 붕괴되어 방출되기도 한다. 즉, 중성자와 양전자의 방출은 양성자의 붕괴로 인한 2차 산물이기 때문에, 원자핵에서는 양성자, 중성자, 양전자가 동시에 발견되는 것이다. 그런데 베릴륨에서는 양성자가 검출되지 않고 중성자와 양전자만 관측되었다. 이는 베릴륨에서 발생하는 중성자와 양전자가 양성자의 붕괴로 인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일차적으로 발생한 양성자가 100% 중성자와 양전자로 붕괴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이에 졸리오-퀴리 부부는 베릴륨에서 나오는 중성자는 알파 입자에 의한 것이지만, 양전자는 폴로늄에서 방출되는 감마선이 베릴륨의 핵에서 전자와 양전자의 쌍으로 변환되어 나온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해 10월에 열린 7차 솔베이 회의에서 졸리오-퀴리 부부가 이러한 결과를 발표했을 때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특히 베를린 대학에서 온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1878-1968는 본인도 그 실험을 했지만 양성자만 관찰할 수 있었다면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양전자가 방출된다면 그 양전자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도 반박의 주요한 근거 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실망에 차서 파리로 돌아온 부부는 자신들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 설계에 나섰다. 중성자와 양전자의 방출이 항상 같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은 얇은 알루미늄판에 쏘는 알파 입자의 에너지를 감소시키면서 방출되는 입자를 관찰했다. 그들은 얇은 알루미늄판에 알파 입자를 쏘면, 알파 입자가 알루미늄 원자핵에 잡혔다가 양성자로 방출되거나 또는 중성자와 양전자로 방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파 입자의 에너지를 감소시켜 원자핵에서 변환을 일으킬 만큼의 충분한 에너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중성자뿐만 아니라 양전자도 방출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실험을 수행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알파 입자의 에너지가 감소함에 따라 어느 시점에서 중성자는 방출되지 않았지만, 양전자는 알파 입자를 더 이상 쏘지 않을 때에도 일정 시간 방출된다는 것이 관찰되었던 것이다. 이는 중성자와 양전자가 함께 방출된다는 그들의 가설이 틀렸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결과였다.

 

폴로늄 소스를 제거하여 더 이상 알파 입자가 나오지 않을 때, 알루미늄 판에서 중성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상태에서도 양전자는 방출되었다. 이는 중성자의 발생은 알파 입자에 의한 것이지만 양전자의 발생은 알파 입자에 의한 일차적인 효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거기에 양전자가 방출되는 양상이 일반적인 방사성 원소에서 보이는 특징, 즉 시간에 따라 지수적으로 감소하는 양상을 띤다는 것은 양전자의 방출이 방사성 원소의 붕괴 결과라는 것을 의미했다. 추가적인 실험 결과로 이 방사성 원소의 반감기가 3분 15초라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알파 입자를 쏜 알루미늄을 염산에 녹였을 때 나오는 수소를 모은 시험관이 방사능을 띤다는 것을 통해 방사성 동위원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

결국 그들은 알루미늄에 알파입자, 즉 원자량이 4인 헬륨 이온을 쏘아 알루미늄 원자핵(원자번호 13, 원자량 27)을 인의 방사성 동위원소(원자번호 15, 원자량 30)로 변환시켰던 것이다. 중성자는 변환 과정에서 방출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양전자는 1차 변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인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같은 원자량을 가지면서도 안정된 상태인 규소로 바뀌는 2차 변환 과정에서 방출되는 것에 해당했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붕소와 마그네슘에 대해서도 동일한 실험을 수행했고 그 결과 붕소는 반감기 14분, 마그네슘은 반감기 25분이 되는 동위원소로 변환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 달 후 네이처Nature에 실린 논문은 겨우 한 페이지에 불과했지만, 처음으로 인간의 하나의 원자를 다른 종류의 원자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논문이 되었다.

1935년 이렌느 퀴리와 프레더릭 졸리오는 인공방사성 원소의 발견으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1903년 피에르 퀴리와 마리 퀴리의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 1911년 마리 퀴리의 노벨 화학상에 이은 퀴리 가문의 세 번째 노벨상 수상이었다. 마리 퀴리는 딸 부부의 발견에 “오래된 우리 연구소가 영광스러운 날들로 다시 돌아가겠구나” 라며 감격했지만, 다음 해에 이루어진 시상식을 보지 못하고 1934년 여름 눈을 감았다.

 

 

어쩌면 마리 퀴리가 꿈꿨던 라듐 연구소의 영광스러운 날들은 조금 일찍 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인공 방사능 원소 변환을 발견하기 전에 두 번이나 발견의 기회를 놓쳤다. 1932년 그들은 알파 입자를 베릴륨에 쏘면 미지의 선이 방출되고, 그 선이 둘러싼 파라핀에서 양성자가 방출되는 것을 관찰했다. 졸리오-퀴리 부부는 양성자를 방출시키는 미지의 선을 감마선이라고 추정했고, 감마선이 양성자를 방출시키는 것을 전자와 X선의 상호작용을 다룬 컴프턴 효과로 해석했다.

하지만 이 실험 결과를 접한 다른 과학자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러더퍼드는 그 해석을 믿을 수 없다며 화를 냈고, 이탈리아 물리학자 에토르 마조라나Ettore Majorana는 “멍청하긴. 중성인 양성자(중성자)를 발견하고도 그걸 깨닫지 못하다니”라며 냉소를 보냈다. 이 논문이 나온 한 달 뒤, 채드윅은 실험 결과를 보강하여 중성자의 발견을 발표했다.

1932년 졸리오-퀴리 부부는 양전자를 발견할 기회도 놓쳤다. 폴로늄 소스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를 베릴륨에 쏘는 실험을 하던 중 그들은 소스로부터 멀어지는 양전하를 띤 전자의 흐름을 관찰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것이 방사능 소스로 다가가는 전자라고 해석해서, 양전자의 발견 기회를 미국의 앤더슨에게 양보해야 했다.

 

이 안타까운 사건들은 이렌느 퀴리와 졸리오 퀴리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보여준다. 폴로늄 소스를 이용한 알파 입자 실험에서 그들은 어느 팀보다도 뛰어났다. 무엇보다 강력한 폴로늄 샘플로 양질의 알파 입자 소스를 만드는 데 있어서 이렌느 퀴리를 능가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또한 방사능에 관한 물리 분석과 화학 분석 모두에 뛰어났던 것도 졸리오-퀴리 부부의 강점이었다. 이런 강점을 바탕으로 라듐 연구소는 방사능 원소를 정제하고 규명하는 화학적 연구 쪽으로 연구 방향이 향해 있었다. 반감기가 3분 15초에 불과한 인의 동위원소를 화학적으로 분리해 냈던 것도, 화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졸리오-퀴리 부부는 실험에 있어서는 물리, 화학, 분야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동시대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상대적으로 물리 이론적인 부분이 약했다. 중성자나 양전자 발견의 기회를 놓쳤던 것은 그들이 물리 이론적인 사고가 약했음을 보여준다. 도대체 그 입자가 어디에서 왔는가, 그만큼 큰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가, 질량이 없는 감마선이 그에 비해 엄청나게 무거운 양성자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같은 물리적 질문을 던지는 데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러더퍼드와 채드윅이 있었던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는 방사능 현상을 원자 구조와 연결시켜 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중성자의 경우에는 1920년 러더퍼드가 어느 강연에서 그 존재를 예견했을 정도로 원자 구조에 대한 관심과 직관이 강하게 발달한 곳이었다.

인공 방사성 원소 변환 발견 이후 이렌느 퀴리와 프레더릭 졸리오의 공동 연구는 줄어들었다. 이렌느 퀴리의 논문 75편 중 두 사람의 공동 연구는 33편에 해당하는데, 이들의 공동 연구는 1929년부터 4~5년간에 집중되었고 그 이후에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 프레더릭 졸리오는 핵물리학 쪽으로 연구의 방향을 선회한 반면에, 이렌느 퀴리는 폴로늄을 이용한 방사능 연구에 계속 매진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 이후 이렌느 퀴리는 몇 차례를 제외하면 대중들의 시선 속에서 멀어져갔다. 이렌느 퀴리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좌파적인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이런 정치적 지향 속에서 1936년 잠깐 과학연구부 차관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제외하면 이렌느 퀴리는 조용한 삶을 살았다. 라듐 연구소에 몸담고 있었지만 연구소 운영은 부모님의 공동 연구자였던 드비에른에게 맡기고 본인은 연구에만 전념했다. 프레더릭 졸리오가 공산당에 가입하고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노벨상 이후,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렌느 퀴리는 앞에 나서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아이들을 돌보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어린 딸을 시아버지에게 맡기고 연구에 빠져 살았던 어머니로 인해 느꼈던 외로움을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설명도 있다. 오랜 시절 방사능에 노출되면서 생긴 건강 이상도 이렌느 퀴리의 연구와 사회 활동을 종종 중단시켰다. 1956년 이렌느 퀴리는 예기치 못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박민아
한양대학교 창의융합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