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최초의 우라늄 핵폭탄이었던 “작은 소년Little Boy”의 위력은 이름과 달랐다. 원폭 투하 후의 히로시마는 부서진 건물 잔해가 만들어낸 잿빛만이 가득했다. 과학자 대표로 히로시마를 시찰했던 한 미국 과학자는 히로시마의 참상에 충격받았다. 원폭 개발에 참여한 연합군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연구 결과가 가져온 비극을 앞에 두고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국에 억류되어 있던 독일 과학자들도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 충격은 대서양 너머에 있는 동료들의 것과는 그 종류에서 크게 차이가 났다. 이제 팜홀에 있었던 독일 과학자들은 원폭 투하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보자.

1945년 7월, 독일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10명의 과학자는 영국군 비밀 안가 팜홀Farm Hall로 옮겨져 반년간 억류되었다. 이들이 여기 오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독일의 패전이 현실로 다가오자 미 육군에서는 알소스 작전Alsos Mission을 펼쳐 독일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을 찾아냈다. 독일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최고 책임자였던 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 1889-19791, 프로젝트의 중핵이었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 등이 붙잡혔고, 원폭 개발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관련된 것처럼 보였던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와 오토 한Otto Hahn, 1879-1968도 함께 붙잡혔다.

 

알소스 특공대의 과학 분야 책임자는 전자스핀으로 유명한 사무엘 굿슈미트Samuel Goudsmit, 1902-1978였다.2 네덜란드 출신 유대인이었던 굿슈미트는 진작에 미국 대학에 자리를 잡았지만, 네덜란드에 남아있던 그의 부모는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다. 굿슈미트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도움을 청했고 그중에는 하이젠베르크도 있었지만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보다 전에는 미국에서 함께 전시 연구를 하자고 설득한 적도 있었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에 본인이 필요하다면서 독일에 남는 선택을 했었다. 이런 이유로 굿슈미트는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독일 핵무기 개발 과학자들에게 동료로서 특별한 호의를 베풀지는 않았다. 그는 연합군이 이미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옛 친구들에게는 한 조각의 정보도 주지 않았다. 핵무기 개발에서는 독일이 앞서 있다는 생각을 재확인한 채, 알소스 특공대에 붙잡힌 독일 과학자 중 몇몇은 연합군 연구에 합류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고 남은 열 명의 과학자들은 벨기에 수용소로 이송되었다.3

이미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연합군에게 독일 핵무기 과학자들의 가치는 어디에 있었을까? 새로운 핵무기 개발 정보 측면에서는 별 가치가 없었지만, 소련과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그들이 가진 정보가 소련에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연합군 측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는데, 한 미군 장군 입에서 그냥 모두 사살해 버리면 간단하지 않겠냐는 말까지 나왔다. 영국군 과학 책임자로 참여했던 한 과학자는 국제적 동료애를 발휘했다. 나치의 핵무기 개발이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 조사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 독일 과학자들을 영국 케임브리지셔의 시골 마을 팜홀로 데려왔다. 제대로 된 식사, 가벼운 산책, 자유로운 토론에 정중한 예우까지, 전쟁 이후 오랜만에 흡족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팜홀 내부 모든 곳, 개인 침실까지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그들의 대화는 모두 녹취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미 육군의 그로브즈 장군의 책상 위에 영어로 번역된 녹취 보고서가 올려졌다. 독일 과학자들은 한두 차례 도청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영국이 독일 비밀경찰을 따라오려면 한참이라는 이상한 자만심 속에서 그 가능성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로브즈 장군이 1960년대에 녹취록의 존재를 알린 후에나 ‘엡실론 작전’이라는 이름 하에 펼쳐진 도청 사실이 알려졌고 그 녹취록은 1990년대에 가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4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들었을 때, 독일 과학자들의 첫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과학자로서의 죄책감? 연합군과의 핵무기 레이스에서 졌다는 패배감? 독일이 핵무기 투하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안도감? 핵무기 성공 요인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

팜홀 책임자였던 리트너 소령에게서 첫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핵분열 발견자 오토 한이었다. 한의 첫 반응은 죄책감이었다. 자신의 발견이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 충격을 받은 그는 처음 이 가능성을 알았을 때 자살까지 생각했었다며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 마음을 진정시킨 한은 저녁 식사 자리에 모인 독일 과학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그들의 첫 반응은 부정이었다. 우리도 못 한 걸 연합군이 해냈다고? 믿기 힘들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부정했다.

하이젠베르크: 원자폭탄에 대해 그들이 우라늄이란 단어를 사용했나요? … 원자와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 원자폭탄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는 미국인 간호사가 허풍을 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걸 떨어뜨리면 2만 톤의 고성능 폭약과 그 효과가 똑같을 거야.”라고요. 하지만 실제로 작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5

허풍이었으면 좋겠다는 하이젠베르크의 기대는 BBC의 공식 방송으로 무참히 깨졌다. 폭탄 투하는 허풍이 아니었고 그것은 자신들이 개발하려던 그 원자폭탄이었다. “미국인들이 우라늄 폭탄을 가졌다면, 너희 모두는 이류가 된 것이군. 불쌍한 하이젠베르크.”6 한이 사태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독일 과학자들의 꽤 많은 논의가 원자폭탄의 기술적인 요소들에 집중하여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해서 오랫동안 과학사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것은 독일 과학자들, 그중에서도 하이젠베르크가 우라늄 235의 임계질량을 제대로 알았는가의 여부였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농축 우라늄 235를 사용한 폭탄이었다. 자연 상태의 우라늄 중 99.28%는 우라늄 238 상태로 존재하고 겨우 0.72%만이 그보다 중성자가 3개 적은 우라늄 235로 존재한다. 우라늄 238에서 핵분열 시 방출되는 중성자는 그 속도가 느려서 연쇄적인 핵분열 반응을 일으킬 수 없는 반면, 우라늄 235에서 방출되는 빠른 중성자는 주변의 우라늄에 충돌하여 추가적인 핵분열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런 핵분열이 연쇄반응으로 이어지는 데 필요한 최소 질량을 임계질량이라고 하는데, 우라늄 235에서 임계질량은 50kg 정도에 해당했다. 즉, 최소 50kg 이상은 농축 우라늄 235가 있어야 핵폭탄 제조가 가능하다는 말이다.7

독일 과학자들이 이 임계질량을 알고 있었는가? 하이젠베르크가 임계질량을 제대로 계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문서를 소련이 입수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실제로 공개된 적은 없어 그 소문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팜홀의 녹취록에서는 그 정보를 찾을 수 있을까? 원폭이 투하된 저녁, 하이젠베르크가 한 말을 들어보자.

하이젠베르크: 원폭 소식을 여전히 믿기는 어렵지만, 내가 틀렸을 수도 있겠지요. 약 10톤의 농축 우라늄이 있다면 가능하겠지만, 순수한 우라늄 235, 10톤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8

이 말만 보면 하이젠베르크는 임계질량을 너무 크게 잡은 것 같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에서 한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한: 하지만, 자네가 235, 50kg만 있으면 된다고 해 왔던 이유를 말해 보게. 지금 자네는 2톤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잖나.9

 

한의 질문에 따르면, 하이젠베르크는 우라늄 235의 임계질량이 50kg이라고 여러 차례 말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팜홀 저녁 식탁에서 그는 톤 단위로 임계질량을 말했다. 킬로그램이든 톤이든 간에, 중성자 반응의 평균자유행로mean free path가 크다는 것이 그의 추론의 근거였다. 조금 후에 하이젠베르크는 생각을 정리해서 다음과 같이 근거를 밝혔다.

하이젠베르크: 순수한 [우라늄] 235라면, 각각의 중성자가 즉시 두 명의 자식을 만들어 매우 빠르게 연쇄반응이 일어날 겁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계산이 가능합니다. 순수한 235에서 중성자 하나가 두 개의 새로운 중성자를 만듭니다. 즉, 1,024개의 중성자를 만들려면 반응이 80번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80번의 충돌이 필요하고, 평균자유행로는 6cm가 됩니다. 80번 충돌을 얻으려면 [우라늄] 덩어리 반지름이 54cm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게 1톤 정도 될 겁니다. … 다음 방법을 쓰면 그보다 양이 적어도 가능하기는 할 것 같습니다. 빠른 중성자를 되돌리는 반사판으로 덮으면 1/4 정도만 있어도 됩니다. 납이나 카본으로 반사판을 만들면 밖으로 나가려는 중성자를 되돌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10

팜홀에서의 언급만 놓고 보면 하이젠베르크는 임계질량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한이 한 말을 보면 이미 전부터 하이젠베르크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이젠베르크의 진실은 무엇일까? 하이젠베르크만이 알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팜홀 녹취록에 나타난 임계질량을 둘러싼 혼란은 후에 세련되게 정리되어 독일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전쟁 연구를 변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전후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핵무기 과학자들은 그 혼란이 의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이전부터 임계질량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부풀려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 중 핵무기 개발을 어렵게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나치에 저항했고 평화 시를 대비하여 원자력 발전 연구는 계속해 나갔다. 우리는 할 능력이 있었지만, 인류를 위해 무기 개발을 하지 않은 도덕적인 과학자들이다, 라고.

정말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속인 것일까? 이어지는 논의를 살펴보면 그 주장이 맞을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자 이제 임계질량에 이어지는 동위원소 분리 방법에 대한 독일 과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자.

우라늄 235는 자연계에 0.72% 밖에 없어서, 임계질량을 얻으려면 우라늄 235를 우라늄 238로부터 분리하여 농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2차 세계대전 미국의 원폭 개발의 핵심 중의 하나가 바로 우라늄 235의 분리 농축법 개발에 있었다. 미국에서는 사이클로트론의 자석과 질량 분석법mass spectroscopy을 결합하여 개발한 전자기적 분리 방법, 기체의 무게에 따라 확산 속도에 차이가 나는 것을 이용한 기체확산법, 그리고 무거운 기체는 저온에, 가벼운 기체는 고온에 모이는 원리를 활용한 열 확산법을 결합하여 우라늄 235를 분리 농축했다. 산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실험실 수준의 방법을 공장 수준의 양산 체제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 미국 핵무기 개발의 중요한 성공 요인이었다. 그 결과 1945년 6월까지 생산된 우라늄 235는 총 5,770kg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1톤 임계질량을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5기의 원자폭탄 생산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독일 핵무기 개발에서 동위원소 분리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을까? 연합군의 원폭 소식을 들은 독일 과학자들이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바로 동위원소 분리 방법이었다. 전쟁 직전인 1939년 우라늄 235 분리 능력은 1mg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랬는데 어떻게 폭탄을 만들 수 있는가? 독일 과학자들은 가능한 분리 방법들을 모두 떠올렸다. 폰 바이재커는 원심분리기를 떠올렸고 한은 질량분석기를, 디브너는 광화학 처리법을 제시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가 아는 게 없다는 점은 확실하지요.”라고 말했고 여기에 뷔르츠는 “우리가 시도해 본 건 하나도 없지요.”라고 덧붙였다.11

그런데, 동위원소 분리 방법을 모른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말은 반만 맞는다. 사실 독일 과학자들은 미국에서 사용한 분리 방법 각각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전자기적 분석 방법에 이용된 질량분석법은 팜홀 대화 속에서 여러 차례 등장했다. 열 확산법은 독일 물리 화학자 클라우스 클루시우스Klaus Clusius가 1939년 염소 동위원소 분리 시 개발한 방법으로 팜홀에서는 “클루시우스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종종 거론되었다. 기체확산법도 그들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다. 몰랐던 것은 무엇일까? 다음 대화를 보자.

폰 바이재커: 클루시우스의 분리법을 생각해 보지요. 많은 사람이 동위원소 분리 연구를 했었는데, 어느 멋진 날 클루시우스가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원심분리법을 제외한다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동위원소 분리 문제를 완전히 무시했었습니다.

하이젠베르크: 그렇긴 하지만, 정교한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238에서 234를 분리하는 것과 238에서 235를 분리하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입니다.

하트렉: 작업을 할 인원들이 완전히 갖춰져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충분한 수단이 없었습니다. 수백 개의 우라늄 유기물을 만들어서 실험실 조교들로 하여금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화학적 분석도 하게 해야만 하지만, 거기에는 그런 일을 할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요. 백 명 넘게 고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12

하트렉의 말을 보면 이들의 상상은 실험실 테이블 수준에 묶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험실 테이블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분리 방법으로 임계질량을 얻어내려면 수백 명의 ‘실험실 조교’들이 필요했지만, 전시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했다. 질량분석기도 하루에 1mg을 분리해 낼 수 있으니까 수십만 개의 질량분석기가 필요하고 한 대에 100달러짜리 저렴한 질량분석기라도 수천만 달러가 필요했고, 그걸 돌릴 수십만 명의 사람이 필요했다. 모든 방법에 대해 독일 과학자들은 실험실 수준의 소규모 분리 방법을 대량의 인원을 동원하여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따졌다. 수백 명에서 수십만 명까지 필요 인원을 상상했고 그때마다 독일 과학자들은 미국에서는 가능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위안을 얻었다.

미국의 성공에 비추어 봤을 때,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인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분리 방법의 과학적 원리에서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었다. 부족했던 것은 실험실 테이블 수준의 분리 방법을 공장 수준의 대량생산 체제로 전환할 수 있다는 규모의 상상력과 협업의 경험이었다. 미국에서는 제너럴 일렉트릭 같은 산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공장에서 우라늄 235의 대량생산에 들어갔던 것이고, 여기에는 산업체 엔지니어와 과학자 간의 협력 체계의 구축 및 상호 신뢰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미국은 거대한 규모의 협력을 진짜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독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각자 상대방은 중요치 않다고 하니까요.”13 30대 젊은 과학자 호르스트 코르슁Horst Korsching, 1912-1998은 독일 과학자 간의 관계를 비판했다.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 그런 말은 하면 안 되고 내 말에 토 달지도 말라는 최고 책임자 게를라흐의 경고가 이어졌던 것을 보면 독일 과학자 간에 수평적인 협력 관계가 있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독일 과학자들의 논의를 보면 독일 핵무기 개발에서는 동위원소 분리 시도가 한 번도 제대로 이루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여기 비춰 보면, 임계질량을 50kg이라고 했다가 1톤이나 2톤이라고 했던 하이젠베르크의 혼란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50kg이든 1톤이나 2톤이든 상관없이 모두 불가능한 값이라는 점에서 매한가지로 여겨졌던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독일 과학자들이 시도도 안 하는 사이, 미국에서는 0.72%의 우라늄 235를 전자기적 방법으로 10%까지 농축하고 다시 그것을 열 확산법과 기체확산법으로 농축하고 다시 전자기적 방법으로 농축하는 과정을 거듭했다. 우라늄을 분리하는 ‘정교한 방법’이 없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기술적 논의 외에도 독일 과학자들에게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폰 바이재커는 우리가 원폭 개발을 못 한 것은 독일의 모든 물리학자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우리 모두가 독일의 승리를 원했다면 우리는 성공했을 것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이루려고 했다. 그 옆에서 한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찬물을 뿌리면서 성공하지 못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한은 독일이 원폭개발을 하지 못한 점을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겼던 것 같은데, 독일의 실패에 괴로워하며 오열하는 게를라흐를 위로하면서 원자폭탄 같은 비인간적인 무기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에게 무릎 꿇고 감사드린다는 진심을 전했다. 프로젝트 최고책임자였던 게를라흐는 여러 면에서 머리가 복잡했다.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그는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끌지 못한 것에 대한 비난의 공포를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안전해질 때까지 한 2년간 외국에 머무르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독일로 돌아온 후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해 독일 핵무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물리학자들은 원폭 개발에 뒤처졌다는 무능력의 낙인과 나치에 부역했다는 부도덕의 낙인을 어떻게 지울지 고민했다. 독일 과학자들의 과학적 무능력에 대한 공격의 대표주자는 굿슈미트였다. 굿슈미트는 독일 과학자들은 원자폭탄과 원자로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처음부터 원자로 개발에만 집중했고 동위원소 분리 연구는 제대로 하지도 못했고 자만감에 차서 연합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고 주장했다.14 이에 맞서 독일 과학자들은 원자폭탄과 원자로의 차이를 알고 있었고(이 점에 대해서는 굿슈미트도 후에 자신의 오해를 인정했다.), 연구할 능력이 있었지만, 도덕적 이유로 원폭 개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이어나갔다. 소극적 태업이라는 이들의 주장은 1956년 나온 로버트 융크Robert Jungk의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에 소개되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15 국내에 번역된 아르민 헤르만의 하이젠베르크 전기에서도 이런 식으로 하이젠베르크의 핵무기 개발 참여를 설명하면서 독일 과학자들의 태업설은 꽤 많이 알려졌다.16

 

1990년에 팜홀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독일 핵무기 개발 과학자들의 태업설은 상당 부분 그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연합군의 핵무기 개발 성공에 대해 당황스러워하는 그들의 감정적 반응과 임계질량에 대한 혼동, 동위원소 분리법에 대한 기술적 무지는 적어도 할 수 있는데 안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