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959년 가을 미국 생화학자 아서 콘버그Arthur Kornberg, 1918-2007는 과학자의 경력에서 가장 흥분되고 영예로운 순간을 맞이했다. 첫 번째는 콘버그의 주도로 스탠포드 의과대학 내 생화학학과가 설립된 것이다. 그가 설립한 생화학과는 생명의 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의 DNA에 대한 연구를 통해 2차 대전 후 급속도로 성장한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을 주도했다. 콘버그가 설립한 “DNA 학과”는 유전자의 이해와 생명 정보의 조작을 통해 1970년대 유전공학의 발달에 기여하게 될 창의적 연구공동체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러한 창의적 연구 공동체의 설립에는 콘버그가 가지고 있었던 과학활동과 과학적 창의성에 대한 독특한 접근이 있었다. 스탠포드의 생화학과는 현재까지도 그 연구의 수월성을 유지시키고 노벨상 수상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학과로 발전해왔다.

두 번째로 콘버그는 1959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노벨상 위원회는 그가 DNA를 합성하는 데 관여하는 DNA 중합효소polymerase를 발견하여 유전정보가 어떻게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는지 밝힐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을 선정 배경으로 밝혔다.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이 생명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분자인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규명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DNA가 어떠한 매커니즘을 거쳐 생물학적 기능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규명되지 못한 점들이 많았다. DNA와 RNA를 구성하는 핵산에 대한 콘버그의 연구는 생명현상을 관장하는 유전정보를 지닌 DNA의 생물학적 기능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장을 연 것이었다. 콘버그의 DNA에 대한 선구적 연구는 1970년대 스탠포드 생화학과를 중심으로 한 유전자재조합 기술의 발전과 후에 유전공학 분야의 탄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열린 냉장고와 창의적 연구 공동체

1918년 3월 뉴욕시에서 철물점을 운영하던 유대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콘버그는 교육열이 매우 높았던 유대인 공동체에서 자랐다. 그는 과학에 큰 재능을 보여 15살에 당시 가난하지만 야심에 찬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던 뉴욕시립대City College of New York를 졸업하고, 곧 로체스터 대학University of Rochester의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곧 의대 내의 임상의학보다는 기초 생의학 연구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콘버그는 미국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에서 DNA에 대한 생화학 연구를 진행하며 과학적 명성을 쌓았다.

콘버그의 연구는 DNA에 담긴 유전정보의 저장과 발현, 그리고 전달을 중심으로 하는 분자생물학과 유전학 분야의 급속한 재편과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1950년대 초반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를 규명하던 그때, 콘버그의 실험실은 생물학적 정보를 담고 있는DNA와 RNA, 즉 핵산에 관한 실험과 연구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는 생명체의 청사진을 담고 있는 DNA라는 유전물질이 어떻게 세포 내에서 생명을 구성하는 다양한 분자들을 합성하는 데 관여하는지 그 매커니즘을 규명하고, 특히 그 기반으로 DNA의 합성에 관여하는 여러 효소들enzymes의 역할에 큰 관심을 가졌다.

콘버그는 당시 DNA에 대한 연구가 큰 주목을 받고 과학자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면서 서로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얻기 위해 정보를 교류하지 않고 연구물질 또한 공유하지 않는 비밀주의secrecy가 나타나고 있음을 비판했다. 그는 오히려 과학자들 간의 활발한 정보교류와 토론, 그리고 연구물질의 공유가 창의적 과학활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믿음을 실천에 옮겼다. 바로 “열린 냉장고open refrigerator”의 설치이다.

콘버그는 열린 냉장고에 자신의 실험실에 DNA를 이루는 여러 뉴클레오타이드와 DNA의 합성과 분해에 관여하는 여러 효소들을 보관하고 이를 DNA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국립보건원의 연구자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던 주요 주제들 특히 DNA에 담긴 유전정보의 저장과 전달, 발현에 관련된 생물학의 핵심 문제들을 여러 연구자들이 서로 다른 각도에서 분석하고 그 결과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여러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게다가 시약과 실험기구 등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보다 적은 비용으로 다양하고 독창적인 실험들을 설계하는 방법들을 배울 수 있었으며, 콘버그는 이러한 공유의 문화를 통해 자신의 실험실이 보다 창의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DNA 학과의 설립과 공유의 실험실 문화

콘버그는 1959년 스탠포드 생화학과를 설립하면서 공동체적 구조라 불린 독특한 연구와 학과 운영을 제도화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단지 스스로가 노벨상을 수상한 창의적인 과학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설립한 스탠포드 생화학과에서, 그리고 자신의 집안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데 기여했던 독특한 공유의 실험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우선 콘버그가 국립보건원에서 “열린 냉장고”를 설치하면서 경험한 공유의 연구 공동체는 기존의 연구질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이를 독창적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창의적인 실험들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을 때, 기초 과학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을 형성시켰다.

창의적 과학연구과 공유의 실험문화에 대한 콘버그의 믿음은 특히 그가 DNA라는 유전물질의 생화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실험실을 발전시키 나가는 과정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콘버그는 1950년대 DNA의 복제와 유전정보의 전달 과정에 관한 구조생물학적, 생화학적, 분자유전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실험적 연구를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를 초빙하고자 했다.

콘버그 자신은 1956년 DNA를 합성할 수 있는 효소를 발견하여 DNA에 대한 생화학적 연구의 리더로 부상했으며, 이 주제를 보다 다학제적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연구 그룹을 조직했다. 그는 우선 핵산의 분해와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들에 대한 생화학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폴 버그와 같은 학자들을 임용했다. 또한 콘버그는 자신이 합성한 DNA의 분자유전학적 성질을 규명하기 위해 DNA의 발현을 연구할 수 있는 면역학자와 데이비드 호그네스David Hogness와 같은 신진 분자생물학자를 임용하여 DNA라는 유전물질에 대한 다학제적 접근을 발전시켜나갔다.

동시에 콘버그는 다학제적 연구 공동체가 공유의 실험문화를 실천하고, 이를 제도화한다면 보다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콘버그는 자신이 임용한 한 학자에게 자신의 학과는 대부분의 재원과 실험시약, 기기 등을 공유하며 이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실험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재원resources들을 공유합니다. 이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우리의 실험활동에 유연성flexibility을 제공해 줍니다. 일례로 당신과 같은 신임교수들은 실험에 필요한 재원과 화학 물질들, 그리고 기기들을 다소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당신과 같은 신임교수들에게 실험 조수나 학생들이 필요할 경우에도 학과에서 공유 되는 재원을 통해 부가적인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콘버그가 초빙한 새로운 연구자들은 DNA에 대한 생화학적, 분자생물학적 연구를 중심으로 DNA라는 유전정보를 담은 물질과 이에 관련된 실험시약과 기기 등을 공유하며 다학제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DNA의 생물학적 기능을 밝힐 수 있는 혁신적인 실험들을 설계해 나갈 수 있었다. 

 

 

DNA연구에서 유전공학 기술의 발전까지

1959년 설립된 스탠포드의 생화학과는 이런 의미에서 DNA 학과로서, 공유의 실험문화를 제도화한 학과이기도 했다. 그 기저에는 창의적 과학활동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연구자가 기존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콘버그의 믿음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창의적 실험문화를 재정적이고 물질적으로 가능하게 해 주었던 공유의 물질문화, 즉 실험실의 재원resources과 실험 기기, 그리고 실험 물질의 공유가 이러한 환경을 뒷받침해 줄 것이었다.

콘버그는 그가 학과의 “공동체적 구조communal structure”라 부른 공유의 실험문화를 제도화하여 창의적 연구활동을 장려하려는 시도를 했다. DNA 실험에 필요한 여러 시약, 효소, 기기들을 학과 차원에서 공동 관리하며 공유하였으며, 학과 예산 등도 공유하기 시작했다.이를 통해 신임교수들은 보다 수월하게 실험에 필요한 재원과 화학물질들, 기기들을 얻어 독창적 실험들을 시도하며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신임교수들은 과학적으로 빠르게 성장함에 따라 점차 중요한 연구주제를 개척하거나 창의적인 업적을 발표했다. 자원의 공유를 통해 성장한 이들은 또한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와 책임감이라는 상호호혜의 원칙 하에 자신이 많은 연구비를 받을 때에도 이를 기꺼이 학과 구성원들과 공유하면서 생화학학과라는 실험 공동체의 성장에 기여했다.

스탠포드 생화학과의 구성원들은 점차 과학적 지식의 자유로운 소통과 실험 물질의 공유가 창의적 실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실험문화를 또한 실험실의 설계와 배열에 각인시키려고 하였다. 일례로 한 실험실을 3-4개의 연구 그룹에서 온 사람들로 혼합하여 구성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실험실들 간의 아이디어의 교류와 실험기법의 공유를 장려하였다. 또한 실험기기와 시약들을 공동의 공간에 설치하여 자연스럽게 연구자들 간의 만남을 유도하는 동시에 실험물질과 전자현미경과 같은 고가의 기기들을 공유하여 학과의 실험 비용을 절감하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공유의 실험실 문화는 경제적으로도 효율적인 자원의 사용을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수반되는 지식과 실험 기법에 대한 정보의 활발한 교류는 과학 활동에도 유익했다. 스탠포드 생화학과의 공동체적 구조의 성공적인 예로는 1980년 생화학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폴 버그의 유전자재조합 연구를 들 수 있다. 1970년대 초 폴 버그는 암유발 바이러스에 대한 새로운, 당시로는 매우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새로운 방식의 암연구와 유전자 조작에 대한 연구들에 착수했고, 무엇보다 이때 학과의 바이러스 전문가이던 데일 카이저A. Dale Kaiser의 수업과 연구, 그리고 그의 학생이 실험을 통해 발전시켰던 여러 실험 기법들과 물질들의 공유가 큰 도움이 되었다.

버그의 실험실이 암유발 바이러스에 대한 분자유전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데 큰 어려움에 봉착했을 당시 생화학과 구성원들은 유전자를 분자적 수준에서 조작할 수 있었던 실험기법들을 공유했다. 버그는 이에 기반하여 유전자재조합이라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버그의 실험실은 생화학과 구성원들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유전자 조작에 필요한 학과의 각종 실험물질을 사용해 효율적이고 대담하게 유전자재조합 실험을 설계하고 이 실험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생명의 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자를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재조합하고 발현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 이 실험으로 버그가 노벨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유전자재조합 기술을 발전시키고 공유했던 스탠포드 지역의 연구 공동체는 생명공학 산업의 메카로 부상했다.

 

 

나가며

스탠포드의 생화학자들은 현대 과학이 창의적인 활동인 동시에 매우 큰 돈이 필요한 고비용의 활동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 혁신과 성과에 대한 기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부와 기업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과학에 대한 지원이 점차 정해진 목표와 기간에 따라 지나치게 세세하게 계획, 평가되고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 정책적 변화에 큰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음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스탠포드의 생화학자들은 획일화되고 정치화되고 있는 연구지원제도가, 불확실성 하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들의 활동과 본질적으로 양립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과학사의 여러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어떤 분야나 연구 방향이 아무리 중요하고 전망이 좋을지라도, 다소 다르거나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 연구 활동을 통해 보다 더 근본적이고 파급력이 큰 연구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탠포드의 생화학자들은 실험실 자원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공유의 실험실 문화를 통해 일시적인 정책적, 정치적 변화로부터 어느정도 자유로운, 따라서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연구가 다른 어떤 기준보다 중요한 자율적인 과학연구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콘버그가 제도화시켰던 공동체적 구조의 실험문화는 그가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시각에서 창의적 과학활동을 유인할 수 있는 실험 공동체를 어떻게 건설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참고문헌

  1. 이두갑, "아서 콘버그의 DNA 연구와 공동체적 구조의 건설", 『한국과학사학회지』 제35권 제1호 (2013), 131-149쪽.
  2. Yi, Doogab. The Recombinant University: Genetic Engineering and the Emergence of Stanford Biotechnolog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
이두갑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