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953년 3월 26일 미국의 의학 연구자 조너스 소크Jonas Salk, 1914-1995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폴리오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폴리오 바이러스poliomyelitis는 주로 여름에 아이들을 감염 시켜 이들의 신경계를 공격하여 신체 마비 증상을 가져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20세기 초반에 매년 수천 명이 폴리오에 감염되었으며, 치료 방법도 없어 이에 걸린 아이들은 “철의 폐”iron lung라는 악명을 얻은 호흡을 도와주는 관과 같은 기계장치 안에서 죽어갔다. 특히 소크가 폴리오 백신개발을 발표하기 전 해인 1952년은 폴리오가 크게 유행하며 미국에서만 58,000명이 폴리오에 감염될 정도였다. 그 해 많은 이들이 폴리오로 인해 소아마비라는 비극을 맞았으며 3,000여 명이 사망했다. 1953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미국인들은 그 어떤 질병보다 폴리오를 두려워했다. 그해 봄 소크의 혁신적 백신 개발은 너무나도 고대하던 희소식이었다. 소크의 백신 개발은 기초 생의학 연구biomedical research에 대한 투자를 통해 어떠한 질병이라도 정복할 수 있다는 20세기 과학자들의 믿음을 결정적이고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후 백신의 개발한 소크는 즉각 영웅 과학자로 칭송받기 시작했다.

소크는 폴리오에 걸려 평생 휠체어를 타야 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대통령 주도로 설립된 소아마비극복국립재단National Foundation for Infantile Paralysis, NFIP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던 수많은 과학자 중의 하나였다. NFIP는 대중매체와 광고를 통해 폴리오의 위험과 이 극복을 위한 모금 캠페인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과 의학의 진보를 통해 폴리오를 정복할 수 있다는 신념 하에 생의학 연구자들을 광범위하게 지원하였다. 소크는 특히 1947년 피츠버그 의과대학에 교수로 임용된 이후 재단의 지원을 받으며 폴리오 바이러스와 백신 개발에 대해 연구하던 중견 학자였다. 그의 성공은 1930년대부터 오랜 기간 NFIP가 폴리오 관련 연구에 투자한 것의 성공이자 페니실린 항생제 개발에 버금가는 또 다른 생의학 연구분야biomedical research의 성취로 받아들여졌다.

 

 

도시와 전염병의 경험이 소크를 의학으로 이끌다

러시아에서 뉴욕으로 이민을 온 재봉사의 아들로 자란 소크에게 1918년 인플루엔자influenza 펜데믹이 도시에 남긴 상흔은 그의 삶에도 여러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빽빽하게 몰려사는 뉴욕에서 독감과 폴리오가 퍼질 때마다 거리에 관의 행렬이 줄을 이었던 모습, 그리고 여름 방학 후에 소아마비로 다리에 철을 감고 나타난 친구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6살에 뉴욕시립대학에 입학하여 주로 인간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인문학 등에 훨씬 더 관심을 보였던 소크는 대공황 시기에 혼돈스러운 사회를 경험하였으며, 결국 인간을 치유할 수 있는 의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다지 과학 분야의 성적들이 좋지 않았고, 게다가 당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던 시기에 그는 오직 한 곳에서만 입학 허가를 받았다. 바로 현재의 뉴욕 의과대학인데, 다른 학생들보다 훨씬 어린 19세의 나이에 의대에 입학한 소크는 의학뿐만 아니라 기초 과학, 특히 생화학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였고, 여러 장학금을 받고 박테리아를 연구하며 22살의 나이에 첫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의과대학의 도전과 바쁜 삶을 즐기며 모든 과목들에서 탁월한 성적을 거두었던 소크는 뉴욕의 뜨거운 여름을 피해 해양생물연구소 우즈 홀Woods Hole 연구소에서 실험을 하던 도중 이곳에서 휴가를 온 도나 린지Donna Lindsay라는 부유한 여대생과 사랑에 빠졌다. 정식 의사가 된 후에야 결혼을 허가해 줄 수 있다는 린지 부모의 말을 듣고 소크는 정식 의학 학위를 취득하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2차대전과 인플루엔자 백신 개발에 참여

 

소크는 졸업 후 당시 모든 의대생이 선망하던 마운트시나이병원Mount Sinai 병원에서 전공의 수련 기간을 보냈다. 대공황과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그는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여하라는 정부의 명령에 당시 인플루엔자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던 토마스 프랜시스Thomas Francis, Jr.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2차 대전 수많은 군인들이 인플루엔자 독감으로 사망하였고 미국 정부는 이의 백신의 개발에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이에 프랜시스는 소크가 미국 정부에 “필수적인 연구자이며… 국가안보에 관련된 중요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자이며, 곧 미시건 대학에서 인플루엔자를 연구하고 있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이의 백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것이라는 편지를 뉴욕 병무청으로 보냈다.

 

1942년 소크는 미시건 대학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프랜시스 실험실에 합류한다. 이 실험실은 바이러스 연구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활성화된, 즉 죽은 바이러스를 사용해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광범위하게 수용되지 않은 면역 이론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소크는 2차 대전 내내 인플루엔자 백신 개발에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인플루엔자 백신 프로젝트가 더이상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할 상황이 되자 소크는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했으며, 이에 독감 백신 생산에 큰 관심을 보였던 파커-데이비스Parke-Davis라는 제약회사에 컨설턴트로 일하며 줄어든 수입을 보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프랜시스는 연구팀 전체에 대한 배신이자 학문 연구의 성과를 제약회사로 팔아넘기며 본인의 이득만을 취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라며 소크를 비난했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폴리오 사백신 개발

큰 비난에 직면한 소크는 1946년 피츠버그 대학의 조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조그만 실험실에 불과했던 그의 실험실은 곧 NFIP의 지원을 받아 폴리오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폴리오가 200개 정도의 바이러스 일족들이 일으키는 병이지만 면역학 적으로 3종류의 타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과를 확인하는 실험을 수행하였다. 이는 무엇보다 백신의 개발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희소식이었다. 단지 이 3타입의 폴리오 바이러스들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기만 한다면 이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소크는 프랜시스에게 배운 사백신killed virus vaccine 개발법을 향상시켜 이들 폴리오 바이러스 타입들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고도 노력했다. 특히 NFIP는 그가 다른 대학의 연구자들과 달리 백신 개발이라는 연구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모습에 주목하여 소크의 연구실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이에 소크는 예일 대학의 존 엔더스John Enders가 개발한 새로운 배양기술을 통해 바이러스를 배양하고 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으로 죽여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 소아마비에 걸렸다 회복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백신 실험을 수행하여 효과가 있음을 보였다. 소크는 1953년 3월 26일, 폴리오 백신 개발에 성공했음을 미 전역에 알렸으며, 그 연구 결과를 미국의학협회저널에 발표했다.

 

 

대규모 임상시험을 통해 백신을 검증하다

소크가 개발한 백신이 바이러스를 죽이고 이게 기반한 만든 사백신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임상시험이 소규모였다는 점에서 보다 본격적인 임상시험을 통해 이 혁신적 백신의 효능과 안전성을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54년 44개주 180만명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그의 백신에 대한 임상시험이 뒤따랐다. 이 방대한 임상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당시 첨단 기술이었던 IBM 컴퓨터의 펀치 카드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이 임상시험을 진행한 이는 다름 아닌 소크의 스승이었던 미시건 대학의 프랜시스였다(오늘날 생명 윤리학자라면 아마 자신의 제자가 개발한 백신을 그 스승이 임상시험을 한다면 크게 반대했을 것이다).

1955년 4월 12일 프랜시스는 자신이 마무리한 백신 임상시험에 대해 90여 분에 걸쳐 발표했다. 이 백신 임상연구는 그 당시 미국에서 행해진 가장 대규모 임상시험이었다. 전 미 대중이 프랜시스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이날 프랜시스는 소크의 백신이 가장 널리 전파되고 있는 폴리오 타입에 60-70%, 그리고 보다 더 퍼진 폴리오 타입에는 90% 정도의 예방 효과가 있다고 발표했다. 당일 오후부터 저녁까지 부모들은 아이들을 껴안고 안도와 기쁨에 환호했다. 그날 밤 소크는 TV 인터뷰에 나와 자신의 연구를 소개했다. “누가 이 백신에 대한 특허를 소유하고 있습니까?”라는 앵커의 질문에 소크는 “사람들입니다. 이 백신에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 대해 특허를 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라고 말하며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40살이었던 소크는 바로 이어진 자신의 발표에서 프랜시스의 발표에 큰 불만을 표현했다. 자신의 백신이 특정 타입의 폴리오 바이러스에 효과가 높지 않은 것은 백신 방부제가 첨가된 것 때문일 것이며, 자신은 이의 첨가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소크는 프랜시스가 백신 방부제를 첨가하여 임상시험을 수행한 것을 비판하고, 이 첨가제가 없었다면 백신의 효과는 100%에 달했을 것이라 주장했다. 프랜시스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소크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고 하며 그를 공격했고, 근거 없이 새로운 백신의 효과를 맹신하며 대중을 호도한다면 과학자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다학제적 연구 기관을 설립하며

소크는 영웅적인 백신 개발자로 칭송되었지만 정작 과학자 공동체로 큰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폴리오 백신이 다른 생의학자들의 기초 바이러스 연구의 응용이라는 점과 그의 태도 때문인지 소크는 노벨상을 받지도 못했고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의 회원에 선정되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소크는 대중의 환호를 받으며 저명한 의학자이자 주요한 사회 문제들에 발언하는 지식인으로의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이 대학 시절부터 관심 많았던 인문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으며, 20세기 과학, 특히 생물학 분야의 놀라운 발전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함의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196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소크 생물학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소크 연구소는 생물학의 여러 분야들 사이의 융합적 연구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과학과 인문학의 학제 간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창립 당시 신경과학에 대한 연구를 개척하고자 했던 노벨상 수상자 프랜시스 크릭을 초빙했고, 수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제이콥 브로누우스키Jacob Bronowski를 영입하기도 했다. 브로누우스키의 <인간의 등정Ascent of Man>이라는 BBC 다큐멘타리는 소크가 주장한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의 중요성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크 자신 또한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과 재혼하며 과학과 예술의 상호작용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소크 연구소는 노벨상을 수상하는 여러 생물학자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시한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와 같은 인물을 배출하며 생물학의 발전과 이의 인문학적 의의와 그 사회적 함의를 논의하는 중요한 연구소로 성장했다. 폴리오 백신과 함께 다학제 연구기관인 소크 연구소 또한 그가 남긴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이두갑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