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는 무척 힘이 세다. 다른 전자가 가까이 오면 강한 힘으로 밀쳐 낸다. 전자는 가볍다. 가볍다 보니 조금만 힘을 주어도 전자는 빠른 속력으로 움직인다. 전자의 힘이 얼마나 센지 정확히 알고 싶다면 또 다른 종류의 힘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여기 두 개의 전자가 있다고 하자. 두 전자는 중력이란 힘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 모든 물체는 중력이란 힘으로 서로를 잡아당기는데, 이건 전자와 같은 소립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한편 한 쌍의 전자는 전기력이란 힘으로 서로를 밀쳐 낸다. 따라서 두 전자 사이에는 끄는 힘과 미는 힘이 공존한다. 어느 쪽이 더 셀까, 힘겨루기를 해보자. 중력의 법칙과 전기력의 법칙은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전자 한 쌍이 밀고 당기는 힘을 계산하는 건 단 몇 분이면 된다. 막상 셈을 해 보면 비교가 부끄러울 만큼 전기력이 중력보다 세다. 백만 배의 백만 배의 백만 배의 백만 배의 백만 배의 백만 배의 백만 배만큼 세다. 쉽게 말하면 전기력이 존재하는 곳에서 중력은 그저 존재하지 않는 힘이나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힘이 센 전자가 한 백 개쯤 모여 있으면 어떨까? 아니면 백만 개? 일 조 개? 이전 글 “양자 물질의 역사 [3]: 파울리 호텔”에서 고체 속엔 전자가 아보가드로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했는데, 이 숫자를 일상 용어로 풀이하면 일 조 개를 일 조 번 곱한 숫자가 된다. (일 조)x(일 조)=(아보가드로 숫자), 대략 이렇다. 이토록 많은 힘센 전자가 제멋대로 우당탕 돌아다니는 세계가 만약 물질이라면, 우리는 그 물질 속 전자가 쉴새없이 충돌하면서 내는 소리를 마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쉬는 시간 아이들 떠드는 소리 듣는 것 마냥 늘 들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 속의 물질에선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걸 보면, 물질 속에 있는 그 장난꾸러기 힘센 전자들이 좀 얌전히 놀도록 하는 처방이 나름대로 있을 것 같다.
이미 이전 글 “양자 물질의 역사 [3]: 파울리 호텔”에서 그 처방이 무엇인지 소개하였다. 물질 속의 전자는 운동장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같은 처지가 아니다. 대부분의 전자는 자기 방에 갇혀 꼼짝 못 하는 ‘죄수’ 전자다. 1층, 2층, 이렇게 아래층부터 파울리 호텔 방을 채워 나가다 보면 가장 위 몇 층에 투숙한 전자들에게만 방을 나와 움직일 자유가 허용되는 그런 세계에 사는 게 전자다. 물론 두 전자가 복도에 물 마시러 나왔다가 실수로 방을 바꿔 들어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 경우는 결과적으로 두 전자가 아예 안 움직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도 이전 글에서 설명했었다. 전자가 아무리 힘이 센들, 배타 원리라는 상위법을 어기면서 살 수는 없다. 파울리 호텔의 한참 아래층에 갇혀 있는 전자들은 여전히 힘이 세지만, 그 힘을 마땅히 쓸 곳이 없다.
그러나 최상층 부근의 전자들이 누리는 생활은 사뭇 다르다. 우선 그들에게는 빈방으로 이동할 자유가 있다. 물질 속의 전자들 중 대부분이 죄수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자유를 누리는 전자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아보가르도 숫자의 만분의 일만큼만 전자가 자유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그 개수는 일 조를 일 억 번 곱한 숫자다. 수많은 전자들이 쉴 새 없이 방을 들락날락거리다 보면 힘센 전자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경우도 빈번해진다.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래로 쿵 떨어지는 전자, 다른 전자랑 박치기하고 길을 잃어 헤매는 전자. 최상층 부근의 전자 세계에서는 이런 혼잡스러운 모습이 벌어진다.
최상층 전자들의 이런 부산스러움마저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파울리 호텔의 비유를 떠올려 보면 대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온도를 더욱 낮추면 된다. 온도는 전자를 “열받게” 만들고, 그래서 자기 방을 떠나 더 위층의 빈 방으로 도망가게끔 한다. 반면 온도가 낮아 시원해질수록 모든 전자는 허용될 수 있는 가장 낮은 층의 방에 들어가서는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전자가 자기 방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면 파울리 호텔은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해질 것이다. 모든 전자들이 아무것도 안하는 상태보다 더욱 아무 것도 안 하는 상태란 건 상상할 수 없으니, 전자들이 모두 제 방에 들어가 앉아 있는 상태는 그 고요함에 있어서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태가 되게끔 온도를 낮추었을 때, 그 온도를 절대 영도라고 부른다.
이렇게 사변적인 추론만으로 절대 영도의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이론 물리학자나 철학자 중간쯤의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과학자 중에는 또 다른 재미있는 부류가 있다. 우리는 이들을 실험 물리학자라고 부른다. 이론 물리학자와 실험 물리학자의 차이는 에베레스트산을 두고 비유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론가는 에베레스트 정상의 높이를 정확히 계산할 수학적 방법론을 개발한다. 그 사이 실험가는 정상까지 올라가기 위한 장비를 만들고 시행착오를 통해 최적의 등산 경로를 찾는다. 과학의 현장에서 이론가는 개념을 만들고 그걸 수리적으로 증명하느라 골몰하는 사이, 실험가는 도구를 개발해 그 개념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절대 영도란 게 정말 있는지 알고 싶다면 절대 영도의 냉장고를 만들어야 한다. 절대 영도에 해당하는 온도를 섭씨로 환산하면 영하 273도이니, 이 온도까지 물질을 냉각시킬 수 있는 냉장고를 만들어야 한다. 남극의 온도는 영하 60도까지 내려가고, 우주 공간의 온도는 영하 270도 근방이다. 모든 과학자가 장비를 들고 우주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대신 우주를 실험실로 불러들여야 한다.
절대 영도의 냉장고, 곧 절대 냉장고를 만드는 데 앞장 선 대표적인 실험 과학자는 네덜란드의 카멜린 온네스Kamerlingh Onnes다. 이전 글 “양자 물질의 역사 [3]: 파울리 호텔”에서 잠깐 소개한 물리학자 제이만의 스승이다. 그의 제자 제이만은 나이 마흔이 채 되기 전에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만, 막상 스승이었던 온네스는 나이 55세가 되던 해에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룬 업적으로 환갑의 나이가 되어서야 노벨상을 받는다. 제자의 수상보다 11년 늦은 1913년의 일이었고, 네덜란드 물리학자로서는 로렌츠, 제이만, 판데르발스에 이은 네 번째 수상이었다.
온네스. 그는 1853년에 태어났다. 일찌감치 물리학에 재능을 보여 물리 경시 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고, 잠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유학하는 동안에는 당대 독일의 최고 물리학자라고 할 만한 키르히호프와 분젠에게 물리학을 배웠다. 이론 물리학에 상당한 재능이 있어, 박사 학위도 “지구의 자전에 관한 새로운 증명”이란 흥미로운 제목의, 이론과 실험을 겸비한 논문을 써서 받았다. 1879년의 일이다. 앞서 말한 네덜란드 출신 노벨상 수상자 로렌츠와 판데르발스는 각각 1875년과 1873년에 라이든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 로렌츠는 전자기파와 물질 사이의 상호 작용을 이론적으로 탐구했고, 판데르발스는 기체와 액체 사이의 변환 과정을 이론적으로 탐구했다. 두 사람 모두 박사 논문을 통해 개척한 새로운 물리 영역에 남긴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았고, 온네스는 두 사람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한 중요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마치 신의 축복이라도 내린 듯, 네덜란드라는 자그마한 나라의 물리학 수준은 동시대를 살다 간 이 세 사람을 통해 독일이나 프랑스, 영국과 견줄만한 수준을 한 시대 누렸다고 하겠다.
온네스는 1882년, 29세에 네덜란드 라이든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기체의 액화라는 매우 실험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열기구를 타보았거나, 뜨는 모습을 영상으로 본 사람이라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인데, 따뜻한 기체를 식히면 부피가 줄어든다. 차츰 크기가 작아지던 기체 덩이는 어떤 온도보다 차가워지면 그만 액체로 변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수증기란 이름의 기체는 섭씨 100도에서 액체, 즉 물로 변한다. 대부분의 기체는 이것보다 훨씬 낮은 온도까지 식혀 줘야만 비로소 액체 상태로 바뀐다. 과학자들은 (참 어이 없게도) 모든 기체를 하나씩 액체로 바꾸는 작업에 오랫동안 몰두해 왔다. 과학사적으로는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었지만, 그런 일을 하는 과학자의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아가, 그런 일 하면서도 밥벌이가 되냐?” 아니었을까 싶다.
19세기 후반 이런 한심한(?) 일에 도전하던 과학자는 비단 온네스뿐만이 아니었다. 보온병의 발명가로도 잘 알려진 스코트랜드의 제임스 듀어James Dewar가 이미 액체 수소(1898년)와 고체 수소(1899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수소는 일상적 환경에서는 기체로 존재하지만, 절대 온도 20도까지 차가워지면 액체로 변하고, 절대 온도 14도에서는 다시 고체로 바뀐다. 그러나 절대온도 14도까지 온도를 내려 주어도 헬륨 가스는 여전히 기체 상태로 남아 있다. 이제 과학자들이 액화에 성공하지 못한 유일한 기체는 헬륨이었고, 헬륨을 액화시키려면 절대 온도 14도보다 낮은 온도로 내려가야 했지만, 아직 그런 저온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온네스가 세계 최초로 헬륨의 액화라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려면 우선 세계 최고의 냉장고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림2]는 온네스의 실험실에서 완성한 냉각 장비의 설계도이다. 이 장비는 여러 단계를 거쳐 차츰 온도가 낮아지면서 마침내 절대 영도 부근까지 내려가게끔 설계되어있다. 1단계 냉각은 메틸 클로라이드를 사용한다. 이 기체가 액화와 증발하는 과정을 순환하면서 온도는 영하 90도까지 내려간다. 2단계는 에틸렌이다. 이번엔 영하 160도까지 온도를 내린다. 그다음은 산소와 공기 차례. 영하 259도까지 내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헬륨을 순환시키면 온도가 영하 272도, 절대 온도로는 1도까지 내릴 수 있게 된다. 각 단계를 수행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냉장고에 물을 넣고 얼음을 만들려면 몇 시간 기다려야 한다) 순환 과정에서 가스가 새거나 너무 급히 냉각시켜 기체가 고체로 얼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작은 고체 결정이라도 생기면 기체가 흘러가는 가느다란 관을 막아버려 기계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
헬륨의 액화에 도전하기 위해, 온네스는 라이든 대학 내부에 저온 실험실을 설립하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애를 썼을 뿐만 아니라, 1901년 실험 기구를 제작할 전문가를 양성하는 학교까지 설립한다. 온네스 곁에는 실험 기구 제작의 달인 게릿 플림Gerrit Flim같은 이들이 있었다. 결국 1908년, 온네스의 실험가들은 절대 온도 4도 부근에서 찻잔 한 잔 분량의 액체 헬륨을 얻는데 성공한다. 1908년 7월 10일이었다. 영하 20도로 설정된 냉장고에 식재료를 넣으면 결국 영하 20도짜리 식재료가 된다. 마찬가지로, 온네스가 액체 헬륨을 절대 온도 4도까지 내려서 액화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이제부턴 어떤 물질이든 액체 헬륨 속에 담그기만 하면 그 물질도 절대 온도 4도만큼 차가워진다. 따라서 헬륨이 액화된 날은 어떤 물질이든 절대 영도 근방까지 식힐 수 있는 절대 냉장고가 탄생한 날이기도 했다. 유럽 각지의 과학자들이 천하 유일의 장비를 들여다보고 이용해 보려고 온네스의 실험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온네스의 실험실이 있는 라이덴은 성지였고 수많은 순례자들이 그 성지를 방문했다. 흥미롭게도 온네스의 절대 냉장고를 구경하고도 그만큼 성능 좋은 냉장고를 흉내내어 만드는 데 무려 15년이란 세월이 더 걸렸다. 온네스가 개척한 세상은 그만큼 흉내내기 힘든 전인미답의 영역이었다.
19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한 분광학적 도구와 그 도구를 이용해 얻은 각종 물질의 분광학적 특성들이 20세기 양자 역학의 비밀을 푸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는 이야기를, 이전 글 “양자 물질의 역사 [3]: 파울리 호텔”에서 했다. 한편 온네스가 제공한 절대 냉장고라는 도구는 20세기 내내 “양자 물질”의 비밀을 풀어내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양자 물질에 대한 필자의 연재를 쭉 읽어 온 독자라면 지금쯤 모든 물질은 원자로 만들어져 있고, 원자를 이해하는 유일한 도구는 양자 역학이며, 따라서 그 원자의 집합체인 물질의 성질도 양자역학을 이용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이미 충분히 공감할 (혹은 세뇌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 주변에 보이는 책상, 컴퓨터, 시계, 심지어 우리 몸조차도 양자 물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제 말을 살짝 바꾸어, 양자 물질의 성질을 “제대로 보려면” 온도를 극저온까지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모든 물질이 양자 물질이긴 하지만 차가울수록 더 양자스런 양자 물질, 온도가 높아질수록 덜 양자스런 양자 물질이다.
어떤 사람의 참 인품을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가장 배고프고, 버림받고, 위험한 상황, 그러니까 극한 상황에서 처신하는 모습을 보는 게 좋다고 한다. 자연을 지배하는 가장 기초적인 원리, 즉 물리학의 원리를 제대로 보고 싶을 때도, 극한의 환경이 필요하다. 가장 쉬운 예부터 시작하자면 뉴턴 법칙과 진공이란 환경의 관계를 들 수 있다. 갈릴레오가 정말로 피사의 기울어진 탑에서 쇠망치와 깃털을 떨어뜨려 두 물체가 동시에 땅바닥에 닿는지를 실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그가 그런 실험을 했다면 두 물체가 같은 시간 땅바닥에 닿았을리 만무하다. 뉴턴의 중력 법칙이 맞다면 정말로 두 물체는 무게와 모양에 상관 없이 똑같은 운동을 해야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기라는 매질이 제공하는 마찰의 힘을 무시한 환경을 두고 한 말이었다. 뉴턴 법칙이 정말 옳은지 알고 싶다면 일단 공기가 하나도 없는 환경, 즉 진공부터 만들어야 한다. 이제 그런 진공 환경이 만들어졌다면, 깃털과 쇠망치를 같은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실험을 해도 좋다. 그러면 뉴턴 법칙이 얼마나 잘 맞는 이론이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실험 동영상은 유투브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리학의 역사 가운데 손꼽힐 획기적인 사건은 뉴턴이 그가 만든 역학 법칙을 이용해서 케플러가 정리한 행성의 태양 주변 운동 법칙을 수학적으로 풀어 버린 것이었다. 뉴턴의 이론이 행성 운동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물론 뉴턴의 법칙이 옳았기 때문이지만, 또다른 매우 중요한 이유는 우주가 거의 완벽한 진공이기 때문이다. 진공 상태에서의 운동은 뉴턴 역학과 만유인력 법칙을 깔끔하게 따른다. 우주가 진공이란 사실이 뉴턴에게는 축복이었다. 그러나 낙하하는 두 물체의 운동이 동일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매번 우주로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대신 과학자들은 진공의 우주를 실험실로 가져오는 방법을 연구해 왔다. 다름 아닌 진공 기술의 발전이었다.
극저온이란 환경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온도라는 건, 양자 역학적인 물질의 속성을 투명한 형태로 보는 데 방해가 된다. 절대 영도에 가까워질수록 투명하게 드러나는 양자 물질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건 물질의 성질이 파동함수라고 부르는 하나의 함수로 기술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파울리 호텔로 돌아가 보자. 절대 영도의 호텔은 모든 전자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다. 투숙한 전자의 개수가 얼마인지만 알고 있다면, 그저 1층부터 방의 개수를 차례대로 세어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런 호텔의 상황을 함수로 표현하면 (2,2,2,2,….,2,0,0,0,…)이다. 앞의 숫자 2는 1층 1호실부터 시작해서 각 방에 들어가 있는 투숙객의 숫자다. (남녀 한 쌍씩 들어가기 때문에 각 방의 투숙객 숫자는 2이다) 손님을 다 채우고 나면 갑자기 그다음 방부터는 투숙객의 숫자가 0으로 떨어진다. 절대 영도의 환경에 놓인 물질의 상태는 이런 숫자의 배열, 즉 파동함수로 표현된다.
그러나 온도가 올라가면 단순했던 파동 함수의 숫자 배열이 어지러워진다. 예를 들어 (….2,2,2,0,0,0,…)이었던 파동 함수는 전자가 위치한 방이 바뀌면서 (….2,2,1,1,0,0,…)으로, 또는 (….2,2,0,1,1,0,…)으로, 또는 (….2,1,1,1,0,1,…)으로 바뀐다. 단 하나의 파동 함수로 깔끔하게 표현되었던 그 물질의 상태는 이제 아주 많은, 서로 다른 파동 함수로 표현될 가능성이 열린 물질로 바뀐다. “이 물질의 파동함수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더 이상 유일한 대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대신, 그 물질은 서로 다른 파동 함수를 갖는 수많은 파편으로 조각나기 시작한다. 물질 자체가 파편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물질을 기술하는 파동 함수는 파편화된다. 물질의 어떤 구역은 (….2,2,1,1,0,0,…) 파동 함수로, 또 어떤 구역은 (….2,2,0,1,1,0,…) 파동 함수로, 또 다른 어느 구역은 (….2,1,1,1,0,1,…) 파동 함수로 기술된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전자는 더 높은 층의 빈방까지 올라갈 수 있다. 즉 더 많은 종류의 파동 함수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온도가 올라갈수록 하나의 물질은 더 작은 구역으로 갈라지고, 더 많은 종류의 파동 함수가 각자의 소구역을 관리하는 지역 영주 노릇을 하게 된다. 이런 상태를 양자 역학에서는 “결이 깨졌다”고 표현한다. 결이 많이 깨진 물질일수록 하나의 파동 함수로 기술할 수 있는 영역의 크기는 줄어든다.
거꾸로 물질의 온도를 내릴수록 서로 결이 맞는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절대 영도에선 그 물질이 통째로 하나의 결, 즉 하나의 파동 함수로 기술된다. 온네스의 냉장고 속에 물질을 넣으면 그 물질은 하나의 거대한 파동 함수로 바뀐다. 그리고 상온에서 볼 수 없었던 기묘한 현상이 종종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신비롭다고 할만한 현상은 바로 온네스의 실험실에서 발견되었다. 그것은 흔히 초전도 현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잘 따져보면 소립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기본 원리 중 하나인 “힉스Higgs 현상”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이제부턴 그 초전도-힉스 이야기를 좀 해보자.
헬륨의 액화에 성공한 온네스의 연구진은 헬륨 냉장고를 이용해 독자적인 극저온 연구를 요모조모 수행했다. 그러던 중 1911년 4월 8일, 온네스와 동료들은 액체 헬륨 환경 속에 놓인 차가운 수은 덩어리의 저항이 0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관측한다. 수은은 상온에서 액체 상태로 녹아 있지만, 차가워지면 금속으로 변한다. 모든 금속은 전기를 통한다. 좀 더 과학적인 표현을 쓰자면 금속에는 “전류가 흐른다”. 잔잔한 호수의 물은 고여 있지만 강물의 물은 흐른다. 강물이 흐르는 이유는 강의 한쪽 끝상류이 다른 쪽 끝하류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중력은 강물을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밀어주는 힘이 된다. 중력에 떠밀려 강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금속 속에 사는 전자는 마치 호수에 고인 물 같아서, 저절로 흐름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건전지를 연결하면, 금속 선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전자를 밀어주는 “힘”이 생기고, 그 힘에 떠밀려 전자는 전선을 따라 움직인다. 이런 현상을 두고 “전류가 통한다” 혹은 간단히 “전기가 통한다”고 표현한다. 두 배 강한 건전지를 걸어 주면 두 배 많은 전류가 흐른다. 금속 물질에서는 예외 없이 이런 비례 관계가 성립한다. 이런 현상을 최초로 관측한 독일의 과학자 옴Georg Ohm의 이름을 따서 “옴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초전도체는 이런 옴의 법칙을 깨버린다. 굳이 건전지를 걸어 주지 않아도 전류가 흐른다. 무슨 뜻인지 설명하기 위해서 물놀이 공원의 유수풀을 떠올려보자. 튜브 위에 누워 몸을 맡기면 풀의 경로를 따라 내 몸이 한 바퀴 여행을 한다. 풀장의 물이 흘러가기 때문에 내 몸도 따라 흘러간다. 그러나 입장 시간이 끝나고 모터의 전원이 꺼지는 순간 풀장의 물흐름은 멈춘다. 건전지를 떼는 순간, 스위치를 끄는 순간, 전자 제품이 작동을 멈추듯 말이다. 반면 초전도체처럼 작동하는 유수풀이라면 어떨까. 전원을 내려도, 모터를 더 이상 돌리지 않아도, 물은 계속 풀장을 돌아다닌다. 밀어주는 힘이 없어도 운동을 멈추지 않는 상태, 이런 상태가 금속에서 벌어질 때 그 물질을 초전도체라고 부른다.
온네스는 191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헬륨의 액화에 성공한 지 5년 만이고, 초전도체를 발견한 지 2년 만의 일이다. 수상 이유는 “저온 물질의 탐색, 그중에서도 액체 헬륨의 제조”였다. 흥미롭게도 초전도체 발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사실 온네스가 초전도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또 한 번 받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고, 온네스의 발견 이후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있는 신비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전도 현상은 온네스의 동시대 물리학자들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어려운 과제였다. 1926년 온네스가 사망하고도 30년이 더 흐른 195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어떤 금속이 낮은 온도에서 초전도체로 바뀌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는 이론이 나왔다. 이론을 제안한 세 사람의 이름Bardeen, Cooper, Schrieffer 머릿글자를 따서 “BCS 이론”이라고 부른다.
초전도체의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 1933년 독일의 물리학자 마이스너Walther Meissner는 초전도체의 또 다른 기묘한 특성을 발견한다. 보통의 금속 주변에 자석을 가까이 대면, 자석으로부터 나온 자기장은 금속의 존재에 무관심한 채 그냥 통과해 버린다. 자기장은 나침판의 바늘을 특정한 방향으로 가리키게 하는 힘이다. 그런 나침판을 금속 통 안에 넣어 두건, 통 밖에 넣어 두건, 그 바늘은 똑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자기장이 금속을 그냥 통과해 버린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그런데 나침판을 가둔 금속이 초전도 상태로 바뀌면, 그 나침판에 작용하던 자기적 힘은 사라져 버린다. 나침판의 바늘은 어느 방향을 가리켜야 할지 모른 채 이리저리 방황할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장이 초전도체를 통과하지 못하고 “밀려나기” 때문이다. 그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마이스너 효과”라고 부르는 이런 현상을 그림으로 그리면 [그림4]처럼 보인다.
1962년,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Philip Anderson은 이 마이스너 효과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앤더슨의 제안이 나오기 전에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일단 자기장이나 전기장은 전자기파의 서로 다른 측면이라는 게 이미 19세기부터 잘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전자기파는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불리는 방정식의 원리에 따라 거동한다. 둘째, 아인슈타인의 광자 해석에 따르면 전자기파는 광자라는 입자라고 볼 수도 있다. 이른바 입자와 파동 사이에 존재하는 이중성의 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그럼 초전도체는 어떤가. 초전도 물질 내부에서 전자기파가 거동하는 방식을 잘 따져 그 운동 방정식을 적어 보니, 본래의 맥스웰 방정식이 아니라 약간 변형된 꼴의 방정식을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변형된 방정식을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 원리를 적용해서 재해석해보면, 흥미롭게도 금속 속을 지나가는 전자기파는 질량이 없는 입자의 방정식, 초전도체를 지나가는 전자기파는 질량이 있는 입자의 방정식에 해당된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즉, 본래 질량이 0이었던 광자가 초전도체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질량이 유한해지는 것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다: 왜 광자는 초전도체 속에서 몸이 무거워지는걸까?
이 질문에 대해 앤더슨이 준 대답은 이러했다. 우선 앤더슨의 제안 이전에 잘 알려진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초전도체 내부에 남부-골드스톤Nambu-Goldstone 상태라고 부르는 새로운 종류의 파동 상태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파동-입자의 이중성을 적용해보면 이걸 남부-골드스톤 입자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입자 또한 본래 질량이 없었다. 초전도체 밖에서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려는 광자도 본래 질량이 없었다. 이제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두 입자가 만나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답: 광자가 무거워진다!
19금으로 흐를 위험이 조금 있긴 하지만 인간적인 드라마로 비유를 하자면 이렇다. 바람처럼 가볍게 세상을 떠도는 두 남녀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자 양은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몸이었고, 남부 군은 강 건너 초전도 마을에만 살고 결코 이 마을을 떠날 수 없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청년이었다. 어느 날 광자 양이 무심코 강을 건너 초전도 마을에 들어왔고 두 사람은 한눈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 결과 광자 양은 그만 몸이 무거워졌다. 무거워진 몸 때문에 더 이상 어딜 돌아다닐 수 없게 된 광자 양은 강어귀에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한편 남부 군은 죄책감 때문인지 마음이 무거워져 그만 이름도 힉스로 바꾼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전히 초전도 마을에 살기는 했지만, 그의 존재를 확인하기는 무척 어려워져 버렸다.
참 우스운 연애 소설 같은 이런 일이 실제 초전도 물질 속에서 벌어진다는 점을 앤더슨은 지적한다. 남부 군과의 연애로 몸이 무거워진 광자는 초전도체의 껍질 부근에서만 발견된다. 이 껍질의 두께는 보통 물질에서 그저 마이크론 정도이고 (마이크론은 1 밀리미터의 천 분의 일에 해당하는 두께다), 그 이상 깊이 초전도체 속으로 들어가면 광자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광자는 전자기파이고, 자기장은 전자기파의 일부니까, 결국 자기장도 초전도체 속으로 침투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기장은 초전도 물질을 통과하는 대신 위에 있는 그림처럼 그 주변을 빙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마이스너 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앤더슨의 제안이 나온 지 2년 만인 1964년, 여러 명의 입자 이론 물리학자들이 입을 모아 비슷한 현상이 소립자의 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은 영국의 피터 힉스Peter Higgs였다.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힉스 입자. 다른 말로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 이 입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곳은 유럽의 초거대 가속기 연구소 CERN이다. 힉스 입자의 발견이 2012년 CERN에서 공식화되자 그다음 해인 2013년, 힉스와 또 다른 이론 물리학자 앙글레르Francois Englert는 신의 입자를 이론적으로 예측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초전도체의 배부른 광자에 대응되는 소립자도 있다. W 입자, Z 입자가 바로 그것인데, 이미 1983년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로부터 약 30년 만인 201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무책임한 힉스 씨”가 발견된 셈이다. 초전도체 속에 사는 힉스 씨를 실험실에서 관측하는 데 성공한 것 역시 지금부터 채 10년이 안 된다.
아침 신문 기사의 제목이 만약 “마이스너의 발견: 초전도체는 자기장을 밀어낸다!”였다면 독자가 굳이 그 내용까지 읽어보려고 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만약 앤더슨이란 뛰어난 편집장이 이 신문사에서 일했더라면 그 제목은 좀 더 멋지게 바뀌었을 것이다: “초전도체: 질량이 없는 헐벗은 광자에게 질량을 주는 자비!” 좀 더 자극적인 제목을 원한다면 “신의 입자 발견!”이라고 바꿔 달 수도 있다. 어떤 제목을 붙이느냐에 따라 독자 수,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조회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달라질 것 같긴 하다. 그러나 차분히 따져 보면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은 온네스의 냉장고에서 나왔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힉스 입자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온네스가 평생을 바쳐 만든 바로 그 냉장고 앞에 서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