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7월 12일 밤, 베를린. 옆집 사람의 거동이 수상하다. 이웃에는 카이제 빌헬름 연구소에 다니는 노년의 여교수가 살고 있다. 교수는 유대인인데도 오스트리아 국적이라서 연구소에서 쫓겨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도 끝이다. 이제 오스트리아는 독일로 합병이 됐고 비아리아인의 공직 금지를 금하는 법에 따라 교수도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터이다. 그런데 이 밤중에 교수가 짐가방을 들고 차를 타고 떠난다. 독일을 떠나려는 걸까? 이웃은 경찰에 신고를 한다.
이웃 사람의 촉은 정확했다. 7월 12일 밤,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는 30년을 보낸 베를린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이웃 사람은 늦은 밤 짐가방을 들고 나선 마이트너를 목격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아는 물리학자에게 확인을 했다. 망명갈 사람이 낮에 학생 논문을 고쳐주고 있었겠냐고, 물리학자는 경찰을 안심시켰다. 물리학자는 마이트너의 제자였다. 제자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마이트너의 이름을 유태인 수용소 희생자 명단에서 찾았어야 했을 지도 모르겠다.
집을 나선 마이트너는 30년 지기 동료 오토 한Otto Hahn, 1879-1968의 집으로 향했다. 마이트너는 자신이 떠난다는 것을 아는 몇 명의 동료와 베를린에서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다음 날 네덜란드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네덜란드까지 마이트너와 동행한 디르크 코스터르Dirk Coster, 1889-1950는 그날 저녁 한에게 전보를 쳤다. “아기가 잘 나왔고, 모든 것이 잘 됐다.”
당시 독일의 기준에서 보면 마이트너의 네덜란드행은 ‘불법’이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합병되면서 독일인이 된 마이트너는 독일 여권이 필요했지만, 독일 정부는 마이트너에게 새로운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처럼 ‘잘 알려진 유대인’이 외국에 나가 독일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사례를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가오는 위기 속에서 마이트너의 국내외 동료들은 그를 안전한 해외로 내보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를 썼다. 미국에서 먼저 자리를 잡은 유태인 물리학자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k, 1882-1964는 마이트너의 미국 이민 절차를 밟기 시작했고, 닐스 보어는 스웨덴의 만네 시그반Manne Siegbahn, 1886-1978을 통해 스톡홀름 핵물리연구소에 마이트너의 자리를 하나 마련했다. 코스터르 등 네덜란드 동료들은 네덜란드 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스톡홀름으로 떠나는 마이트너에게 건넸다. 이런 노력들 덕에 1938년 8월 1일 마이트너는 스톡홀름에 무사히 도착했다. 60이 다된 나이에 새로운 곳에서, 이렇다 할 직함도 없이, 새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마이트너의 인생 역작이 탄생했다. 핵분열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베를린에서 오토 한,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1902-1980과 함께 해 온 실험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베를린을 떠나기 전까지 마이트너와 한,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켜 우라늄(원자번호 92)보다 더 무거운 새로운 원소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3-4년간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지만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는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 가벼운 토륨(원자번호 90), 악티늄(원자번호 89), 라듐(원자번호 88) 같은 가벼운 원소만 생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이트너가 베를린을 떠난 후에도, 한은 실험 결과를 마이트너에게 알려왔다. 1938년 12월 한은 수상한 실험결과를 알려왔다. 중성자를 흡수한 우라늄에서 생성된 동위원소를 분리해 내는 과정에서 라듐을 분리하기 위해 바륨을 이용했는데, 라듐이 바륨처럼 반응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중성자와 충돌한 우라늄에서 라듐 대신 원자번호 56의 바륨이 생성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우라늄보다 약간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원자량이 반에 가까운 원소가 생성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편지를 받은 마이트너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같이 보내려고 온 조카 오토 프리슈Otto Frisch와 이 문제를 의논했다. 그들은 무거운 물방울에 가벼운 요동을 주면 작은 물방울 두 개로 분열하는 것처럼 무거운 원자핵도 중성자가 충돌하면 두 개의 작은 원자핵으로 분열할 것이라는 보어의 물방울 모형을 채택하여 이 현상을 설명했다. 오토 프리슈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나 궁금해 하는 한에게는 정확히 알리지 않은 채, 둘은 이를 논문으로 작성했다. 그 무렵 한과 슈트라스만은 위에서 언급한 실험 결과를 공표했고, 그로부터 열흘 만인 1939년 1월 16일, 마이트너와 조카 오토 프리슈Otto Frisch의 논문이 네이처에 출판되었다. 원자폭탄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6일, 최초의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었을 때, 마이트너는 스웨덴 시골 마을의 친구 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옆집 사람이 그 소식을 알려줬고 곧이어 방송국에서 기자가 최초의 핵분열 발견자를 취재하러 시골마을까지 달려왔다. 마이트너는 자신이 원자폭탄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는 미국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고 이번에도 그는 원자폭탄 연구와는 무관함을 강조했다. 이후 마이트너는 미국에 초청되어 미국 각지를 돌며 강연을 하고 명예 학위를 받으며 핵분열 발견자의 명성을 누렸고, 스톡홀름에서도 이전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 무렵, 핵분열의 또다른 발견자인 오토 한은 영국에 구금되어 있었다. 전쟁 중 독일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던 한은 연합군의 알소스 작전Alsos Mission에 따라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붙잡혀 영국 시골의 비밀 안가에 갇혀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진행 과정에 대해 심문받고 있었다. 연합군이 넣어 준 신문을 보고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들은 한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했지만(독일 원자폭탄 개발 참가자들은 우라늄 임계 질량 계산을 잘못해서 전쟁 중 개발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믿었다), 곧 그 소식에 절망하여 자살까지 생각했다.
두 사람의 상반된 처지를 뒤집은 것은 노벨상 발표였다. 1945년 노벨위원회는 전쟁으로 미뤄졌던 1944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오토 한을 선정했다. 선정 이유는 핵분열의 발견이었다. 노벨화학상은 세 명까지 공동 수상이 가능했지만 마이트너나 슈트라스만은 수상자 명단에 없었다.
한의 노벨화학상 단독 수상은 마이트너와 한 중에 누가 핵분열을 발견했는가에 대한 우선권 논쟁으로 이어졌다. 우선권 문제는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한 1939년부터 시작되었다. 한은 마이트너가 상의도 없이 오토 프리슈와 논문을 낸 것이 내심 서운했다. 거기에 닐스 보어는 1939년 2월 Physical Review에 마이트너와 오토 프리슈의 핵분열 발견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해 한을 더욱 서운하게 만들었다. 연쇄반응과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방출된다는 사실 등도 연이어 발표되면서 한은 자신의 공헌이 과소평가되는 것처럼 느꼈다.
이런 한의 서운함 뒤에는 복잡한 상황이 놓여 있었다. 보어가 마이트너와 프리슈의 역할을 강조했던 대척점에 놓여 있던 것은 한과 슈트라스만이 아니라 미국의 과학자들이었다. 당시 미국 과학자들은 빠른 속도로 핵분열과 관련된 연구 결과들을 내놓고 있었는데, 보어는 이로 인해 미국 물리학자들이 유럽 과학자들을 제치고 핵분열 발견의 우선권을 인정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그런 점에서 보어는 마이트너와 프리슈의 발견을 강조했다. 한과 슈트라스만의 역할을 축소시키려던 것이 아니라 한과 슈트라스만을 포함한 유럽 팀의 우선권을 강조하려던 것이었는데, 이 사정을 모르던 한은 자신이 제외되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핵분열 발견이 물리학과 화학의 융합 연구라는 점도 한의 불안감을 높이는 데 영향을 줬다. 핵분열 과정의 이해에는 물리학과 화학이 모두 동원되었다. 중성자 충돌은 물리 분야, 그 후에 일어나는 화학 반응 분석 및 원소 확인은 화학의 분야, 방사성 붕괴 과정 분석은 물리 분야 등 핵분열 자체는 물리와 화학의 경계 없이 진행되었다. 마이트너의 연구팀에서 한과 슈트라스만은 화학적 분석을, 마이트너는 물리적 분석을 담당했다. 따라서 우라늄 원소의 핵분열 과정에서 바륨을 발견한 작업은 한과 슈트라스만이 주도했고, 이것을 핵분열로 해석하는 일은 마이트너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일단 발견이 이루어지자 핵분열은 화학보다는 물리학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핵분열 과정에서 일어나는 방사성 붕괴에 대한 연구와 연쇄 분열, 질량 감소와 에너지 방출과 같은 연구들이 연이어 이루어지고 폭탄의 가능성까지 논의되면서 문제의 주도권은 물리학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들은 마이트너와 프리슈의 논문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한의 논문에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주인공이지만 무대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생각이 한을 지배했다. 그럴수록 그는 자신과 슈트라스만의 우선권을 주장했다.
“1939년 3월 3일, 리제! … 당신과 오토 프리슈가 논문에서 최대한 객관적이려고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그 점은 전혀 의심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이 그 견해를 제대로 피력했는가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라늄 분열의 우선권이 점차 슈트라스만과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고, 오토 에르바허와 쿠르트 필립이 말했는데, 점점 그들 말이 맞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이트너는 발견이 당연히 한과 슈트라스만의 것이고 자신의 공헌은 그것을 고전적인 물방울 모델에 근거하여 설명한 것이라며 오해를 풀고자 했지만, 우선권에 대한 집착으로 한은 마이트너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1939년 1월에 낸 논문에 자신이 썼던 구절마저 잊고 있었다. “핵화학자들이 물리학자에 가까워졌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런 과감한 단계[핵분열]로 갈 수는 없습니다.”
1945년의 노벨화학상 선정은 전쟁으로 잠잠했던 우선권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물리학자들은 마이트너가 수상자 명단에 없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고 마이트너도 자신과 오토 프리슈의 이름이 빠진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슈트라스만도 자신의 이름이 없어 무척이나 서운했을 것 같다.
그 다음 해인 1946년, 스톡홀름에 있었던 마이트너는 수상을 위해 영국에서 온 오토 한과 오랜만에 재회했다. 반가운 재회였지만 속시원하게 기뻐하기도 어려운 처지들이었다. 한은 마이트너가 약간 씁쓸한 표정이었다고 기억했는데, 그것은 마이트너의 감정이기도 했지만 한 자신의 감정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핵분열이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과 몇 년에 걸쳐 함께 한 노력의 성과였다는 것은 누구보다 한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단독 수상이 그저 기쁘기만 할 수는 없었다. 한은 노벨상 상금을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과 함께 나누었다. 마이트너는 그 돈을 기부했다.
한의 노벨화학상 단독 수상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붙는다. 화학상이라서 물리학자인 마이트너는 받지 못했다고도 하는데, 그러면 슈트라스만이 제외된 이유가 설명되지 못한다. 마이트너가 여자라서 배제되었다고도 하는데, 여성 연구자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노벨위원회의 경향을 보면 어느 정도 그런 영향도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는 왜 슈트라스만이 빠졌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한의 단독 수상에는, 보어가 핵분열 발견에서 마이트너를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한의 역할을 축소되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로 상태로 감금되어 있던 한을 굳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동료들의 응원과 지지를 국제적으로 알려서 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제스처였던 것이다. 마이트너도 이런 식의 도움을 받은 바가 있다. 나치 정권의 위협 속에서 플랑크를 비롯한 동료 물리학자들은 매해 마이트너를 노벨상 후보자 명단에 올렸던 것이다. 비록 노벨상 수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정황을 이해하더라도 오토 한의 단독 수상은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 결정이었다. 다행히도 1966년 미국 에너지부에서 수여하는 엔리코 페르미상은 마이트너와 슈트라스만, 그리고 한이 공동으로 수상했다.
나치가 정권을 잡지 못했다면, 그래서 마이트너가 독일을 떠날 일이 없었더라면 이들은 우선권을 두고 기분 상할 일이 있었을까? 마이트너는 새로 자리 잡은 스톡홀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인시켜 줄 성과가 필요했고, 한은 반反나치주의자로 베를린에서 압박을 받으면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성과가 필요했다. 그런 외부적 압박이 없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세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간 논문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Photo Credit
Lise Meitner ©IAEA, Otto Hahn ©Basch, […] / Opdracht Anefo, Supermarine Spitfire LF.XVIe ‘RW382 / 3W-P’ (G-PBIX) ©Alan Wilson”Raising the Flag on Iwo Jima”, 23 February 1945 ©USMC
참고문헌
- Ruth Lewin Sime, Lise Meitner: A Life in Physic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 Patricia Rife, Lise Meitner and the Dawn of the Nuclear Age (Birkhäuser, 1999)
- 박민아, 『퀴리&마이트너: 마녀들의 연금술 이야기』 (김영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