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1941년 9월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가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를 방문한다. 두 사람 모두 양자물리학의 발전에 끼친 눈부신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학자였다. 그에 더해 당시 39세였던 하이젠베르크는 당시 55세였던 보어와 사제지간이기도 했다. 젊은 하이젠베르크에게 보어는 존경하는 스승인 동시에 물리학자로서의 경력과 연구와 관련된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항상 조언을 아끼지 않던 자상한 멘토이기도 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덴마크는 독일 제3제국의 점령하에 있었기에,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는 독일의 전쟁 연구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던 점령국 과학자와 피점령국의 저명한 물리학자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 난처한 상황을 상징하듯 하이젠베르크가 코펜하겐을 방문한 공식 목적은 옛 스승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치 선전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이 만남이 흥미로운 이유는 만남의 내용에 대한 양측의 설명이 극적으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치 이중슬릿 실험에서 빛이 측정 장치를 어떻게 설치하는지에 따라 입자의 속성과 파동의 속성을 드러내듯, 1941년 코펜하겐 만남에 대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서로 양립 가능하지 않는 ‘측정’ 결과를 내놓았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측정’ 결과는 그의 지적 회고록인 <부분과 전체 Der Teil und das Ganze>에 자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책에는 고등학생 시절의 단편적 기억에서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하이젠베르크의 삶의 모습과 사유의 흔적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머리말에서 하이젠베르크가 투키디데스를 인용하며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이 책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한 비망록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의 삶의 결정적 지점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만남과 대화를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덕분에 다른 회고록에 비해 장들 사이의 유기적 응집력이 높은 편이다. 반면 이 책은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범으로 의심받기도 했던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의 전시 중 행동을 암묵적으로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저술된 것일 수도 있기에 독서에 주의가 필요하다.1

사실 1941년 만남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해명’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1956년 독일에서 출간된 로버트 융크의 책 <천 개의 태양보다 더 밝은>을 읽고 그가 융크에게 보낸 편지에서다. 편지에서 하이젠베르크는 1941년 보어와의 만남에서 과학자들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지를 논의하였다고 기억하면서, 자신의 원래 의도는 보어로부터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는 과학자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은 이유를 들으려는 것이었는데 그 의도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아 대화가 어색하게 끝났다고 회고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1927년 제안한 불확정성 원리에 대해 1930년 ‘현미경’ 사고실험을 통해 설명했다. 현미경을 통해 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서는 파장이 아주 짧은 광자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광자의 운동량이 커져서 전자의 운동량에 교란을 줄 수밖에 없다. 이 교란을 피하려고 파장이 긴 광자를 사용하면 운동량 교란은 피할 수 있겠지만 대신 위치 측정이 부정확해질 수밖에 없다. 주목할 점은 이때까지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원리가 미시세계 측정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교란의 결과라고 해석했다는 점이다. 즉 1930년의 하이젠베르크는 측정하려는 양자적 속성에 본질적으로 (즉 존재론적으로) 불확정성Unbestimmtheit/indeterminacy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측정 장치(즉, 인식론적 도구)가 측정결과의 불확실성Unsicherheit/uncertainty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교환가능하지 않은 연산자에 대응되는 물리적 측정이 갖는 원리적 불확정성으로 이해하는 현대의 표준적 견해와 다른 해석이다. 즉,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원래부터 확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정확하게는 알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기보다는, 처음부터 오직 부분적으로만 확정되어 있는 ‘불확정적’인 물리량이라는 해석이 현대의 표준적 해석인 것이다.2

재미있는 점은 하이젠베르크가 보어와의 대화를 회고하면서 정확히 이런 종류의 ‘불확실성’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대화 중에 사용한 언어적 표현이 그의 ‘의도’를 보어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실패한 불완전한 표상이었다는 점을 아쉽게 여긴다. 결국 하이젠베르크 입장에서 그의 ‘의도’ 자체는 존재론적으로 확정적이었지만 불확실하게, 즉 오해되어 보어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설명과 달리 그와 보어의 대화가 진정으로 불확정적이었을 가능성이 보어의 대안적 회고를 통해 제기되었다. 로버트 융크는 하이젠베르크로부터 받은 편지를 발췌하여 <천 개의 태양보다 더 밝은>의 덴마크어 판에 수록했고, 이 책을 읽은 보어는 격노했다. 융크는 하이젠베르크로부터 받은 편지 내용을 소개하면서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이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일종의 ‘태업’을 했다고 주장했다고 썼는데 이 점에 대해 보어는 강하게 반발한다.

비록 하이젠베르크가 1956년 편지에서는 이런 주장을 직접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부분과 전체>에서는 이런 취지의 주장을 매우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결국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전후 독일을 비롯한 세계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추구하게 될 것이기에, 자신은 그때 필요한 핵물리학의 기초 연구를 수행했을 뿐 적극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더해 자신은 나치 관계자들에게 핵무기 개발은 엄청난 자원 투여가 필요하기에 ‘원리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이 전쟁에서 사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여러 차례 전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이처럼 핵무기 개발의 ‘현실적’ 어려움을 강조함으로써 실제로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은근히 암시하는 셈이다.

 

하지만 1941년 만남에 대한 보어의 ‘측정’ 결과는 하이젠베르크의 그것과는 명백하게 달랐다. 보어는 융크의 책과 그에 수록된 1941년 만남에 대한 하이젠베르크의 회고와 관련해 1947년 하이젠베르크에게 보내려고 편지를 쓴다. 보어의 수많은 다른 편지처럼 끝내 보내지 못하고 보어 아카이브에 보관되던 편지는,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1941년 코펜하겐 만남을 다룬 마이클 프레인의 희곡 <코펜하겐>이 1998년 런던에서 초연되고 큰 파문을 불러 일으키자 다른 관련 문헌과 함께 대중에 공개되었다.3

보어는 이 편지에서, 1941년 만남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자신과 동료 독일 과학자들이 지난 2년간 집중적으로 핵무기 개발과 관련된 문제를 연구해왔으며, 자세한 기술적 사안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핵무기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확신한다고 말했다고 기억한다. 비록 하이젠베르크가 독일 과학계의 거물이었지만 점령국 과학자인 보어와의 대화에서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독일 핵무기 개발에 대해 자세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모두 각자의 회고에서 하이젠베르크의 핵무기 관련 언급이 암시적이고 간접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상황의 모호함, 특히 두 사람의 회고 모두 코펜하겐 만남 이후 15년 이상 지난 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연극 <코펜하겐>이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를 좀 더 자유롭게 묘사하고 있음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연극에서 보어가 기억하는 하이젠베르크는, 보어에게 연합국의 과학자들과 연락이 닿는지를 타진한 후 보어를 통해 연합국의 핵무기 개발 상황을 알아내려고 시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정작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있다는 점을 연합국 과학자들에게 알려서 연합국에서도 끔찍한 핵무기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보어가 노력해주기를 에둘러서 말했다고 기억한다. 한편 하이젠베르크가 기억하는 보어는 핵무기 개발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단언에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보어는 자신도 하이젠베르크가 말해주기 전에 당연히 핵무기 개발이 원리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놀란 이유는 단지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 개발이 실질적으로 독일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당당하게 말했기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이처럼 1941년 코펜하겐에서 이루어진 만남이 정확히 어떤 성격이었는지에 대해 두 당사자의 기억은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1941년 만남 직후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이 만남이 이전의 만남과 별반 다르지 않은 ‘화목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적고 있다. “보어는 큰 소리로 책을 낭송하고, 나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쳤다”고 말이다. 결국 1941년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만남은 역사적 실체의 수준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럴까? 하이젠베르크는 여러 저술을 통해 자신이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미를 비롯한 여러 친구의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독일에 남아 정권에 협조하는 ‘타협’을 했던 이유는 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할 것을 예견하고 전후 독일의 재건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이었기에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동료 과학자에 비해, 자신은 더 어려운 선택을 해야만 했다고 해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명과 일관되게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독일의 핵폭탄 개발 계획의 책임자이기는 했지만 제조에 소요될 비용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예측하여 연합국이건 독일이건 현실적으로 전쟁이 끝나기 전에 핵폭탄 개발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독일 당국에도 그렇게 보고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실제로 수행했던 연구는 오직 전후 예상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원자로 연구에 한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을 비롯한 독일 핵개발 팀원들은 전쟁 직후 영국에 감금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미국이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하이젠베르크는 미국의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과학기술적 발명품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하이벤베르크의 주장은 보어를 비롯한 다른 물리학자들의 진술이나 당시의 기록과 어긋나는 점이 많다. 카시디를 비롯한 여러 연구자들이 최근 공개된 나치 치하의 비밀자료를 분석하여, 하이젠베르크가 나치 정권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2차 대전에서 승리 가능성을 믿었으며 이런 배경에서 전쟁 관련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을 보여준다.4 자신의 조국이 어떤 이유에서건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독일 최고의 과학자 대우를 받던 시절에조차 항상 이방인이었던 아인슈타인과 달리 젊은 시절 독일 민족 중흥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경력을 가진 하이젠베르크로서는 나치를 위한 전쟁 연구에 반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 시기 자신의 활동이 ‘소극적 태업’이었다는 그의 기억은 여러 객관적 자료에 비추어 볼 때 자기기만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1941년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만남은 그 구체적인 대화의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불확실성이 남아 있고 그 내용의 윤리적 함의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하이젠베르크적 의미로 ‘불확정적’이기는 어려워 보인다.

참고문헌

  1. 이상욱, 2012,  「『부분과 전체』」,  불확정적인 사유와 삶의 기록」, 「물리학과 첨단기술」 제21권 12호, 39-44쪽.
  2. Baggot, Jim, 2011, The Quantum Story: A History in 40 Momen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3. Cassidy, David C., 2009, Beyond Uncertainty: Heisenberg, Quantum Physics, and the Bomb, New York: Bellevue Literary Press.
  4. Frayn, Michael, 2000, Copenhagen, New York: Anchor Books.
  5. Heisenberg, Werner, 1969, Der Teil und Das Ganze, Berlin: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역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2016, 『부분과 전체』, 유영미 옮김, 서울: 서커스]
이상욱
HORIZON 편집위원,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