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7년 6월, 옥스퍼드에서 진행된 영국과학진흥협회BAAS, British Association for Advancement of Science 모임에서 양조업자 제임스 프리스콧 줄James Prescott Joule, 1818-1889은 역학적 일과 열의 등가성에 대한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줄의 정교한 실험 결과는 놀라웠지만, 그의 발표는 무관심 속에 끝날 뻔했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아마추어의 발표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여서 사회자는 요약문만 짧게 발표하라고 재촉했다.
그렇게 잊힐 뻔했던 줄을 발표를 열역학 발전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바꾼 것은 이제 막 스물세 번째 생일을 맞은 젊은이였다. “그 젊은이가 들어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새 이론에 대한 흥미를 활발히 끌어내지 않았다면, 토론도 없던 내 발표는 별 코멘트도 없이 그냥 지나갔을 것”이라고 줄은 회고했다.1 줄의 발표에 생기를 불어넣은 젊은이는 19세기 물리학의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우리에게는 절대 온도의 켈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사람,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이었다.
과학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19세기 물리학자 중 누가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는지를 뽑았던 적이 있다. 영국의 패러데이, 줄, 맥스웰, 프랑스의 라플라스, 푸아송, 푸리에, 독일의 옴, 클라우지우스, 키르히호프 등 물리학 교과서를 수놓은 기라성 같은 물리학자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독일의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와 영국의 윌리엄 톰슨, 두 사람이었다. 연구의 우수성, 연구 분야의 다양성, 당대 사회에서의 영향력에서 두 사람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지만, 결국 최종 승자는 윌리엄 톰슨이 되었다. 연구에서야 둘 중 누가 더 낫달 게 없었지만, 부와 사회적 영향력에서 톰슨이 헬름홀츠를 앞섰다.
톰슨은 1866년 2차 대서양 전신 가설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어 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보다 앞서 1858년 진행됐던 1차 대서양 전신 사업에서는 아일랜드와 미국 간에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긴 도선을 깔았는데, 대서양 간의 긴 거리를 통과하도록 보낸 강한 전류는 도선의 어딘가를 녹여버렸다. 몇 번 신호도 보내지 못한 도선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거기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투자금도 대서양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톰슨은 미러 갈바노미터mirror galvanometer를 개량하여 민감한 전류계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했다. 톰슨의 미러 갈바노미터는 네 개의 작은 자석을 뒷면에 붙인 거울을 가는 명주실로 긴 코일의 중앙에 매달아 만들었다. 거울에 빛을 쏘면 반사된 빛줄기가 몇 피트 떨어진 스크린의 0점에 맺혔다. 코일에 전류가 흐르면 거울에 붙은 자석은 힘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거울도 회전하면서 스크린에 맺히는 빛의 위치도 변하게 된다. 톰슨은 긴 코일과 거울의 회전을 이용하여 약한 전류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는 전류계를 만들었고, 이 특허로 돈방석에 앉았다. 2차 대서양 전신 사업의 성공으로 톰슨은 기사knight 작위를 수여 받았다. 이후 톰슨은 남작에 서훈되어 후대 사람들에게 켈빈 경Lord Kelvin으로 기억되었다. 19세기 가장 성공한 물리학자로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막상 톰슨의 업적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조금 난감하다. 뉴턴-만유인력, 패러데이-전자기 유도, 맥스웰-맥스웰 법칙, 헬름홀츠-에너지 보존법칙, 이렇게 위대한 과학자들이라 하면 보통 대표 업적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기 마련인데 톰슨은 시간이 좀 걸린다. 기껏해야 절대 온도 단위 켈빈(K) 정도가 떠오르는데 섭씨 온도의 셀시우스, 화씨 온도의 패런하이트 정도의 무게감만 가질 뿐 엄청 대단한 업적처럼 감탄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전자기학, 열역학을 비롯해 19세기 물리학에서 톰슨의 손이 닿지 않은 분야가 없었건만, 그의 이름 하나로 대변될 만한 업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톰슨의 과학적 성취를 한 마디로 전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연구가 하나의 발견, 하나의 공식, 하나의 실험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열역학에서 톰슨의 성취를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열역학 법칙 성립에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에너지 보존법칙은 헬름홀츠, 열역학 제2법칙은 클라우지우스가 더 직접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2 열역학에서 톰슨의 역할은 법칙의 정립자라기보다는, 이론들 사이의 모순을 찾아내는 예리한 문제 제기자라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줄과의 만남으로 돌아가 보자.
1847년 BAAS에서 줄의 발표는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첫째, 역학적 일이 열로 변환된다. 둘째, 역학적 일에서 열로의 변환에는 일정한 변환 비율이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가 열의 일당량이라고 부르는 값을 알아냈던 것이다. 톰슨의 예리한 눈에 줄의 주장과 카르노의 열기관 이론 사이의 모순이 포착되었다.
사디 카르노Sadi Carnot, 1796-1832는 산업혁명 속에서 열기관의 역할이 무르익었을 때 증기기관을 연구한 프랑스 엔지니어였다. 카르노는 수력학적 유비를 사용하여 증기기관에서 열기관의 작동을 이해했다. 그의 수력학적 유비의 핵심은 물레방아였다. 물레방아에서 발생하는 역학적 일은 고지대와 저지대 사이의 높이차가 있을 때만 발생하고 물의 질량(m)에 비례한다. 이것을 열기관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열기관에서 발생하는 역학적 일은 열기관에서의 고온부와 저온부 사이의 온도 차가 있을 때 발생하고 이때 발생하는 일은 열의 양(Q)에 비례한다.
수력학적 유비로부터 카르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이끌어냈다. 첫째, 물레방아에서 높이 차이가 있어야 물이 흐르는 것처럼, 열기관에서도 고온 T1과 저온 T2의 온도 차이가 있을 때만 역학적 일이 만들어진다. 둘째, 물레방아에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물의 양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열기관에서도 고온부에서 저온부로 흐르는 열의 양은 변하지 않는다.
첫 번째 주장은 열이 흐르는 방향성을 나타냈다. 열은 고온에서 저온으로만 흐른다는 것이고 그 반대로의 흐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보면 당연해 보이는 주장이지만, 당시로써는 열기관에서 고온부와 저온부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것으로, 이는 제임스 와트가 열기관의 실린더와 응축기를 분리 설계한 개량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두 번째 주장은 열의 양의 보존을 의미했다. 이는 열기관에서 역학적 일이 발생해도 고온부에서 저온부로 흐르는 열의 양은 변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 이는 역학적 일과 열이 상호변환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카르노의 주장은 열을 칼로릭이라는 물질로 간주했던 당시의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열은 수소나 산소처럼 보존되는 기본 원소 중 하나로 간주되어 라부아지에의 원소표에서 칼로릭이라는 이름으로 한 자리를 차지했다. 라플라스도 칼로릭 이론을 받아들였고, 칼로릭 원소 사이에 척력이 작용한다는 가정을 덧붙였다. 칼로릭 원소 사이의 척력은 열의 확산을 설명하고 뜨거운 기체가 팽창하는 것도 설명했다.
줄의 발표에서 톰슨이 포착한 카르노와 줄의 이론의 모순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카르노에게 일과 열은 상호변환적인 관계가 아니었지만, 줄에게 일과 열은 상호변환적인 관계였다. 열기관이 역학적 일을 하면, 줄의 이론에서는 고온부에서 있던 열의 양 Q1에 비해 저온부에서의 열의 양 Q2는 감소해야 하고 역학적 일은 그 차이인 Q1-Q2에 비례한다. 카르노의 이론에서는 Q1=Q2가 되는 것이다.
1847년 BAAS 모임에서 두 이론 사이의 모순을 발견한 후에도 톰슨은 한동안 카르노의 이론이 옳다고 생각했다. 모임 직후 공학자이자 연구 동료였던 형 제임스 톰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줄의 이론이 몇 부분에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카르노의 이론이 옳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다음 해인 1848년 발표한 “절대 온도 단위” 논문의 부제가 “카르노의 열의 동력 이론과 르뇨의 관찰에 기반하여”를 부제로 달고 있던 것에서도 그의 입장이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줄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몇몇 현상은 톰슨이 줄의 이론으로 전환하는 것을 막았다. 그중 하나가 열의 전도 현상이었다. 금속 막대의 한쪽 끝을 데우면 금속 막대를 통해 열이 흐르지만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카르노의 이론에서는 이 현상을 여러 방식으로 설명 가능했다. 수력학적 유비를 사용하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물레방아가 없으니 역학적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될 수도 있었다. 칼로릭 입자 사이의 척력으로 인해 한쪽 끝에 모여 있던 열의 원소들이 퍼져 나간다고 설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열과 일의 변환을 주장하는 줄의 이론에서는 이 현상의 설명이 어려웠다. 줄은 열의 변환으로 역학적 일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는데, 왜 금속의 전도에서는 열이 역학적 일로 변환하지 않는 것인가?
톰슨이 카르노의 이론에 집착하고 있는 사이, 해결책은 엉뚱한 방향에서 등장했다. 독일의 루돌프 클라우지우스는 줄과 카르노 간의 모순을 지적한 톰슨의 논문에서 강력한 통찰을 얻었다. 1850년 클라우지우스는 변형된 카르노 이론을 발표했다. 줄과 카르노 사이의 모순에 주목한 클라우지우스는 카르노의 이론의 첫 번째 주장, 즉 열은 고온에서 저온으로만 흐른다는 주장을 카르노 이론의 본질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 주장인 열의 보존성을 폐기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톰슨이 제기했던 열의 보존에 관한 줄과 카르노의 이론 사이의 모순이라는 문제는 클라우지우스에 의해 해결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톰슨의 입장에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열의 전도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톰슨이 클라우지우스 같은 선택을 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것이었다. 금속의 전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이런 고민이 결국 톰슨을 열의 본질에 관한 새로운 이론으로 이끌었다. 1851년 톰슨은 “열의 동역학적 이론On the Dynamical Theory of Heat”을 발표했다. 이 이론에서 그는 열이 물체를 구성하는 입자들의 운동의 효과라는, 말 그대로 열의 동역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금속에서의 열전도 과정에서 열은 고체 주변을 둘러싼 기체들의 역학적 운동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변환된 기체들의 역학적 운동은 인간이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흩어진다고dissipate 톰슨은 주장했다. 클라우지우스가 변형한 카르노 이론과는 다른 종류의 열역학 제2법칙이 제시된 것이다.
1851년 논문과 이어지는 몇 편의 논문을 통해 톰슨은 열역학의 기본적인 전제들을 제시했다. 첫째, 톰슨은 열이 칼로릭 같은 근본 물질이 아니라 분자 운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2차적 효과라는 점을 밝혔다. 둘째, 그는 열을 대신하는 새로운 보존량으로 에너지 개념을 제시했다. “고체에서 열이 전도될 때 ‘열의 작인thermal agency’이 사용되었다면, 그것이 만들어내는 역학적 효과는 무엇이겠는가? 자연이 작동할 때 어떤 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에너지도 파괴될 수 없다.” 에너지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보편적인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한 것은 톰슨이 처음이었다. 열과 역학적 일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톰슨은 에너지를 물리학의 보편적 보존량으로 확립시키는 데 일조했다.
1867년 톰슨은 피터 테이트Peter Guthrie Tait, 1831-1901와 함께 <자연철학 논고Treatise on Natural Philosophy>라는 물리학 교과서를 발표했다. 이 영향력 있는 책을 통해 톰슨은 기존의 물리학을 에너지 개념과 동역학적 세계관 위에 재편했다. 그의 이름은 하나의 공식, 하나의 법칙, 하나의 실험으로 규정되지 않지만, 열역학을 동역학적 세계 위에 정립시켰다. 19세기 최고의 물리학자로 뽑기에 손색이 없다.
참고문헌
- Robert D. Purrington, Physics in the Nineteenth Century (Rutgerts University Press, 1997)
- Peter Harman, Energy, Force and Matter: The Conceptual Development of Nineteenth-Century Physic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 Crosbie Smith, The Science of Energy: A Cultural History of Energy Physics in Victorian Britain (Univ. of Chicago Press,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