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ar 1632 Florenza, Galileo′s Half-successful ‘Dialogue’

 

1632년 2월 22일 투스카니 대공 페르디난도 2세에게 근대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1564~1642가 회심의 역작, 『대화』를 헌정한다. 이 책은 과학사적으로, 태양중심적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이론의 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한 책으로 유명하다. 또한 훗날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게 된 이유를 제공해 준 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이 책은 『두 주요 세계 체계에 대한 대화Dialogue Concerning Two Major World Systems』라는, 18세기에 결정된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1 이 제목은 프톨레마이오스 천문체계와 코페르니쿠스 천문체계의 장단점에 대해 토론하는 책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 하지만 책이 출판되기 전, 당시 규칙에 따라 교회 검열을 받기 위해 갈릴레오가 교회 당국에 제출한 출판 원고의 제목은 『바다의 간만에 대한 대화Dialogue on the Ebb and Flow of the Sea』였다. 이 제목은 검열 당국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제목으로 책이 출간되면 지구가 움직인다는 갈릴레오 주장의 근거로 조수간만의 현상이 제시되는 것을 교회가 허가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632년에 출간될 당시 책의 제목은 간단하게 『대화』였고, 단지 이 책이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는다는 점이 저자 소개, 즉 ‘메디치 궁정 수학자이자 자연철학자인 갈릴레오’에서 부각되었다. 우리에게 갈릴레오는 너무나 당연하게 물리학자이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활동하던 당시에 갈릴레오는 ‘궁정 수학자 겸 자연철학자’라는 다소 복잡한 학자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는데, 이후에 보겠지만 이런 이중적 정체성은 갈릴레오의 학술적 주장의 인식론적 지위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대화』는 출간 당시부터 교회 당국과의 오랜 교섭을 통해 내용과 전달 방식이 협의되었으며, 당시 바티칸 교황과 정치적 경쟁관계였던 메디치가의 상징적 후원을 배경으로 출판되었다. 그렇다면 출간 전에 이미 교회 검열을 통과한 책이 어떻게 이후에 종교재판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릴레오의 삶과 과학 연구가 그전까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2

갈릴레오는 흔히 근대과학의 선구자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근대과학 형성기의 과도기적 인물의 특징 또한 보여준다. 갈릴레오가 사망한 직후 출생한 아이작 뉴턴에 의해 완성된 근대 과학혁명은 갈릴레오가 열렬하게 ‘옹호’했던 코페르니쿠스주의를 갈릴레오가 열렬하게 ‘반대’했던 케플러의 타원궤도와 결합한 다음 이를 보편중력을 상정하여 통합적 이론체계로 만든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보편중력처럼 과감한 ‘가설’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뉴턴 운동법칙의 기초가 되는 운동학kinematics을 체계적으로 탐구함으로써 근대 역학의 기초를 놓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가 옹호했던 관성 개념은 뉴턴 이후로 우리에게 익숙한 직선 관성이 아니라 고대의 세계관에 더 부합하는 원 관성, 즉 원운동을 하는 물체는 자연적으로 그 운동을 계속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것이었다.3

 

갈릴레오는 의학을 공부하길 원했던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피사대학에서 천체의 운행을 계산하는 응용 수학자로 교육을 받은 후 1589년에 피사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의 가계를 떠맡게 된 갈릴레오는 동생들의 교육과 결혼 그리고 자기 (법적으로 사생아인) 자식들의 부양을 위해 대학교수보다 보수가 좋고 안정적인 직장을 찾게 된다. 갈릴레오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아서 젊은 시절에는 탁월한 문장력과 수사학적 기교로 북부 이탈리아 지역에서 ‘똑똑한 젊은이’로 이름을 날렸다. 결국 갈릴레오는 자신의 과학적 재능과 수사학적 재능을 결합하여 사회적, 재정적으로 자신을 후원해 줄 사람을 찾게 된다.

 

갈릴레오는 우선 베네치아 원로회에 접근하여 자신이 스스로 만든 망원경을 ‘첨단 무기’로 제시하면서 후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늘 바다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해야 했던 베네치아에게 육안으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다가오는 배가 적인지 아닌지를 알려줄 수 있는 망원경은 분명 매력적인 신기술이었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지나치게 높은 금액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쉽게 타결되지 않았고, 그러는 사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망원경이 베네치아 시장에서 팔리게 되었다. 결국 베네치아 원로회는 갈릴레오가 원했던 높은 보수와 안정된 지위보다 훨씬 못한 계약 조건을 제시했고 이에 실망한 갈릴레오는 다른 후원자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피렌체 공국의 새로운 군주 코지모 2세가 바로 그 후원자였다. 그는 마침 갈릴레오가 파두아 대학 재직 시절 가정교사로 수학을 가르치던 학생이기도 했다. 사실 갈릴레오는 코지모 2세가 아주 어린 아이였을 때 메디치가에 편지를 써서 자신이 장차 피렌체의 막강한 권력자로 클 사람의 교육을 맡겠다고 자청하기까지 했다. 코지모 2세는 자신의 옛 스승인 갈릴레오를 잊지 않았고, 갈릴레오가 1610년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을 관측하면서 이런 유리한 조건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이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인 갈릴레오는 위성에 대한 관찰 결과를 담은 책 『별의 전령Sidereus Nuncius』을 출판하고 이를 투스카니 대공이 된 코지모 2세에게 헌정했다.4 이에 대해 메디치가는 갈릴레오를 ‘대공의 수학자 겸 자연철학자’로 임명하고 1000 스쿠디라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연봉을 지급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와 자신의 계약조건을 두고 오랜 기간 교섭을 벌였다. 이때 연봉만큼이나 중요했던 내용은 ‘공식 직함’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수학자란 우주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기술’하는 일만 할 수 있었다. 응용수학자로서 천문학자 역시 천체의 운행을 수학 모형으로 정확하게 계산하는 일만 할 수 있었지, 그 현상 배후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 논할 인식론적 자격을 갖지 못했다. 이런 ‘진정한 원인’에 대한 논의는 수학자보다 학술적 지위가 높았던 자연철학자만이 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메디치가로부터 자신이 파두아 대학 수학교수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지위, 즉 자연철학자로서 우주 만물의 현상의 배후에 대해 논할 지위를 부여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자연철학적 논의를 구체적인 현상, 예를 들어 자신이 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한 현상에 대한 수학적 분석에 기반하여 수행하기를 원했다. 즉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갈릴레오가 원했던 것은 자연현상에 대한 관측과 이론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얻으면서 비로소 수학자인 동시에 자연철학자로의 인식론적 지위 향상을 성취한 것이다.

새로운 지위에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갈릴레오는 다음 해 로마를 방문하여 직접 설치한 망원경을 사용해 목성의 위성을 비롯한 자신의 천문학적 발견을 널리 알렸다. 중요한 점은 이 당시부터 갈릴레오의 과학 연구를 지지하는 교회 성직자와 유력한 귀족들이 다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갈릴레오가 지속적으로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옹호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반대파도 있었다. 하지만 종교 재판 이전까지 갈릴레오의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는 결코 나쁘지 않았고 많은 경우 밀월 관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갈릴레오는 『대화』를 출간하는 시기도 자신의 과학적 주장과 사회적 수용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선택했다. 사실 갈릴레오는 『대화』에 담길 내용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해 왔으며 상당량의 초고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종교계에 후원자와 친구가 많았던 갈릴레오는 종교적 관용이 점점 사라지는 상황에서 모험을 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 자신의 지적 성취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던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고 자신의 측근들이 교황청의 요직에 자리 잡게 되자 갈릴레오는 지금이야말로 코페르니쿠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보다 공개적으로 천명해도 괜찮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특히 새로 선출된 우르바누스 8세는 자신에게 헌정된 갈릴레오의 『시금자』를 무척 좋아해서 식사 때 즐겨 낭송하도록 했을 정도로 갈릴레오에게 호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뛰어난 과학적 성취에 다시 한번 ‘사회인식론적’ 도움을 결합할 절호의 기회를 보았던 것이다.

『대화』는 출간 직후부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당시로써는 보기 드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동시에 『대화』는 평소 갈릴레오에 대해 칼을 갈고 있었던 반대파에게 공격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에서 바보처럼 묘사되는 심플리치오가 우르바누스 8세를 빗댄 것이라는 소문은 갈릴레오에게 치명적이었고, 결국 갈릴레오는 1633년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으로 의심받을만한 행위를 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최종적으로는 가택연금에 처해지게 된다.

‘갈릴레오 사건Galileo Affair’으로 알려진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았다는 것이다.5 물론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면 종교재판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재판 판결문에 코페르니쿠스주의의 옹호가 죄목으로 명시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주장은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진다. 하지만 이 주장의 문제는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한 갈릴레오는 이단 행위를 했다고 정죄당한 반면, 정작 코페르니쿠스 이론 자체가 (혹은 좀 더 정확히는 가톨릭교회가 인정하는 코페르니쿠스 이론, 즉 수학적 계산 도구로서의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한 여러 사람들(교회 성직자까지 포함하여)은 천상계에 대한 기존 이론과 자신들의 관찰 내용이 어긋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지닌 여러 장점 역시 대개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선뜻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충분한 증거가 확보되기 전에 코페르니쿠스 이론의 승리를 선포하는 일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티코 브라헤와 같은 뛰어난 관측 천문학자에 의해서 경험적으로 반증 되었다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별의 연주시차가 관찰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갈릴레오조차 당시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설명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회 신부 학자들 포함한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과 코페르니쿠스 이론 사이에서 보다 결정적인 증거가 나올 때까지 합리적인 판단 중지를 취하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천문학자들은 두 체계의 장점을 조합한 티코 브라헤의 체계를 선호했다.

하지만 이는 앞서 설명한 응용 수학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진정한 우주의 구조를 논하는 자연철학이나 신학의 차원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절충적 입장이었다. 즉 코페르니쿠스 이론이나 그 이론의 변형인 티코 브리헤 이론을 천문학 계산에서 사용하는 것에 대해 교회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지만, 증거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연철학적으로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단은 신교의 발흥과 구교 세계 내에서 스페인으로부터 교권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단의 색출과 처벌에 더욱 집중하면서 성경의 해석에 대해 보다 엄격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성경은 비유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성경의 어느 부분을 글자 그대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준이 제시되지 않았다. 하지만 갈릴레오가 『대화』를 출간하는 시기에 로마 교황청은 여러 상황적 이유에서 보다 엄격한 글자 그대로의 해석을 채택하게 되었다.

문제는 갈릴레오가 매우 적극적으로 성경을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는 점이었다. 갈릴레오는 실제로 성경이 ‘제대로’ 해석되기만 한다면 자신이 옹호하는 코페르니쿠스 이론과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종교재판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자신이 당한 부당한 대우를 종교와 과학의 대립이라는 방식이 아니라, 참다운 종교인인 자신을 가톨릭교회의 불순분자들이 모함해서 벌어진 사건으로 파악했다. 매우 사적인 기록에서조차 갈릴레오가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으로 보았다는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오히려 갈릴레오는 자신이 수학자에서 자연철학자로 인식론적 지위가 상승했던 것처럼, 자연철학자에서 신학자로 또 다른 인식론적 지위 상승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오직 신학자만이 성경의 ‘참된 해석’에 대해 논의할 인식론적 지위를 갖기 때문이다. 결국 갈릴레오는 자신이 망원경으로 관찰한 결과에 기초해 우주의 참다운 구조를 논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연철학적 연구를 통해 성경의 참된 의미를 해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갈릴레오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과 자연철학적 연구 사이에 별다른 긴장 관계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갈릴레오는 종교에 저항한 과학자였다기보다는 종교와 과학이 양립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수많은, 종교를 가진 과학자의 선배였던 셈이다.

물론 이와 같은 갈릴레오의 희망은 그가 활동하던 이탈리아의 상황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갈릴레오는 성경의 해석에 대해 교황과 대적할 만한 지적 권위를 가질 수 없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투스카니 대공의 후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는데 당시 메디치가는 같은 피렌체 출신인 바르베리니가와 세력 다툼을 벌이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오가 사안의 중대함에도 불구하고 재판 중의 처우나 재판 결과에서 모두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했던 메디치가의 후원 덕분이었다.

 

결국 갈릴레오의 진정한 죄목은 단순히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주의 참된 구조임을, 그리고 그 사실이 성경과 모순되지 않음을, 그리고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임을 주장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그의 판결문에서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분명 교황청이 자신의 지위를 넘어서는 인식론적 주장을 한다고 판단한 갈릴레오를 굴욕적 방식으로 처벌한 것은 부당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은 종교와 같은 비합리적 제도에 의해 근거 없이 억압당하는 과학자의 전형적 사례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몇몇 과학자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과학은 사회적, 윤리적 잣대로 평가되거나 간섭을 받지 않아야만 가장 잘 발전할 수 있다는 근거로 오용되어서도 안 된다.

갈릴레오가 추구했던 코페르니쿠스주의로의 인식적 전환은 그가 매우 공들이고 상당한 근거를 갖춘 것이기는 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극복하기 어려운 여러 경험적, 개념적, 인식론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훌륭한 과학자이자 놀라운 수완가답게 자신이 활용할 수 있었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이 전환을 성사시키려고 노력했고 『대화』를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당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교회의 세속적, 인식적 권위에 눌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분명 부당한 일이었지만 갈릴레오가 성취하려던 인식적 전환 역시 오직 뉴턴을 통해서야 완전한 정당화가 가능했던 것이었음을 고려할 때 과학연구가 진행되는 전형적 방식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갈릴레오의 『대화』는 오직 절반만 성공한 책이었다.

참고문헌

  1. 이상욱 2014, 「갈릴레오의 과학연구: 과학철학적 STS(과학기술학) 교육의 한 사례」, 『과학철학』 17(2): 127-151. 
  2. Biagioli, Mario 1993, Galileo, Courtier: The Practice of Science in the Culture of Absolutism,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 Drake, Stillman 1978, Galileo at Work: His Scientific Biography,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4. Galileo, Galilei, 1632[2001],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 New York: The Modern Library.
  5. McMullin, Ernan (ed.) 2005, The Church and Galileo,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6. Numbers, Ronald L. (ed.) 2009, Galileo Goes to Jail and Other Myths About Science and Religion,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7. Sobel, Dava 2000, Galileo's Daughter, London: Fourth Estate.
이상욱
HORIZON 편집위원, 한양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