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957년 9월 19일 런던 대학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개최된 실험생물학 학회Society for Experimental Biology의 특별 강연자는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 1916-2004이었다. 크릭은 20세기 분자생물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영국의 저명한 생물학자이다. 그는 무엇보다 미국의 과학자 제임스 왓슨과 함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의 분자구조를 밝히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며 1962년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과 함께 생명과학의 분자 혁명molecular revolution을 이끈 핵심적인 과학자 중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57년 그의 모교인 런던 대학에서의 강연은 크릭이 밝힌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지닌 생물학적인 의의를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려는 시도였다. 미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 전 세계에서 모인 생물학자들 앞에서 그는 한 시간여 동안 “단백질 합성protein synthesis“이라는 간략한 제목의 강연을 수행했다. 그리고 그는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는 20세기 생물학의 분자혁명molecular revolution을 이끌어나갔던 생명과학의 새로운 논리를 제시했다.
크릭의 이 강연은 현재에는 생물학의 “중심원리central dogma“강연이라 불린다. 그는 이 강연을 통해 생명체 내의 유전정보가 어떻게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단백질 분자들을 합성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유전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DNA가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을 합성하는데 관여할 조그마한 “어뎁터adaptor”분자들이 있을 것이며, 이 과정을 통해 유전정보가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단백질 분자를 합성할 수 있을 것이라 제안했다.
곧 크릭이 이론적으로 제안한 어뎁터 분자들은 실험을 통해 tRNA라는 것이 밝혀졌으며, 그 과정에서DNA 유전정보가 mRNA, 그리고 tRNA를 통해 단백질 합성을 제어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크릭은 이 강연에서 DNA를 구성하고 있는 선형적 염기서열이 유전정보를 이루며, 이 DNA 정보가 RNA로 이전되고, 이것이 단백질 합성을 제어하며, 이에 분자생물학의 근간을 이루는 유전자 중심의, 선형적 생명관을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호레이스 저드슨Horace Judson이라는 생물학사 연구자는 크릭의 강연이 “생물학의 논리를 완전히 바꾸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리학자에서 분자 생물학자로
크릭은 본래 런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던 중 2차 대전 발발로 인해 해군에 징집된 영국의 6,000여 명의 과학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영국 해군의 지뢰 설계 프로그램에서 일하면서 그 탁월한 계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2차 대전 후 자신의 물리학적 지식과 기술을 활용해 생물학의 주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당시 엑스레이x-ray가 물체와 부딪힐 때 나타나는 분광학적 성질을 이용해 단백질과 같은 분자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케임브리지 대학University of Cambridge의 캐번디쉬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의 새로운 생물학 연구에 동참하고자 했다. 캐번디쉬 연구소는 수많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물리학의 메카였으며, 특히 당시 이곳에서 결정학을 창시하고 발전시킨 공로로 191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로렌스 브래그 경Lawrence Bragg이 엑스레이 회절법을 이용해 단백질 분자들의 구조를 연구하고 있었다.
크릭은 전후 영국의 의학연구위원회Medical Research Council에 지원을 했다. 의학연구위원회는 그가 2년 동안 생물학을 먼저 공부하고 온다면 그의 연구를 지원해 줄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크릭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생물학 공부에 전념하였으며, 마치고 마침내 1949년 캠브리지 대학에서 엑스레이 분광학을 이용해 헤모글로빈이라는 단백질 구조를 규명하고 있었던 막스 페루츠Max Perutz의 연구실에 합류할 수 있었다.
1951년 제임스 왓슨과의 만남
1951년 미국의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은 단백질의 3차원적 구조를 연구하고 있는 일군의 물리학자와 화학자들과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 캐번디쉬 연구소에 합류했다. 왓슨의 회고에 의하면 크릭은 당시 35살의 “무명 과학자”로,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만 동료들 간에는 말만 많은 떠버리이자 참견자인 “만년 대학원생”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크릭은 자신이 배운 푸리에 이론을 사용해 엑스레이 회절 패턴을 통해 단백질 구조를 규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아직 졸업을 할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상태였다.
크릭과 왓슨은 1951년 겨울 단백질 구조보다는 보다 단순한, 그리고 당시 점차 유전정보를 지니고 있는 물질로 간주되기 시작한 DNA 구조를 규명하는 작업을 시작하고자 한다. 당시 생화학자 어윈 샤가프Erwin Chargaff는 DNA를 구성하고 있는 네 개의 염기서열, A, T, G, C 가 A-T, G-C의 1:1 비율로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고, 왓슨과 크릭은 이에 착안해 1951년 DNA 구조를 처음으로 제안한다. 이것은 특히 그들이 가위로 오려 만든 염기들의 화학 구조와 회절 사진에 바탕한 모델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첫 제안한 DNA 구조는 잘못된 계산과 가정에 기반해 있어 큰 실패로 간주되었다. 당시 캐번디쉬 실험실의 소장이었던 브래그는 이 DNA 구조를 보고 왓슨과 크릭의 미래에 대해 크게 걱정하여, 이에 대한 연구를 더 이상 하지 말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왓슨과 크릭은 당시 런던의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에서 DNA 구조를 밝히고 노력하던 경쟁자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의 DNA x-선 회절사진과 그 분석결과를 얻게 된다. 이 사진과 분석은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으로, 그녀의 동의 없이 왓슨과 크릭에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여러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이 지닌 당시 가장 정확한 DNA 회절사진을 가지고 이중나선 모델을 제안했던 것이다. 왓슨과 크릭은 DNA 이중나선 구조를 제안한 논문이 그녀의 사진과 자료에 기반했기에, 1953년 같은 학술지에 DNA 구조를 밝히는 그들의 논문, 그리고 이 모델을 확증하는 프랭클린의 페이퍼를 나란히 출판하였다. 1954년 크릭은 드디어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졸업을 하게 된다.
DNA 구조와 유전 코드, 분자생물학의 논리를 정립한 과학자로
1953년 DNA의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의 논문은 자신들이 밝힌 DNA 구조의 생물학적 함의에 대한 다소 도발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바로 DNA 이중나선 구조가 유전자가 지닌 정보를 어떻게 생물학적으로 저장, 발현, 그리고 전달시킬지에 관한 이들의 (결국 정확한 것으로 밝혀진) “가설hypothesis”이다. 이들은 이 논문에서 DNA가 지닌 A, T, G, C의 염기서열이 유전정보를 지니고 있으며, 이 정보가 세포 내에서 발현되면서 모든 생명현상들의 기반을 이루는 기능적인 단백질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1957년 크릭의 “단백질 합성”강연은 1958년 논문으로 출판되며, 여기에서 그는 DNA를 이루고 있는 염기들의 선형적 순서, 즉 염기의 순서가 하나의 생물학적 정보를 담고 있는 코드code라는 염기서열 가설sequence hypothesis를 제안했다. 즉 크릭은 일차원적 염기서열의 순서가 단백질의 합성을 지시하고 제어한다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가설을 제시했던 것이다. 화학자와 생물학자 모두 3차원적 분자의 구조를 통해 다양한 생명현상을 설명을 내놓고 있던 당시로서는, 일차원적 염기서열의 선형적 순서가 3차원적 생명의 세계의 질서를 구성한다는 크릭의 주장은 다가올 분자생물학적 사고와 후에 인간게놈프로젝트와 같은 생물 정보학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었다.
크릭의 “단백질 합성”의 두 번째 가설은 흔히 생물학의 “중심원리central dogma”라 부르는, 즉 DNA로부터 RNA, 그리고 단백질로 유전정보가 전달되면서 생명 현상을 관장하는 수많은 단백질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흔히 유전정보가 DNA, RNA, 단백질의 한 방향으로만 전달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 이 가설은 분자생물학의 중심원리로서,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분자생물학의 중요한 이론축을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이 가설은 세포 내에서 유전정보의 전달을 매개하는 tRNA의 존재를 예측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실험을 통해 그 존재가 밝혀졌다.
신경과학의 개척자로 나서다
한 가지 실험에 집중하기 보다는 파격적 가설과 도전 정신을 강조한 크릭은 1963년 생의학자 조너스 소크가 설립한 다학제적 연구기관 소크 연구소에 참여하며 분자생물학의 방법론과 이론들을 바탕으로 신경과학 분야를 개척하려 시도했다. 그는 당시 많은 분자생물학자들과 함께, 1960년대 중엽에 이르면 유전자의 발현과 조절에 관련된 이론적 토대가 이미 확립되어가고 있다고 믿었다. 일례로 저명한 분자생물학자인 군터 스텐트Gunter Stent는 생명현상에 대한 분자생물학적인 규명, 즉 유전자의 발현과 조절에 관한 일차원적이고 기능적인 규명은 앞으로 단지 실험적 발전의 진보에 달려 있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분자생물학은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크릭 또한 앞으로 보다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생물학의 발견들은 생명의 발생, 즉 하나의 배아에서 복잡한 생명체로 자라나가는 과정, 그리고 신경세포의 작동방식과 그 규명을 통해 의식consciousness과 같은 고차원적 생명현상에 대한 탐구에서 나타날 것이라 믿었다. 크릭은 1970년대 이후 새로운 세대의 과학자들에게 신경과학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이들을 자극하여 신경과학과 뇌과학 분야의 분자생물학화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크릭은 영국을 떠나 미국 캘리포니아에 정착하여 과학적 의식의 신봉자가 되었다. 당시 1960년대 캘리포니아에서는 반문화 운동counter-cultural movement의 부상으로 과학적 사고와 이성 자체에 대한 문화적 비판과 회의주의가 팽배했다. 크릭은 이에 맞서 과학적 사고의 신봉자를 자처했다. 그는 과학적 의식과 사고방식이야말로 종교나 사회, 문화적 믿음이 지닌 문제점들을 파악하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크릭은 여러 저서들을 통해 1990년대 중반까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과학적 기반 하에 다시 접근하면 새로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가 모든 사회문제 해결의 근본적 기반이 될 것이라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 의식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20세기 분자생물학의 혁신을 가져온 과학적 태도와 과학적 의식, 사고방식에 바탕해서 각종 사회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지금은 잊혀졌지만, 크릭은 과학의 문화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사회적 유용성을 강조하는 과학사상가로서의 저술들에 남은 생을 받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