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김삼순의 농학박사학위 취득 소식은 한국 뿐 아니라 일본의 언론을 통해서도 대대적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서는 “한국 여성에 농학박사: 재류 연장 7번의 맹공부”라는 제목으로 그녀가 학위를 취득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했고, 국내 언론들은 “한국 최초의 여자 농학박사”에 초점을 맞추며 학위를 취득한 나이가 57세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런데 이 양국 언론 보도가 공통적으로 주목한 점이 있다. 김삼순이 일제강점기부터 학업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은 결과가 적지 않은 나이에도 박사가 될 수 있었던 힘이었다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이나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 학부였던 제국대학을 졸업해야 했다. 물론 우장춘처럼 제국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우수한 연구성과를 논문으로 발표하고 그 결과를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이나 연구소에서 연구 활동하며 학위를 취득해야 했다. 문제는 제국대학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정식 절차는 대학입시 보다 어렵다는 일본의 구제(舊制)고등학교를 졸업해야 갈 수 있었고, 특별히 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정원에 미달 된 학과에 시험을 보고 진학할 수 있는 방계 입학이 있었다. 이렇듯 제국대학의 입학은 일본인도 진학하기 어려울 정도로 까다로웠고, 당연히 피지배민이었던 조선인은 극소수만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여성은 일본인이어도 조선인 남성보다 어려웠던 터라, 조선인 여성이 제국대학에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이가 바로 김삼순으로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여성이었다.
김삼순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의 매우 부유한 집안에서 3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녀의 고향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조선에서도 일찍부터 근대 학문을 가르쳤던 ‘창흥의숙’이 있던 곳으로, 향학열이 남다른 지역으로 유명했다. 그러다 보니 김삼순의 아버지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 창평보통학교에 여자부를 신설할 수 있도록 재원을 지원했다. 덕분에 여성은 초급 교육도 받기 어려웠던 조선의 시골에서 그녀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1924년 김삼순은 서울에 있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경성여고보)로 진학했다. 당초 그녀의 부모는 어린 여자애가 홀로 경성에서 공부하겠다는 결정에 반대했지만, 그녀의 학구 의지와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큰 오빠의 지원으로 경성여고보에 갈 수 있었다. 경성여고보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그녀는 ‘일본으로의 유학’이라는 더 큰 꿈을 갖게 됐다. 김삼순의 유학의 불씨를 지핀 것은 당시 경성여고보의 여성 교사로 있던 손정규(孫貞圭, 1886-1955)였다. 손정규는 경성여고보 1회 졸업생으로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東京女子高等師範学校, 이하 도쿄여고사) 가사과를 졸업한 후 1922년 경성여고보의 교사로 부임한 첫 여성 교사로, 김삼순은 그녀를 보며 유학을 생각하게 됐다는 회고를 남겼다.
1928년 김삼순은 도쿄여고사로 진학했다. 진학 당시 20세였던 그녀는 경성여고보 진학 때보다 더 큰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조선인은 일본인 여성보다 일찍 결혼하는 관습이 있어 이미 결혼 적령기를 지나고 있을 때였던 데다, 물리적으로도 조선에서 일본으로 공간이 완전히 바뀌어야 했기 때문에 그녀의 부모는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삼순은 자신의 학업 의지를 꺾지 않으며 끝내 가족들을 설득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김삼순은 도쿄여고사 이과에 청강생으로 입학했다. 이는 피지배민인 조선인 여성이 겪어야 할 제도적 차별의 결과였다. 도쿄여고사는 일본의 5년제 중등학교 졸업자를 정식 선발하여 구성한 본과, 정식 선발 조건에는 부합하지 않으나 일부 본과 수업을 이수하면 교사 자격을 주는 선과로 구분되어 있다. 청강생은 본과생과 마찬가지로 이과, 문과, 가사과 중 하나를 선택하여 4년간 수업을 받게 되나 졸업증이 아닌 수료증이 나왔고 그 대상은 외국인이었다. 도교여고사에서는 조선과 대만의 중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을 외국인으로 분류하여 청강생으로만 입학을 허용했고, 그마저도 각 과에 2명 내외만 선발하여 김삼순은 이과에 유일한 조선인으로 입학했다.
한편, 김삼순이 이과를 택한 이유는 경성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전기나 전차 등 근대 문물을 보며 앞으로는 과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였다고 한다. 도쿄여고사에서 그녀는 당대 일본의 최고 여성 과학자로부터 사사 받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바로 1927년 일본 여성 최초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야스이 코노(保井コノ)와 일본 여성 최초의 제국대학 본과 입학생이었던 쿠로다 치카(黒田チカ)가 도쿄여고사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두 여성 모두 이과 담당 교수로 김삼순은 야스이에게 세포학을. 쿠로다에게 유기화학을 배우면서 학문뿐 아니라 여성 과학자로서 스승들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33년 김삼순은 도쿄여고사를 졸업했다. 그런데 이때 그녀는 ‘청강생편입규정’ 덕분에 청강생이 아닌 선과생으로 졸업했다. 이 제도는 1910년 도쿄여고사의 외국인 특별규정에 따라 입학한 청강생 중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3학년 혹은 4학년이 시작될 때 선과생으로 졸업할 수 있도록 편입시키는 규정이었다. 이 규정에 따라 청강생이었던 조선인들의 일부가 선과생으로 졸업할 수 있었고, 김삼순은 4학년 때 선과로 편입했다. 당시 7명의 청강생 중 선과 편입은 그녀를 포함해서 2명뿐이었다. 이 선과로의 편입은 결과적으로 훗날 제국대학으로 향하는 길에 중요한 초석이 되어 주었다.
도쿄여고사를 졸업한 김삼순은 조선으로 돌아와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는 여고사 졸업생은 의무적으로 문부성이 지정한 장소에서 교사로 근무해야 하는 규정인 <고등사범학교 졸업생 복무규정>에 따른 것으로 의무 복무기간은 2년이었다. 졸업 후 조선으로 돌아간 김삼순은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2년간 근무한 후, 1935년부터는 경성여고보로 옮겨 화학과 수학을 담당하며 교사 생활을 이어갔다. 도쿄여고사 출신의 젊은 여교사로서 촉망받으며 근무하던 김삼순은 1938년 돌연 경성여고보의 교사직을 사직했다. 그 이유는 일본의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일본행 역시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다. 무엇보다 당시 나이 30세로 이미 혼기를 놓친 상태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녀의 의지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김삼순은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여동생의 시숙인 이태규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태규는 일본 최초의 조선인 이학박사이자 교토제국대학의 교수로서 조선 최고의 석학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그녀의 어머니를 만나 “박사가 된 다음 꼭 혼인시킬 테니 유학을 보내달라”라고 간청해 준 덕분에 김삼순은 다시 한번 일본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삼순은 왜 갑자기 대학 진학을 결정한 것일까? 김삼순의 회고에 따르면 교사를 하면서도 계속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하나 대학을 진학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도쿄여고사 선과 졸업으로는 규정상 대학 진학이 어려웠다. 그런데 1938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일본이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부족해진 학생을 메우기 위해 제국대학에서는 방계 선발을 늘리며 본격적으로 여성 입학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당초 제국대학 진학 시 방계 2순위였던 여고사 본과 출신을 1순위로, 선과 출신이 해당되는 3순위였던 <중등학교 교원 면허장> 소지자를 2순위로 규정을 바꿨다. 이전까지는 방계 1순위도 진학이 어려웠으나, 전시체계 이후에는 아주 간헐적으로 2순위까지도 선발되는 경우가 생겼다. 이런 상황을 알게 된 김삼순은 5년간의 교사 생활을 접고 일본행을 택한 것이다.
김삼순은 우선 도쿄여고사의 쿠로다 화학연구과로 진학했다. 그녀가 1년 과정인 연구과로 진학한 이유는 한동안 학업을 중단한 상태로, 연구 경험도 없고, 대학 입학 정보도 알 수 없어서였다. 실제 그녀는 연구과에서 그간 놓고 있던 학업을 재정비하고, 쿠로다를 비롯한 일본인 스승들에게 자신의 진로를 상담했다. 이때 스승들은 제국대학보다는 당시 여고사 출신이 가장 선호하고 있는 문리과대학(文理科大学)으로 진학해 볼 것을 권했다. 문리과대학은 고등사범학교가 승격되어 만들어진 대학으로 여고사의 선과 출신도 방계 1순위로 선발하고 있어 김삼순에게는 더욱 유리했기 때문에 그녀는 히로시마문리과대학 화학과에 응시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대학 진학은 좌절됐지만, 김삼순은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 남았다. 그녀는 연구 경험을 좀 더 쌓고 싶다는 판단에서 쿠로다의 소개로 일본 규슈제국대학 생리화학교실의 조수가 되었다. 당대 제국대학의 조수는 연구실에서 연구를 보조하고 사무를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김삼순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생겼다. 홋카이도제국대학(北海道国大学, 이하 홋카이도제대) 이학부에 많은 결원이 생겨 방계 입학생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게 된 것이다.
홋카이도제대 역시 다른 제국대학처럼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을 우선으로 선발하고, 그 남은 자리를 방계로 선발했다. 문제는 홋카이도제대는 구제고등학교 출신이 선호하는 학교가 아니어서, 전시체제에 돌입한 이후에는 방계입학자가 더 많을 정도였다. 따라서 홋카이도제대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방계 선발 조건을 2순위까지 넓혀 성적 우수자를 뽑기로 했다. 이로 인해 김삼순은 2순위 ‘중등학교 교원 면허장’ 소유자 자격으로 시험을 보고, 1941년 홋카이도제대 이학부 식물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그녀 나이 32세였다.
식물학과에 입학한 김삼순은 사카무라 테츠(坂村 撤)를 지도 교수로 하여 ‘식물생리학교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식물학 교실에 있으면서 대장균을 주제로 연구를 수행했다. 김삼순은 1943년 9월 “Nitrite의 흡수에 관한 연구와 사상균에 의한 초산 및 색소의 흡수에 관한 연구”라는 졸업논문을 제출하고 조선인 여성 최초의 제국대학 졸업생이 되었다. 전시체제로 단축학기제가 시행되어 2년 반 만에 졸업한 그녀는 곧바로 홋카이도제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런데 김삼순은 이학부가 아닌 농학부로 들어갔다. 그 이유는 졸업논문을 쓰던 중 곰팡이에 관심을 갖게 된 그녀는 농학부의 한자와 준(半澤洵) 교수의 응용균학 강좌에 감명을 받아서였다. 한자와는 당대 응용균학의 권위자로 낫토 연구의 일인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김삼순은 농학부 농예화학과 대학원의 한자와의 응용균학교실에 들어가 박사학위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1944년 말 2차 세계대전이 심해지며 일본 내 상황이 악화되자 김삼순은 안전을 위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잠시만 있을 생각이었던 귀국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되면서 일본에서의 연구 활동을 접은 채 조선에 머물게 되었다.
한국에서 해방을 맞게 된 김삼순은 일단 고향인 담양에서 지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했다. 상대는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한 강세형(姜世馨)으로 1953년 제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가였다. 결혼 후에도 담양에 머물고 있던 김삼순은 해방 후 경성여자사범학교의 교장이 된 손정규로부터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 경성여자사범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했다.
이 학교는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에 따라 경성사범학교와 합해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 개편되어 김삼순은 자연스럽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생물학과 교수가 됐다.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는 제국대학 학위가 있으면 충분했고, 교원들의 학력이 전문학교 수준인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제국대학 이학사였던 김삼순의 존재는 이미 남달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박사학위에 대한 미련이 커 지속적으로 일본으로 갈 방안을 찾고자 노력했다. 이미 교수가 된 김삼순이 다시 일본으로 가고자 한 것을 보면, 분명 교수라는 직업보다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서울대 교수로 근무하던 중 갑자기 일본 유학이 다시 허용되었다. 김삼순처럼 학업을 마치지 못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외무부의 면접만 보고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게 한 것이다. 1948년 9월 김삼순은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외무부 면접을 본 후 다시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김삼순의 일본행은 좌절되었고, 그보다 더 큰 불행이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학업을 누구보다 응원해 주던 큰 오빠가 피살되었고, 집은 북한군에 의해 전소되어 집안의 상황이 나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삼순 본인의 건강도 매우 나빠지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이 지났지만, 김삼순은 유학을 포기하지 않았다. 1960년 정권이 바뀌자 이전 정부에서 발급받은 비자가 무효가 되어 유학을 위해서는 새로운 비자가 필요했다. 이에 김삼순은 문교부 편수관으로 취직하여 3개월간 근무한 후 장관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고, 홋카이도의 마리아수녀원에 연락하여 초청장을 받아 드디어 일본으로 가는 데 성공했다.
1961년 김삼순은 15년 만에 홋카이도대학이 된 모교로 갔다. 그녀는 응용균학교실에 대학원생이 아닌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일본의 교육제도 변화로 대학원으로 들어가면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했는데, 어차피 그녀의 목표는 박사학위 취득이었던 만큼 굳이 대학원생이 될 필요가 없었다. 홋카이도대학에서 김삼순은 누룩곰팡이가 분비하는 녹말을 당으로 분해하는 효소인 다카아밀라아제A(taka-amylase A)에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홋카이도대학에는 그녀의 관심 주제를 도와줄 수 있는 교수가 없었다. 이에 김삼순은 1963년 규슈대학(九州大学) 농학부의 도미타 키이치(富田義一) 교수의 생물물리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규슈대학으로 간 김삼순은 다카아밀라제A를 대상으로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도미타도 이 다카아밀라제A에 관심이 있던 터라 지도교수로서 그녀의 연구 계획에 좋은 평가를 했다. 규슈대학에 있으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만 매진해온 김삼순은 『일본농예화학회지』와 세계적인 과학잡지인 『Nature』에 논문을 게재했다. “다카아밀라제A의 광불활성화(1965)”, “리보플라빈에 의한 다카아밀라제A의 광증감불활성화반응(1966)“과 “자외선에 의한 다카아밀라제A의 불활성화반응(1966)“이라는 논문을 일본의 학술지에 발표했다. 그리고 도미타와 함께 “Substrate Effect on Heat Inactivation Of Taka-amylase A(1965)“와 “Inhibition of Photo-Inactivation of Taka-amylase A by Halogen Ions(1965)“를 Nature에 발표함으로써 세계적으로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김삼순은 이 논문들을 종합하여 1966년 “Photoinactivation of Taka-amylase A(다카아밀라아제A의 광불합성)”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제출했고, 그해 7월 농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가 탄생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7세였다. 김삼순의 박사학위 취득 소식은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화제를 모으며, 양국 언론들은 이 학위가 수십 년간 이어진 그녀의 학구 의지의 결과라는 것을 알렸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돌아오자마자 김삼순은 건국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연구보다는 강의에 집중했다, 한국에는 제대로 된 실험 장비가 없어 연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경기여보고 선배였던 서울여자대학의 학장인 고황경(高凰京)이 김삼순에게 찾아와 여성 교육을 위해 힘써 보자며 자신의 학교로 이직할 것을 권했다. 김삼순은 여성 교육에 대한 고황경의 비전과 학교 운영에 참여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1968년 서울여대로 옮겨 식품영양학과 창립 교수가 되었다.
김삼순은 서울여대로 이동한 다음부터 균학 연구에 착수했다. 균학은 곰팡이나 버섯과 같은 균류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생물학의 한 분과이다. 김삼순은 홋카이도제대 시절부터 이 균학에 관심이 많아 이학부를 졸업했음에도 굳이 농학부의 응용균학교실의 대학원생으로 진학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균학은 그녀의 박사논문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박사논문은 미생물로 인해 만들어진 성분을 조사하는 기초연구라면, 김삼순의 균학은 버섯을 대상으로 성분을 조사하여 분류하고 실용화할 수 있게 가공하는 응용연구라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균학 연구는 김삼순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균학을 택한 이유는 한국에서는 그녀의 박사논문 연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서 연구비를 마련하기가 어려웠으나, 균학은 정부의 관심을 끌 주제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김삼순은 서울여대 교수 임용과 함께 1968년 농촌발전연구소 연구부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이때 버섯을 주제로 균학 연구를 시작했다. 그녀가 왜 버섯을 대상으로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박정희 정부의 버섯에 관한 관심이 컸다는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 <양송이 생산 수출 확대계획>을 세워 전국적으로 재배를 권장하고 있었고, 1967년에는 농촌진흥청에 양송이 시험연구를 전담하는 응용균이과(應用菌理科)가 설치됐다. 이처럼 버섯은 국가의 관심 대상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때 김삼순이 내놓은 카드는 양송이가 아닌 ‘느타리’ 버섯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느타리는 한국인들이 즐겨 먹는 품종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인기가 높아져 느타리 재배 농가가 늘고 있었다. 이에 김삼순은 일본과는 차별화된 한국에 적합한 느타리 재배 시험연구를 하는 것을 목표로 1968-69년 정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그 결과 느타리가 한국에서 재배하기 좋은 품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고, 보급을 위해서도 노력하여 느타리를 새로운 유력 수출 품목으로도 주목받게 했다.
한편, 김삼순은 느타리 이외에도 다양한 균학 연구를 하였다, 우선 한국 전통 장류에 관심을 갖고 ‘낫토균’을 연구했다. 이는 스승 한자와의 전매특허와 같은 연구주제로, 그녀는 이 낫토균을 한국의 청국장에 결합하여 향미가 풍부하고 맛있으며 위생적인 청국장 개량 방법을 제안했다. 또한 토양에 존재하는 균류, 특히 죽림 토양에 관해 연구했다. 이를 통해서 식품의 발효에 적합한 균류를 찾아내 발효산업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 밖에도 불로초와 같이 약용이나 식용 가능한 야생 버섯의 인공재배 연구, 농촌 연료 문제 해결을 위한 메탄가스 연구, 커피 대용으로서 치커리 연구, 홍차 버섯의 상품화 연구 등 균학 내에서 실용화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를 시도했다.
김삼순의 균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은 연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녀는 균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이를 연구하는 집단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마침 한국에서는 과학기술 학회들이 활발히 설립되고 있었고, 서울여대 식품영양학과에 균학전공자인 이지열이 신임 교수로 부임했다. 이에 김삼순은 이지열과 함께 서울대 농대 정후섭, 약대 김병각 등의 협조를 받아 1972년 한국균학회를 창립했다. 초대회장으로 선정된 김삼순은 5년간 회장을 역임하면서 학회의 기틀 마련에 큰 힘을 썼다. <한국균학회지>를 창간하고, 균학자들의 네트워크를 마련하기 위해 각종 학술대회, 버섯 공동 채집회 같은 행사를 추진하는 한편, 성지학술상을 제정하여 사비로 상금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녀의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한국균학회는 오늘날까지도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균학 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1974년 서울여대에서 정년 퇴임한 김삼순은 고향인 담양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그녀는 <취원응용미생물(균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젊은 균학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세계적인 균학자들과 교류하며 균학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연구소는 그녀의 뜻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일단 담양까지 와서 연구할 인력이 없었고, 생각보다 운영비용이 많이 소요되어 국가의 연구비 신청을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1988년 연구소는 설립된 지 10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렇지만 연구소를 위한 김삼순의 노력이 완전 헛수고는 아니었다. 연구소에서 그녀가 꾸준히 진행한 과업이 있었다. 바로 후배 연구자이자 제자와 다름없던 김양섭(金養燮)과 함께 1990년 『한국산버섯도감』을 무려 80세의 나이에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버섯 중 325종의 버섯을 컬러로 형태, 분포, 생태 등을 자그마치 10년을 연구하여 집필한 것으로 그녀가 연구 의지를 마지막까지 불태워서 만든 역작이었다. 이 책을 정후섭은 “우리나라 버섯 연구에 있어 <원전(原典)>”이라고 평가하며 김삼순의 끊임없는 노력에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김삼순이 한국의 선구적인 여성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사실 그녀의 삶은 고난과 역경 그 자체로 고비를 넘길 때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없었다. 일제강점기의 피지배민이라는 사회적 차별과 여성이라는 시대적 억압이 만들어낸 이중의 장벽은 경성여고보, 도교여고사, 홋카이도제대를 졸업하기까지 김삼순이 과학자로 성장하는 데 큰 방해물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조금은 느리지만 포기하지 않고 시대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그 고비들을 넘어갔다.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은 되찾은 조국에서 뜻하지 않게 발생한 한국전쟁에서 비롯됐다. 전쟁으로 한동안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그녀였지만, 박사가 되겠다는 그녀의 의지는 세월이 지나도 꺾이지 않았다. 그 결과 그녀는 늦은 나이에도 박사에 도전하여 ‘한국 최초의 여성 농학박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는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박사가 된 김삼순은 낙후된 한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나이가 무색할 만큼 과학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쏟았고, 이는 오늘날 후학들에게 진정한 과학자의 모습으로 그녀를 기억하게 해주고 있다.
연재글 한국 과학기술의 결정적 순간들
참고문헌
- 김삼순, “성지 김삼순 박사 회고록”, 『한국균학회지』 1권 2호 (1989).
- 박택규, “원로와의 대담-우리나라 여성농학박사 1호 김삼순 박사”, 『과학과 기술』 26-5 (1991).
- Sun You-Jeong, The Emergence of a Pioneering Female Scientist in Korea: Biographical Research on Sam Soon Kim, Asian Women (2019).
- 선유정, “일제강점기 일본과 조선의 여성과학자-쓰지무라 미치요와 김삼순의 비교연구”, 『아시아문화연구』 55권 (2021).
- 선유정·김근배, “한국에서의 느타리버섯 연구 궤적―재배기술의 돌파구를 연 김삼순”,『한국과학사학회지』 44권 1호 (2022).
- 선유정·김근배, “균학자 김삼순 연구 궤적의 과학사적 접근”, 『한국균학회지』 50권 2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