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1982년 5월 경북 구미의 한국전자기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컴퓨터연구실의 미니컴퓨터DEC PDP11/70 화면에는 “SNU”라는 글자가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메시지는 서울대학교 전자계산기공학과의 컴퓨터DEC PDP11/44에서 전송된 것으로 국내 원거리 컴퓨터 네트워크 교신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이자 한국 최초의 인터넷 망인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이 개통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이 최초의 연결이자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인터넷 역사가 시작되는 결정적 순간의 중심에 전길남全吉男, 1943~이 있었다.
세계 인터넷의 역사 속에 함께한 전길남
“IT 강국”은 흔히 사용되는 한국에 대한 수식어 중 하나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전국을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연결하면서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인터넷 속도, 인터넷 사용 인구 등 인터넷과 관련된 각종 통계 지표의 세계 1위를 차지하며 가장 빠르게 연결된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성취가 가능했던 요인을 한국의 좁은 국토나 빨리빨리 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사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약 40년 전 인터넷이라는 용어가 자리잡기도 전에 그 어느 국가보다 빠르게 한국에 인터넷 기술을 도입하고 정착시킨 전길남이라는 과학자의 역할이 중요했다.
전길남이 SDN의 개통에 성공한 1982년은 세계적으로도 인터넷의 핵심적 기술은 물론 그 용어조차 정립되지 못한 시기였다. 인터넷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1962년 MIT 교수였던 존 리클라이더John C.R. Licklider가 제안한 “은하 네트워크Galactic Network”에서 출발했다. 이는 공유와 협력을 위해 컴퓨터끼리 서로 소통할 수 있게 연결하자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는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데이터를 전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떤 시스템을 가진 컴퓨터든 기종에 상관없이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먼저 데이터 전달의 획기적인 기술혁신은 196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다. 인터넷 등장 이전의 전신이나 전화와 같은 통신 교환방식은 송신자와 수신자를 1:1로 연결해 회선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회선교환circuit switching 방식이었다. 회선교환 방식은 하나의 통신이 연결되는 동안 같은 회선에 연결된 다른 장치들의 통신은 불가능하고, 회선 중 어느 한 곳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회선 전체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되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 문제의 해법으로 등장한 것이 데이터를 일정한 크기의 패킷으로 나누어 공유된 여러 회선에 동시에 전송하는 방식인 패킷교환Packet Switching이었다. 패킷교환 방식은 데이터 전송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MIT1961~1967, RAND1962~1965, NPL1964~1967 등 미국과 영국의 세 연구소에서 거의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네트워크와 네트워크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패킷의 흐름을 관리하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패킷교환 방식을 관장하는 통신 규칙 즉, 프로토콜이 필요로 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각 기관별, 제조사별 네트워크는 서로 다른 통신규약을 사용하고 있어 서로 다른 종류의 컴퓨터나 네트워크 사이의 연결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어떤 컴퓨터든 기종에 상관없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컴퓨터 구성 방식을 결정해 주는 하나의 표준 규약이 필요로 했고, 그것이 TCP/IP 프로토콜이었다. TCP/IP는 패킷의 전달 기능을 수행하는 인터넷 통신규약Internet protocol, IP과 흐름을 통제하고 손실된 패킷을 수정하는 기능을 하는 전송제어 규약Transmission Control Protocol, TCP을 동시에 수행하는 프로토콜이었다. TCP/IP는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 또는 서비스들을 가능케 하여 각 컴퓨터 사이의 호환성을 극대화시킨 범용체제였다.
이렇게 인터넷의 핵심 기술인 패킷교환 방식과 TCP/IP 프로토콜을 동시에 적용시킨 네크워크가 바로 미국 국방성 산하 미국 고등기술연구소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ARPA 1가 개발한 ARPAnet이었다. 전길남은 이런 인터넷의 핵심적인 기술들인 패킷교환 방식과 TCP/IP 프로토콜이 개발되던 시·공간에 함께 있었다. 전길남은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였지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그 누구보다 강했다. 그는 조국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1965년 오사카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UCLA 컴퓨터공학과에서 레너드 클라인락Leonard Kleinrock 교수의 지도하에 1년 반만인 1967년에 석사학위를 받았다. 클라인락은 패킷교환에 대한 이론을 개척한 인물로 1967년부터 ARPAnet 설계에 참여했다. 그는 1969년 ARPAnet을 통해 UCLA의 네트워크측정센터Network Measurement Center와 스탠퍼드연구소Stanford Research Institute간의 메시지 전송에 성공했는데, 이것이 ARPAnet의 완성이자 인터넷의 시작을 알리는 변곡점이었다. 또한 클라인락의 연구실에는 TCP/IP 프로토콜의 탄생에 기여한 빈트 서프Vinton Gray Cerf와 도메인 기술을 개발한 존 포스텔John Postel도 함께 있었다.
전길남은 비록 ARPAnet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직간접적으로 인터넷의 핵심기술이 개발되는 현장에 같이 있었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인터넷의 중요성과 핵심기술을 파악할 수 있었다. 클라인락, 빈트 서프, 존 포스텔 그리고 전길남은 모두 2012년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함께 헌정되었다.
영상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정
Internet Hall of Fame
시스템 엔지니어의 네트워크 연구
전길남이 박사과정에 다니던 시기는 1969년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 직후로 화성으로 무인 탐사선을 보내는 바이킹 계획Viking program과 태양계 외곽 행성들을 탐사하기 위한 보이저 계획Voyager program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우주선이 착륙했을 때 반응이나 온도변화 등의 연구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에는 NASA 제트 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에 들어가 우주선과 지구를 컴퓨터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연구를 했다. 이처럼 그가 전공한 시스템 엔지니어링 분야의 연구목적은 기존에 없는 것을 발명·발견하기보다는 다양한 변수 속에서 해당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특징은 훗날 그가 한국 최초의 인터넷을 성공시켰던 핵심 비결이기도 했다.
1979년 전길남은 한국 정부의 해외 과학자 유치 프로그램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귀국과 동시에 그는 한국전자기술연구소에서 네트워크 연구그룹을 결성하고 SDN 예비계획을 과학기술처에 제출했다. 그렇지만 이 계획은 정부 결재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의 전공은 컴퓨터 시스템과 통신 등 소프트웨어 분야였지만, 한국 정부가 그에게 요구했던 것은 하드웨어 즉, 컴퓨터 국산화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1980년대 초 컴퓨터 네트워킹은 미국에서도 이제 시작된 분야로 한국에서는 그것이 무엇이지 또 그것의 가치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전길남이 컴퓨터 네트워킹 기술 개발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내년에 그 기계 몇 개 팔 수 있어요?”라고 질문하는 수준이었다. 그가 근무하던 한국전자기술연구소조차 컴퓨터 네트워크 연구는 전길남이 개인 취미로 하는 프로젝트쯤으로 취급해 특별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81년 10월 23일 과학기술처의 주최로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에서 개최된 “미니 마이크로 컴퓨터 산업과 정보화 사회의 전망”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전길남은 “하드웨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소프트웨어 개발은 극히 부진한 상태”라고 지적하고 “특정의 사용자가 아닌 다수의 사용자가 사용 가능한 상품화된 소프트웨어 개발에 전력을 쏟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전길남의 외침은 큰 반향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도 전길남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 중점 사업 중 하나였던 컴퓨터 국산화를 앞세워 “Computer Architecture 개발”이라는 과제명으로 컴퓨터 네트워킹 연구 즉, SDN 개발 연구를 시작했다. SDN 개발 연구는 전길남을 총괄연구 책임자로 하여 서울대 전자계산기공학과(현 컴퓨터공학부)의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주로 참여했다. 1982년 5월 서울대와 구미의 한국전자기술연구소 사이의 교신은 이 과제로 진행된 것으로, 교신에는 UNIX 운영시스템, TCP/IP 프로토콜, 1,200bps 전용전화망이 사용되었다.
당시 컴퓨터는 제조사마다 각기 다른 운영체제를 사용했는데 UNIX 운영시스템은 어떤 기종의 컴퓨터에도 설치 가능한 이식성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운영체제의 핵심코드인 커널 소스가 공개되어 라이센스 없이 특정 용도에 맞게 변형이 가능한 오픈형 체제라는 장점이 있었다. SDN은 호환성 좋은 오픈소스 운영체제인 유닉스 기반으로 설계되어 여러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이 쉽게 참여할 수 있어 네트워킹의 구축뿐 아니라 확산도 용이했다.
그리고 TCP/IP는 ARPANet 개발자들이 만든 프로토콜로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고 있지만, 1982년까지는 ARPANet에 연결된 일부 기관에서만 시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TCP/IP는 서로 다른 네트워크의 간의 연결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각 호스트 컴퓨터가 메시지 전송에 대한 책임을 담당하는 분산형 네트워크 구조를 잘 구현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문제는 서로 다른 네트워크 사이에서 데이터 패킷의 최적 이동경로를 정해 다음 장치로 전달하는 라우팅 기능을 담당하는 인터페이스 메시지 프로세서Interface Message Processor, 이하 IMP가 필요한데, 이것이 수출금지 품목이었다는 것이다. IMP는 군사기술로 묶여있어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일부 국가에만 허용되었다. 전길남은 IMP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냉전시기 북한, 중국,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에 둘러싸인 한국에 최첨단 장비를 이전해 주는 것에 우려가 컸다. 전길남이 “우리가 3.8선을 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고 설명해도 설득할 수 없었다. 결국 연구팀은 라우팅 기능을 소프트웨어로 처리할 수 있는 U-net을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로 선택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컴퓨터 네트워킹의 마지막 관문은 통신장비로 현재는 광케이블로 인터넷망을 구성하고 있지만, 당시는 전화회선이 유일한 통신설비였다. 연구팀은 서울과 구미 사이에 놓인 전화선을 모뎀에 연결한 후 다시 각 컴퓨터의 직렬 포트에 재연결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다행히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서울대와 인근 관악전화국 사이에 전용선을 할당하고, 구미전화국까지 가장 좋은 품질이 좋은 회선을 할당해 주면서 전용회선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네트워크 속도는 1,200bps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회선에 노이즈가 심해 계속 에러가 발생했고, 여러 차례의 시도와 실패를 거듭해 가까스로 연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연결을 시작으로 국내 최초 연구개발망인 SDN이 가동되었다. 처음에는 서울대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만 연결되었지만, 1982년 9월 전길남이 카이스트로 자리를 옮기면서 카이스트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전길남이 주도한 카이스트 SDN 운영센터가 설립되면서, 1984년에는 8개 기관, 1985년에는 16개 기관, 1986년에는 21대 기관의 50여 대 컴퓨터가 연결된 다중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이후에도 SDN은 컴퓨터 네트워크 운용이 상용인터넷 체제로 전환되는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대부분의 대학과 연구소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전길남이 SDN 개발을 시작한 목적은 국내 컴퓨터 네트워크 관련 기술개발을 위한 시험적 환경을 제공하고, 국내 연구개발자들 간에 신속한 정보 교환의 수단을 제공하며, 해외 학술망과의 연동을 통해 최신 연구정보의 입수와 해외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전길남은 국내 컴퓨터 네트워크가 완성되자마자 해외 학술망과의 연동 및 협력체계 구축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83년 8월에는 국제적 공동 광역 통신망 중 하나인 UUCPUnix-to-Unix Copy를 사용하여 유럽의 EUNET에 연결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미국의 UUCPNet에 연결될 수 있었다.
열린 인터넷의 씨를 뿌리다
이처럼 1982년 5월에 이루어진 결정적 순간은 제한된 기술인력과 부족한 경험 여기에 다양한 기술적, 정치적, 사회적 변수 속에서도 컴퓨터 네트워크 구축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을 찾아 마침내 이루어낸 결과였다. SDN이 개발되던 당시 미국을 제외한 영국, 프랑스, 일본 호주 등은 백지부터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길남은 선진국과 동일한 방식을 취하기보다는 이미 개발된 기술을 적절하게 선택하고 조합함으로써 한국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네트워크를 디자인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는 기민한 2등 혹은 재빠른 2등으로 미국을 제외한 그 어느 나라도 성공하지 못한 독자적 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한국이 오늘날 세계가 인정하는 정보통신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씨를 뿌렸다.
전길남이 뿌린 인터넷의 씨는 비단 하드웨어적인 네트워크 구축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카이스트 시스템구조연구실은 한국의 인터넷 양성소라 불릴 만큼 수많은 한국 인터넷 선구자들을 길러냈다. 그는 제자들에게 학계나 안정된 직업을 갖기보다는 세상에 의미 있는 일에 도전하도록 조언했다. 그 결과 허진호(아이네트), 정철(삼보인터넷), 박현제(두루넷), 강성재(아이큐브), 이철호(아이소프트), 원태환(디지털웨이브), 김정주(넥슨), 한근희(한시큐어) 등 그의 제자들은 한국의 최초 혹은 대표적인 인터넷 기업들을 창업하면서 인터넷산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그 역시 KAIST 교수 퇴임 이후 국제 인터넷 인큐베이팅 벤처인 “네트워킹닷넷”이라는 벤처회사를 창업하며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였다.
또한 전길남이 뿌린 인터넷의 씨는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1984년 2월 유네스코 워크숍에서 아시아넷Asia Net의 구축을 제안하고, 이듬해에는 아시아넷 추진 모임을 만들어 인도네시아, 태국,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전역에 인터넷 기술을 제공하면서 아시아넷이 구축될 수 있도록 기여했다. 그 결과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던 컴퓨터 네트워크 개발 분야에 아시아 연구자들의 참여는 물론 아시아의 독자적 지역 네트워크도 구축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넷의 효율적 운영을 논의하기 위해 1986년에는 컴퓨터통신합동워크샵Joint Computer Communication Workshop, JCCW2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의장을 역임했다. 이후 컴퓨터통신합동워크샵의 규모가 커지면서 1991년에는 아시아태평양네트워킹그룹Asia Pacific Networking Group, APNG으로 발전했다. 이후 아시아태평양네트워킹그룹을 통해 차세대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조직Asia Pacific Advanced Network, APAN, 아태지역의 인테넷 프로토콜 주소체계를 관리하는 조직Asia Pacific Network Information Center, APNIC, 아태지역 국가 도메인을 관리하는 조직Asia Pacific Top Level Domain, APTLD, 아태지역 인터넷 연합체Asia Pacific Internet Association, APIA 등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주요 인터넷 조직들이 파생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들은 다시 세계 인터넷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국제연구네트워크협력위원회Coordination Committee of Intercontinental Research Networking, CCIRN를 조직해 공동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카이스트 교수 퇴임 이후에는 아프리카 인터넷 전반의 문제에 조언하는 아프리카 프로젝트 국제 모임에도 참여했다. 이처럼 전길남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에 최초로 인터넷을 소개하고 보급하는 데 앞장서면서 인터넷의 세계화, 국제화에 기여했다. 그리고 이러한 전길남의 노력은 국제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아 그는 2003년 제1회 World Technology Forum에서 World Technology Award – Communication Technology를 수상했으며, 2012년에는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흔히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은 정부 주도의 압축적 성장이라 얘기된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이나 계획이 항상 완전한 것만은 아니었고, 과학자들은 그 속에서 길을 찾고 자신이 생각한 올바른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고자 노력했다. 하드웨어 개발에 치중한 정부의 컴퓨터 산업 육성책 속에서 꾸준히 소프트웨어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관련 연구 성과를 생산해낸 전길남의 사례는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과학기술자의 역할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 경로는 1960-70년대에는 성숙기 기술을 도입해서 소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가 1980년대 들어서면서 도입기 내지 성장기의 기술개발이 점차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전길남의 연구는 그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초기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초 인터넷 기술은 선진국에서도 이제 개발되기 시작한 최첨단 기술이었다. 전길남은 인터넷 기술의 개발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개발의 시공간을 함께 하면서 그 기술적 가치와 전망을 내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한국에 인터넷 기술을 이식했다. 도입 당시 인터넷 기술이 완벽하게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한국의 상황에 맞게 개발 중인 기술들을 한국에 뿌리내고자 했다. 네트워크 기술의 특성상 이는 단순히 한국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다는 의미를 넘어 한국을 새로운 네트워크의 세계로 이끄는 창을 열어주는 연구였다.
참고문헌
- The History of Computer Communicatons
- “Asian Internet Traces Roots To Kilnam Chon”, Internet Hall of Fame
- 한국 인터넷 역사 프로젝트
- Barry M. Leiner, Vinton G. Cerf, David D. Clark, Robert E. Kahn, Leonard Kleinrock, Daniel C. Lynch, Jon Postel, Larry G. Roberts, Stephen Wolff., Brief History of the Internet (Internet Society, 1997)
- 안정배 기록, 강경란 감수, 〈한국 인터넷의 역사: 뒤돌아보는 20세기〉(블로터앤미디어, 2014)
- 구본권, 〈전길남, 연결의 탄생: 한국 인터넷 개척자 전길남 이야기〉(김영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