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스위스 본에서 열린 국제태양연맹International Solar Union 5차 회의에서 항성 스펙트럼 분류위원회Committ on the Classification of Stellar Spectroscopy는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항성 스펙트럼 분류 체계 정립을 위해 모였다. 그 자리에서 <헨리 드레이퍼 목록Henry Draper Catalog>에서 사용한 하버드 분류법이 잠정적으로 채택되었다. 하버드 천문대의 애니 점프 캐넌이 만든 항성 스펙트럼 분류 기준이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헨리 드레이퍼 목록>이 지속적으로 보완되어 천체의 수많은 별들이 캐넌이 세운 질서에 맞춰 정리됨에 따라 캐넌의 분류법은 1922년 자연스럽게 공식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O Be A Fine Girl Kiss Me
고등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은 별의 분광형을 이렇게 암기하라고 알려줬다. 별의 분광형, O, B, A, F, G, K, M,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별 생각 없이 외우기에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수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자동으로 떠오를 만큼 열심히 외웠다. 그런데, 별의 분광형은 저런 이상한 문장을 만들어 외워야 할 만큼 그 알파벳에 규칙성이 없다. 저 암기 문장은 수능을 위해 한국에서 만든 암기용’콩글리시’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오래전 프린스턴의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하니, 그 규칙성이 우리에게만 안 보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OBAFGKM, 바로 이 불규칙한 일곱 개의 알파벳이 1913년 국제태양연맹에서 잠정 채택된 하버드 분류법이다. 1922년 국제천문연맹International Astronomical Union에서 항성 스펙트럼의 공식 분류법으로 채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배우고 있는 분류법이기도 하다. 이 분류법은 처음에는 별의 스펙트럼을 그 스펙트럼상의 특징에 따라 구분하기 위한 정리의 도구로 고안된 것이었지만, 점차 그 분류 체계와 그 순서가 별의 진화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뒤죽박죽 알파벳 순서가 중요하고 그 순서를 정립하는 것이 이후 천체물리학의 발전을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분류법을 체계화시킨 것은 하버드 여성 천체물리학자 애니 점프 캐넌Annie Jump Cannon, 1863-1941이었다. 1896년부터 40년 넘는 오랜 시간 동안 하버드 천문대에서 이루어진 캐넌의 항성 스펙트럼 분류 연구는 이 연구가 가지는 자연사적 특징 및 그 의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분광학은 신이 천문학에 준 선물이었다. 19세기 중반 분광학으로 특정 화학 원소를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천문학자들은 환호했다. 닿지도, 가지도 못하는 저 먼 곳의 화학적 조성을 알아낼 방법이 생겼다. 렌즈 연마 과정에서 렌즈의 초점을 테스트하는 데 사용되었던 태양 스펙트럼의 프라운호퍼선은 이제 태양에 존재하는 화학 원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지표가 되었고 프라운호퍼선의 진한 두 줄의 D라인으로부터 태양에도 지구에 있는 나트륨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천문학자들은 그들의 망원경에 프리즘을 달아 망원경으로 들어오는 별빛의 스펙트럼을 얻었다. 항성분광학stellar spectroscopy이 시작되었다.
항성분광학자들은 스펙트럼의 특성에 따라 별을 분류했다. 이탈리아의 가톨릭 사제이자 천문학자였던 안젤로 세키Angelo Secchi, 1818-1878는 별의 색깔, 수소 스펙트럼선의 강도, 밴드 스펙트럼의 특성, 방출 스펙트럼의 존재 등에 따라 별의 스펙트럼을 I~IV까지 네 그룹으로 구분하는 세키 분류법을 창안했다.(후에 I에 속한 스펙트럼 중 일부를 V로 재분류하여 다섯 그룹이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펙트럼에서 탄소 밴드가 나타나는 탄소별의 존재도 알아냈다.
독일의 천체물리학자 포겔Hermann Karl Vogel, 1841-1907은 세키의 분류법을 보완 수정한 항성 분류법을 제안했다. 그는 별의 스펙트럼이 별의 대기 온도 및 그에 따른 대기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별의 대기 온도가 태양보다 높으면 그 안에 포함된 금속 증기의 흡수 스펙트럼은 약하거나 거의 없게 나타날 것이고, 별의 대기 온도가 태양 정도이면 대기 내 금속의 흡수 스펙트럼이 강하게 나타나고, 온도가 낮으면 구성 물질들이 서로 결합하여 넓은 밴드의 흡수 스펙트럼을 보일 것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스펙트럼 선에서 나타나는 흡수 스펙트럼 선의 유무와 강약, 밴드 스펙트럼의 특징 등에 따라서 그는 세키의 분류법을 3단계로 재분류하되, 그 안에 a, b 그룹을 두어, Ia, Ib, Ic, IIa, IIb, IIIa, IIIb의 일곱 그룹으로 세분화했다. 포겔은 별의 스펙트럼이 현 상태 별의 물리적 상태 및 화학적 조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별의 진화 단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별의 스펙트럼 분류와 항성의 진화를 연결하는 이런 생각은 이후 항성분광학의 발전에 중요한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된다.
이제 하버드 분류법으로 들어가 보자. 하버드 분류법의 시작은 일찍 세상을 뜬 천문학자 헨리 드레이퍼Henry Draper, 1837-1882를 기리기 위해 그의 부인 메리 안나 드레이퍼Mary Anna Draper가 하버드 천문대에 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하버드 천문대장 에드워드 피커링Edward Charles Pickering, 1846-1919은 그 기부금으로 별의 스펙트럼을 분류한 항성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프리즘을 장착한 고성능 망원경을 준비하고, 남반구의 별을 찍기 위해 페루 아레퀴파Arequipa에 보이든 관측소를 설치했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하늘을 찍으면 그 하늘에 있는 수많은 별의 스펙트럼이 하나의 사진 건판에 찍혀 나왔다. 보통 한 개의 스펙트럼이 한 개의 별에 해당했는데, 8000장 가까운 사진 건판에 실린 수만 개의 별의 스펙트럼이 분류를 기다렸다.[그림 1]
하버드 분류법은 이 많은 별의 스펙트럼을 분류하는 효율적인 분류 체계를 찾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첫 하버드 분류법을 만든 것은 에드워드 피커링의 첫 여성 조수였던 윌라미나 플레밍Willamina Fleming, 1857-1911이었다. 플레밍은 당시 네 그룹이었던 세키분류법이 스펙트럼의 다양한 특징들을 분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스펙트럼선의 굵기나 강도를 더 세분화하여 세키의 I~IV까지의 네 그룹을 A~N(J 제외)까지 총 열세 개의 그룹으로 세분화하고 거기에 O, P, Q까지 세 그룹을 더해 알파벳 순서에 따른 새로운 분류법을 제안했다. 1890년 하버드 천문대에서 10,351개의 <드레이퍼 기념 항성표Draper Memorial Catalogue>를 출간함에 따라 하버드 분류법은 세키나 포겔의 분류법의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했다.
이후에도 메리 드레이퍼의 지속적인 지원 아래서 하버드의 항성 스펙트럼 분류는 이어졌다. 피커링은 여성들을 고용하여 항성 스펙트럼 사진을 분류하도록 했는데, 피커링의 가사도우미였던 플레밍처럼 천문학이나 물리학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들어온 사람도 있었지만, 변광성의 비밀을 발견한 헨리에타 리비트Henrietta Swan Leavitt, 1868-1921나 안토니아 모리Antonia Maury, 1866-1952, 그리고 캐넌처럼 래드클리프나 웰즐리 등 여대에서 전문적인 과학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하버드 여성 ‘컴퓨터’들은 대량 생산되는 항성 스펙트럼 데이터의 처리를 위해 저임금으로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당시 피커링의 남성 조수들은 평균 2,500달러의 연봉을 받는 반면, 하버드 여성 컴퓨터들을 감독했던 플레밍은 1,500달러, 그리고 다른 여성 컴퓨터들은 시간당 25~35센트로, 연봉으로 환산하면 주당 48시간 근무 시 600-900달러 정도를 받았다.1
연봉은 후하지 못했지만, 연구에 있어 피커링은 하버드 여성 컴퓨터에 꽤 많은 자율권을 부여했고 연구 발표 시에도 그들의 공헌을 명시적으로 밝혔다. 안토니아 모리는 그런 자율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사람이었다. 헨리 드레이퍼의 조카였던 안토니아 모리는 그 인연으로 하버드 천문대에 들어왔다. 피커링은 모리에게 북반구의 밝은 별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맡기면서 모리가 자체적인 분류법을 고안하게 했다. 681개의 별의 스펙트럼을 세밀하게 분석한 모리는 플레밍이 고안한 열여섯 단계의 알파벳 분류법 대신 로마 숫자로 I에서 XXII까지 22그룹으로 분류하는 새로운 분류법을 제안했다. 수소선의 강도, 금속선의 강도, 태양이나 오리온 등 대표적인 항성과의 스펙트럼 유사성, 방출/흡수 여부 등에 따라 22단계가 나누어졌다. 여기에다가 모리는 스펙트럼선이 흐릿한지 선명한지의 기준에 따라 a, b, c, ab, ac의 다섯 그룹을 추가적인 분류 기준으로 넣었다. 이에 따라 모리의 항성 스펙트럼 분류법에서는 총 110 그룹의 상세한 분류 단계가 제시되었다.2
모리의 분류법에 대한 반응은 전반적으로 좋지 않았다. 110개나 되는 분류 단계를 두고 이렇게 할 거면 별마다 각각 분류 단계를 설정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무엇보다 작업 도구로서 너무 많은 분류 체계는 비효율적이고 실용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리의 분류법은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플레밍의 분류법에서 제시한 A, B, C… 의 알파벳의 순서를 뒤바꿔 놓았다는 데 있다. 그는 별의 분류 단계가 별의 진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이에 따라 진화 단계에 맞춰 로마 숫자의 순서를 배열했다. 모리의 로마 숫자의 순서에 따라 플레밍의 알파벳 분류를 재 정렬하면 BAFGKMO라는 순서가 되어 O의 순서만 제외하면 후에 공식 채택되는 하버드 분류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리는 오리온 대성운이나 플레이아데스 대성운 주변에서 B타입의 별이 많이 관측되는 점을 근거로 이 그룹에 속하는 별들은 별의 진화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별의 스펙트럼을 별의 진화 단계와 연결했던 포겔과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존재한다. 포겔은 별이 초기 진화 단계에 있을수록 그 별의 온도는 더욱더 뜨거울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별의 온도에 따라 분광형이 다를 것이라는 가정을 발전시켰다. 이에 비해 모리는 별이 탄생하는 대성운 주변에 B 타입 분광형을 보이는 별이 많다는 공간적 분포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분광형이 별의 진화 단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는 것을 보였다. 요컨대, 포겔이 별의 진화에 대한 가설을 제시했다면, 모리는 별의 스펙트럼을 근거로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했다.
자, 이제 하버드 분류법의 완성자 애니 점프 캐넌으로 가보자.
캐넌은 1880년 매사추세츠의 웰즐리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했다. 당시 웰즐리 대학교의 물리학 교수였던 사라 화이팅Sarah F. Whiting, 1847-1927은 물리학의 최신 실험 기법을 빠르게 쫓아 나갔던 학자였다. 당시 물리학의 ‘핫토픽’이었던 분광학이나 X선의 실험 테크닉을 빠르게 습득했으며 학부 수업에도 도입했다. MIT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학부생용 물리실험실을 만들기도 했는데, 화이팅의 발빠른 행보의 수혜자 중 한 명이 캐넌이었다. 캐넌이 입학한 1880년 화이팅은 처음으로 실용 천문학 수업을 개설하여 항성분광학의 여러 기법을 소개했다. 특히 화이팅은 스펙트럼 패턴 인지를 강조했는데, 이를 위해 학생들에게 그림drawing을 배우게 했으며 스펙트럼을 찍기 위한 사진술도 가르쳤다. 여러 사람을 놀라게 했던 직관에 가까워 보였던 캐넌의 스펙트럼 패턴 인식은 화이팅 밑에서 훈련받은 것인데, 이는 웰즐리에서 배출한 여성 천문학자들이 가지는 큰 강점이었다.
천체물리학자로서 캐넌의 본격적인 커리어는 1896년 하버드 천문대에 에드워드 피커링의 조수로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피커링은 페루의 아레퀴파에서 찍은 남반구 별의 스펙트럼 분류를 캐넌에게 맡겼다. 1899년까지 하버드 천문대로 보내진 1,122개의 별의 스펙트럼을 찍은 5,961개의 사진건판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일이 그의 책임하에 이루어졌다.
캐넌은 모리의 로마 숫자 분류법 대신 플레밍의 알파벳 분류법을 기본으로 하되 거기에 자신만의 체계를 덧붙였다. 그는 발머 계열(수소 스펙트럼)과 피커링 계열(헬륨 스펙트럼)을 기준으로 항성 스펙트럼을 분류했다. 이를 기준으로 해서 플레밍 분류법에서 16그룹에 해당했던 것을 그에 대응하는 별이 발견되지 않는 단계를 제외하고 A, B, F, G, K, M, O의 7그룹과 행성 모양 성운에 해당하는 P, 밝은 스펙트럼선을 보이는 특이별에 해당하는 Q를 채택하여 총 9그룹만을 남겼다. 그리고 B와 M 사이에 그룹별로 10단계의 세부 단계를 설정했다. 예를 들어 B와 A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B5A, F와 G의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스펙트럼에는 F2G 등 그 유사도에 따라 중간 단계를 10단계로 나누어 분류했다. 후에 이는 B5, F2 등으로 더 간단한 형태로 표시되었다. 또한 그는 방출 스펙트럼을 내는 O그룹을 스펙트럼 분류의 제일 앞으로 가져왔고 B그룹도 A그룹 앞에 두었다.
이렇게 하여 캐넌은 지금 우리가 배우는 O, B, A, F, G, K, M의 순서를 완성했다. 이는 앞선 하버드 여성 천문학자였던 플레밍과 모리의 분류 체계를 종합하여 정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캐넌은 별의 스펙트럼의 분류 체계와 그것이 나타내는 별의 진화적 의미를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흥미로운 점은 캐넌도 이 분류 체계의 순서가 별의 진화적 단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캐넌 자신은 그런 이론적 논의로 들어가는 것을 자제했다는 점이다. 그는 별의 진화에 관한 가설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언제나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분류 체계의 확립을 목표로 삼았다.
캐넌의 항성 스펙트럼 분류는 계속 이어졌다. 1901년에 출간된 1,122개의 남반구의 별에 더해 1912년 <하버드 칼리지 천문대 연보>에는 캐논이 분류한 1,477개의 별의 목록이 발표되었다. 캐넌의 분류법을 채택하여 하버드 천문대에서 거의 5,000개가량의 별의 분광형이 목록화했다.
1910년 마운트 윌슨 천문대에서 열린 국제 태양연맹 4차 회의에서는 항성 스펙트럼 분류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항성분광학 전문가들에게 캐넌이 정립한 하버드 분류법을 공식적으로 채택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설문을 돌렸다. 하버드 분류법이 가장 유용한 분류법이라는 데 동의하는가, 이 시스템에서 수정할 부분은 무엇인가, 위원회에서 보편적인 분류법을 채택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모리가 제안한 스펙트럼선의 너비를 분류 기준에 포함할 필요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이 포함되었고 총 28명이 응답을 보냈다. 상당수의 응답자가 하버드 분류법이 현존하는 가장 유용한 분류법이라는 점에 동의했지만 이를 공식으로 채택하는 것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다. 전문가들도 하버드 분류법의 엉망진창 기호들에는 불만을 표시하면서 O를 A로 바꾸고 순서를 재정비해야 한다거나 숫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3 이때의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913년 국제 태양연맹 5차 회의에서 하버드 시스템이 잠정적인 분류법으로 채택되었다.
캐넌의 분류 작업은 계속되었다. 1918년부터 그는 피커링과 함께 <하버드 칼리지 천문대 연보>에 <헨리 드레이퍼 목록>을 발표했다. 1919년 피커링이 3편의 출판을 끝으로 세상을 뜨자 남은 6편의 편집은 전적으로 캐넌에게 맡겨졌다. 그는 평균 5명의 여성 컴퓨터들과 함께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헨리 드레이퍼 목록>을 완성해 나가 1924년 9편을 마무리했다. 이 과정에서 탄소별을 의미하는 Nc 그룹이 새로 도입되었고 새로운 S형 별도 새로 도입되는 등 하버드 분류법은 <헨리 드레이퍼 목록>의 지속적인 출간에 따라 계속해서 수정, 보완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225,300개의 별에 대한 스펙트럼 분류가 완성되었다.
1922년 국제천문연맹에서 하버드 분류법을 항성 스펙트럼의 공식 분류법으로 채택하게 된 데에는 이렇게 방대한 <헨리 드레이퍼 목록>의 출간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드 분류법과 경쟁했던 그 어떤 시스템도 이렇게 많은 별을 분류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이는 하버드 분류법을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캐넌과 피커링, 그리고 플레밍과 모리를 비롯해 그들과 함께했던 하버드 여성 천문학자들의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의 성과였다.
캐넌이 하버드 분류법을 정립하고 <헨리 드레이퍼 목록>을 완성하여 하버드 분류법을 국제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훌륭한 천문학자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그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여 스펙트럼 분류를 일관되게 하는 데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일례로 수년 전에 분류한 사진건판을 들고 가서 다시 분류해보라고 하면 그 결과가 수년 전과 똑같아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그의 놀라운 스펙트럼 인지 능력을 두고 하버드 천문학자 오웬 깅거리치Owen Gingerich는 매우 희미한 스펙트럼의 경우에는 선스펙트럼 대신 연속적인 에너지 분포를 분류 기준으로 삼았던 덕에 이런 일관된 패턴 인지가 가능했다고 진단했고, 과학사학자 클라우스 헨첼Klaus Hentschel은 스펙트럼의 각 부분을 세부적으로, 논리적으로 분석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그 총체를 인지하는 “게슈탈트 인지gestalt recognition”라고 평가했다.4
그런데 우리가 과학자들을 평가하는 기준들, 예를 들면 새로운 법칙의 발견이나 새로운 현상의 발견이 있는가라고 묻고 이 기준을 가지고 캐넌의 연구를 평가한다면 그의 연구는 생산된 데이터를 수집, 분류하는 연구의 첫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저임금 저평가된 하버드 여성 컴퓨터들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런 종류의 연구는 흔히 과학계의 천재라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종류의 연구는 아니다.5
수십 년 동안 항성 스펙트럼 분류에 매진했던 것에 비하면 캐넌은 놀랄 만큼 항성 스펙트럼의 해석 및 이론화 작업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별의 주성분이 수소와 헬륨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한 하버드 여성 천체물리학자 세실리아 페인 가포슈킨Cecilia Payne-Gaposchkin, 1900-1979은 하버드 학생 시절 만났던 캐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존경과 불만이 섞인 평가를 했다.
수년간 그의 영역이었던 스펙트럼을 해석하려고 하는 어리고 미숙한 학생의 주제넘은 짓에 화를 낼 만도 한데, (캐넌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 그렇게 오랫동안 항성 스펙트럼 연구를 한 사람이 그로부터 어떤 결론도 끌어내려고 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놀랍기도 하다. 그는 순수한 관찰자였고 어떤 해석도 시도했던 적이 없다.6
캐넌에게서 보이는 놀라운 패턴 인지 능력에 대비되는 이론과의 거리 두기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 한동안은 이와 같은 모습을 여성 과학자의 지적 능력의 부족 증거로 이야기하기도 했고, 다른 쪽에서는 사회적 장벽으로 인해 여성 과학자들이 과학계에서 중요한 일에 접근하기 어려웠다는 차별의 증거로 거론하기도 했다. 여성 과학자에 대한 입장은 다르지만, 두 입장 모두 이런 종류의 연구가 가치가 떨어지는 허드렛일이라는 평가에서는 같은 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이론적 해석을 멀리하는 특징은 당시 분광학 분야의 전반적인 연구 경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캐넌이 활동했던 20세기 초반 분광학은 물리학의 주류 분야 중의 하나였고 많은 물리학자들이 원자 스펙트럼 분류에 뛰어들었다. 이들은 가시광선을 넘어 자외선이나 적외선 영역에서 원자 스펙트럼을 찍어내고 분류하는 일을 중요한 연구 주제로 삼았다. 더 정교한 회절격자를 만들고 단열, 무진동의 실험실을 만들어 더 정확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많이 얻어내려 했고 스펙트럼의 파장을 정확하게 읽어내기 위해 실험 도구를 개선했다. 이렇게 원자 스펙트럼 측정 및 분류에 매진하는 모습을 두고 러더퍼드는 “묘사만 하는 식물학descriptive botany”이라고 깔보았고 좀머펠트는 “제만 동물학Zeeman Zoology”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다른 분야의 비판이 어떻든 간에 분광학 내에서는 이런 정밀하고 정교한 분류 활동 및 그 과정에서 얻는 숙련성을 그 분야 과학자들의 중요한 전문성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1930년대에 MIT 물리학과의 조지 해리슨George R. Harrison이 원자 스펙트럼의 파장과 강도를 자동으로 측정하는 기계를 만들었을 때 일부 분광학자들은 이에 대해 반감을 드러냈다. 대표적으로 해리슨의 절친한 동료였던 미국 표준국의 윌리엄 메거스William Meggers는 해리슨의 자동화 기계가 분광학자들의 “믿을만하고 진정한tried and true”방법을 “잽싸고 더러운quick and dirty” 방법으로 바꿔 놓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분광학계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캐넌이 이론적인 해석을 멀리하고 별의 스펙트럼의 일관된 분류에 집중했던 것은 지적 능력의 부족이나 여성 과학자의 열악한 지위에 의한 것보다는 당시 분광학자들의 일반적인 규범에 맞춘 연구 스타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분광학자들의 스펙트럼 분류가 이후 분광학이 화학 등 다른 분야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데 기여했던 것처럼, 캐넌의 분류법과 일관된 항성 스펙트럼 분류 데이터는 세실리아 페인 가포슈킨과 할로우 섀플리Harlow Shapley와 같은 다음 세대의 천체물리학자들의 천체 진화에 대한 이론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이론에 흔들리지 않는 분류가 있었기에 튼튼한 이론이 그 위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
Klaus Hentschel, Mapping the Spectrum: Techniques of Visual Representation in Research and Teaching (Oxford Univ. Press, 2002)
- B. Hearnshaw, The Analysis of Starlight: One Hundred and Fifty Years of Astronomical Spectroscop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 데이바 소벨 지음, 양병찬 옮김, <유리우주: 별과 우주를 사랑한 하버드 천문대 여성들> (알마,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