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제임스 왓슨James D. Watson, 1928-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 중의 한 명으로, 분자생물학의 탄생과 진화, 그 발전 과정의 중심에 서 있었던 학자이다. 그는 1953년 DNA 구조의 발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유망한 과학자로 부상했으며, 이후 1992년 인간유전체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의 리더 자리를 사임할 때까지 분자생물학의 결정적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버클리 대학의 저명한 분자생물학자 군터 스텐트Gunter Stent는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Francis Crick이 유전물질인 DNA 분자의 구조를 밝힌 논문이 출판된 1953년 4월 25일을 분자 생물학의 탄생일이라 할 정도였다.

왓슨은 DNA 분자가 이중나선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규명한 공로로 1962년 노벨상을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1965년 새로 정립된 분자생물학 분야의 기념비적 교과서, 『세포의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 of the Cell』을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준비하여 새로 발전하고 있었던 분자생물학 분야의 교육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무엇보다 왓슨은 경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짧은 하버드 교수 생활을 청산하고, 3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뉴욕의 분자생물학 연구소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Cold Spring Harbor Laboratory의 디렉터로서 활동하며 분자생물학의 연구 방향을 형성하고 다음 세대 연구자들을 후원할 재정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자신의 대부분의 과학적 삶을 보냈다.

하지만 왓슨은 그 특유의 오만함으로 자신이 지닌 사회적 편견을 가감 없이 표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과학적 삶을 마감해야 했다. 그는 1968년 DNA 구조 발견 과정을 그린 『이중나선The Double Helix』를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가감 없이 분자생물학자들의 모습과 그 업적을 기리면서 여성 과학자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드러내고, 승리를 위해서는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해 어떤 일이라도 하는 과학자들 간의 비열한 경쟁을 그리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노년에 흑인의 열등한 사회 경제적 지위가 그들의 지능과 유전자 때문이라는 사회적 편견을 드러내고 이를 과학적으로 옹호한다는 큰 비판을 받으며 결국 과학계로부터 퇴출당했다.

 

 

B학점을 받은 평범한 대학생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왓슨은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IQ 120 정도의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퀴즈 키즈Quiz Kids라는 라디오 쇼에 출연을 계기로 1943년 15살의 나이에 시카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장학금을 거머쥐게 된다. 당시 시카고 대학은 첫 2년은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배우고 마지막 2년은 대학 교과 과정을 배울 수 있는 교과과정을 마련하여 우수한 고등학생을 조기 입학시키는 제도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학구적 분위기에 빠져들어 우수한 연구자로 성장할 인재를 양성할 목적이었다고 한다.

시카고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왓슨은 보통의 B 학점을 받는 학생이었다. 왓슨은 그런데도 항상 어떤 주장의 근거가 되는 원래의 자료와 근거original sources를 찾아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사실보다 이를 종합할 수 있는 이론이 매우 중요하고, 이에 기억보다는 비판적이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는 시카고 대학의 지적 전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비판적인 지적 전통을 평생 그의 과학적 작업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왓슨은 학부 시절 시카고 대학에서 당시 활발히 연구되고 있던 유전학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특히 핵폭탄 개발과 투하 이후에 방사선이 생물의 유전자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으며, 그는 이와 관련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 1947년 19살에 시카고 대학을 졸업한 왓슨은 당시 토마스 모건의 초파리 연구로 유전학의 메카로 부상했던 칼택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에 지원했으나 입학 허가를 받지 못하고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하버드 대학도 지원했으나 역시 결과가 좋지 못했다. 다행히도 당시 방사선이 유전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일리노이 대학의 실험실에서 그를 받아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1950년까지 X선X-ray가 박테리아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생물학적 과정에 대한 연구를 무난히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3년, 유전물질의 구조를 규명

1951년 10월 왓슨은 지도교수의 도움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University of Cambridge의 캐번디쉬 실험실Cavendish Laboratory에 합류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프란시스 크릭을 만나 당시 생물학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던 유전물질의 구조를 규명하는 작업에 다소 무모하게 동참하게 된다. 이미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은 X선 분광학을 통해 DNA의 구조를 밝히기 위한 노력의 선두에 서 있었으며, 노벨상 수상자였던 라이너스 폴링은 화학 결합의 각도와 원자들의 여러 특징이 결합할 때 나타나는 제한을 고려하여 DNA의 모델을 만들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특히 1952년 5월 프랭클린은 DNA 이중나선 구조의 단서가 될 유명한 51번 사진을 찍어 DNA 구조의 해결에 거의 다 다다른 상태였다. 하지만 폴링은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국외 여행이 어려워 영국의 X선 회절 사진과 데이터를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릭 또한 혼자서 언젠가는 DNA 구조를 밝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 쟁쟁한 경쟁자들에 비해 왓슨이 가지고 있었던 장점은 젊은 과학자가 지닐 수 있는 성급함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었다. 그는 경험과 지식, 재원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DNA의 구조를 찾기 위해 크릭과 협력을 제안하며 경쟁에 뛰어들었다.

DNA 구조 발견에 있어 왓슨의 기여는 그가 DNA 염기들이 규칙적으로 결합하는 방식, 즉 네 개의 염기서열, A, T, G, C 가 A-T, G-C로 결합하는 베이스 페어링이 DNA 구조 해명의 열쇠라고 생각한 점에 있었다. 왓슨과 크릭은 X선 회절 사진 데이터에 기반하여, 그리고 폴링과 같이 원자들의 구조적 제약들을 고려하여 철판을 가위로 오려가며 3차원으로 DNA 분자 모델을 만들었다. 이들이 처음 제안한 모델은 재앙 수준의 실패였지만, 경쟁자 프랭클린 몰래 얻게 된 51번째 X선 회절 사진은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했다. 그녀의 사진과 자료에 기반했기에, 1953년 4월 25일 저널 네이처Nature는 DNA 구조를 밝히는 그들의 논문, 그리고 이 모델을 확증하는 프랭클린의 논문을 나란히 출판하였다. 이 논문은 생화학과 물리학의 결합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밝힐 수 있다는 분자생물학적 접근의 가장 큰 성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왓슨의 이 논문은 분자생물학이 유전물질의 분자적 구조를 성공적으로 규명했음을 보여주는 기념비적 논문이 되었다.

 

분자생물학의 논쟁적 옹호자가 되다

1953년 5월 왓슨은 뉴욕의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에서 유전물질의 구조적 기반에 대해 강연을 한다. 그는 분자생물학적 접근의 성공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부상했으며, 곧 칼텍에서 DNA에 이어 RNA의 구조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을 실패로 끝났지만, 왓슨은 곧 1955년 하버드 대학교수로 임용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DNA 구조 규명 이후 가장 큰 주제로 부상한 연구 질문, 즉 유전물질인 DNA가 어떻게 생명체의 다양한 기능들을 담당하는 단백질을 만드는지를 밝히고자 했다.

1962년 노벨상을 받은 왓슨은 분자생물학의 가장 열정적인 옹호자로서 자신의 과학적 정체성을 만들어나갔다.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의 기념비적 교과서, 『세포의 분자생물학Molecular Biology of the Cell』을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저술하여 출판하였다. 이 저서는 분자 수준에서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다양한 기작mechanism들을 그림으로 나타내며 과학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았다.

그렇지만 왓슨의 성급함과 무모함은 그의 하버드 시절 연구와 행정에서 큰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분자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연구주제로 부상한 단백질 합성 연구에 뛰어든 왓슨은 자신의 실험실을 여러 그룹으로 나누고, 이들을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매주 열리는 실험실 미팅에서 성과가 좋지 않은 그룹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하며 연구자들과 학생들을 몰아붙였다. 이에 많은 학생과 연구자들이 그의 실험실을 떠났으며, 왓슨은 하버드 재직 기간 동안 1년에 1-2개 정도의 논문밖에 출판하지 못할 정도로 비생산적인 기간을 보냈다. 왓슨은 또한 분자생물학적 접근만이 진정한 과학이라며 그렇지 않은 전통적 생물학자들을 깎아내렸다. 이에 진화학이나 생태학자를 영입하려는 동료들과 소위 “분자 전쟁”을 일으켰으며, 진화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왓슨은 자신이 만난 “가장 불쾌한 과학자”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할 정도였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과학, 이중나선

1960년대 말 미국 사회에서 베트남전과 환경오염 등으로 과학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크게 나타났다. 현대 과학이 전쟁 무기와 유해한 화학물질을 개발하는 “죽음의 과학”이라는 공격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1968년 출판된 왓슨의 『이중나선』은 현대 과학자들의 경쟁적인 모습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이들 간의 시기와 음모, 비판과 공격을 폭로하며 현대 과학에 비판적인 이들의 주장과 공명했다. 이 책에서 왓슨은 DNA 구조의 발견을 둘러싼 과학자들 간의 경쟁, 좌절과 비판, 비방을 마치 스펙터클을 통해 명성을 얻고 싶어하는 사람들 간의 야비한 경쟁처럼 그려내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크릭은 이 책을 출판하면 명예 훼손으로 왓슨에게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위협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왓슨은 변호사를 고용해 책을 출판하기를 꺼렸던 출판사를 소송을 당해도 패할 위험이 없다고 설득해야 했다.

왓슨의 『이중나선』은 출판과 동시에 타락해버린 과학자의 모습에 한탄하는 기존 과학자들의 큰 비판에 직면했다. 한 과학자는 왓슨의 책이 가십거리와 흥미 없는 개인의 일기에 불과하다며, 이를 마치 영양가 없는 탄산음료에 비유하기도 했다. 특히 DNA 이중나선 구조의 규명에 큰 단서를 마련해준 DNA 염기서열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어윈 샤가프Erwin Chargaff는 <사이언스지Science>를 통해 왓슨과 크릭이 프랭클린의 51번 사진을 훔친 것과 마찬가지라며 공격했다. 후대 연구자들은 실험 데이터만 수집하고 이론적인 통찰이 부족하다는 프랭클린에 대한 왓슨의 조소와 비판이, 오직 경쟁에 승리하기 위한 그녀의 사진을 허락 없이 본 자신의 비윤리적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라 해석하며, 왓슨의 저서가 그녀에 대한 야비한 묘사를 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왓슨의 『이중나선』은 그 특유의 솔직함과 오만함을 드러내며, 과학자들이 개인의 명성과 성공만을 추구하며, 그 행동과 도덕적 판단에 있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폭로했다. 이에 당시 과학에 대해 회의적인 대중들에게 왓슨의 책은 진리를 추구하는 고귀한 학자로서의 과학자의 모습은 신화일 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대중들에게 과학자들이 결국 명성과 성공을 위해 극심한 경쟁rat race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다고 폭로한 『이중나선』은 과학자에 대한 전반적인 상을 바꾼 책이었으며, 이에 2012년 미국 의회 도서관은 이 책을 “미국을 형성한 책들” 88권 중 한 권으로 선정하였다.

 

 

사회적 편견으로 과학계에서 퇴출되다

1970년대 이후 왓슨은 연구자라기보다는 분자생물학의 사회적 함의에 대한 그의 주장으로 각종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무모한 야망과 성급함으로 인간이 지닌 유전정보를 밝히려는 거대 인간유전체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여러 과학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프로젝트의 리더가 되었다. 그는 유전체학의 발전이 우생학적 개입과 인종주의를 강화할 것이라는 비판에 부딪혀, 인간유전체 프로젝트 예산의 일부를 유전학의 역사와 이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연구를 지원할 수 있도록 배정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왓슨은 2000년대 들어 생물학자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여성과 흑인에 대한 자신의 사회적 편견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비판에 처하게 되며 급기야는 과학계로부터 퇴출당하는 처지에 처하게 된다. 2007년 왓슨은 인종 간의 지능의 차이에 생물학적, 즉 유전학적 기반이 있다고 언급하여 인종주의racism를 옹호한다는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가 35년 동안 일했던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의 이사회는 왓슨의 이러한 사회적 편견의 표출은 과학적 근거가 없을뿐더러 용인될 수 없는 것이라며 그를 해고했다. 사회적 편견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을 오용하는 것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왓슨은 과학계에서 퇴출당하며, 공식적으로 그의 오랜 과학자로서의 삶을 마무리하게 된다.

참고문헌

 

  1. John R. Inglis, Joseph F. Sambrook, and Jan A. Witkowski (Eds), Inspiring Science: Jim Watson and the Age of DNA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 Press, 2003).

  2.  
  3. Soraya de Chadarevian, Designs for Life: Molecular Biology after World War II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4.  
  5. Howard Markel, The Secret of Life: Rosalind Franklin, James Watson, Francis Crick, and the Discovery of DNA's Double Helix (W.W.Norton, 2021).

이두갑
서울대학교 과학학과 교수